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성주(칭호) (문단 편집) == 상세 == 이원진(李元鎭)의 《탐라지》에 따르면, >“신라 때 [[고후(탐라국)|고후(高厚)]], 고청(高淸), 고계(高季) 3형제가 바다를 건너와서 조공하니 왕이 기뻐해 작호를 주었는데, 고후에게는 '''성주'''(星主), 고청에게는 '''왕자'''(王子), 고계에게는 '''도내'''(都內)라 하고 국호를 주어 '''탐라'''라고 했다.” 라고 하여, 성주 등의 고유 칭호는 [[신라]] 때부터 사용된 것으로 파악된다. "별의 주인"이라는 의미인 '성주'를 칭한 이유는 당대 탐라사람들이 항해술에 이용되는 별자리와 북두칠성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관련된 호칭이 나옴과, 지금도 제주시 옛 저자 터에는 북두칠성 모양을 본 뜬 제사유적인 칠성대(칠성단)가 흔적으로 남아있다. 탐라국은 [[백제]] 때부터 복속되어 [[신라]]와 [[고려]]로 이어졌으나, 탐라국이 해체되어 지방 행정구역으로 편성된 것은 고려 중기인 1105년에 탐라군(耽羅郡)이 설치된 때였다. 그 전까지 탐라국은 '번국(藩國)' 지위로 취급되었기에 어느정도 독립성이 인정되는 '외국'이었으며, 탐라 출신인 사람은 고려에서 시행되는 [[과거 제도|과거]]에 응시하기 위해서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시행되는 빈공과(賓貢科)로 치러야 했다. 때문에 《책부원구(冊府元龜)》 등의 문헌에선 탐라국의 군주를 '탐라국왕'으로 기록하기도 했다. 탐라군의 설치로 사실상 고려에 합병된 이후에도 탐라왕의 후예들은 '성주'와 '왕자' 지위를 세습했다. 이 때부터 고려의 조정에서는 성주들에게 주로 [[산계#무산계|무산계]]를 수여했는데, 대부분이 종5품의 유격장군이었으며, 정5품의 정원장군으로 승진하거나 처음부터 종3품의 운휘대장군에 오른 사례도 있다. [[조선]] 때인 1404년부터 성주는 '좌도지관(左都知管)'으로 왕자는 '우도지관(右都知管)'으로 개칭했다가, 1445년에 세습제를 완전히 폐지하여 '상진무(上鎭撫)'와 '부진무(副鎭撫)' 체제로 개편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