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성저십리 (문단 편집) == 상세 == 성외(城外) 지역이라고도 한다. 사대문안인 성내의 지역과는 다르게 상주 인구가 상당히 적은 편이었으며, 매장과 벌목 등이 금지되어 있었다. [[조선]]시대 당시에는 왕릉(성북구 정릉[* 성저오리의 경계지역이었으나 성저십리 확장으로 성저십리 한복판으로 편입된 케이스다.] 제외)이나 공동묘지가 성저십리 바로 코앞인 [[구파발]]이나 [[태릉(문정왕후)|태릉]] 등에 있었거나 [[서울/강남|강남]], [[남양주시|남양주]] 등 주변 지역에 있었던 이유다. 이와 같은 이유로 6대 이상 [[서울토박이]]들의 선산(가족묘지)은 [[고양시]], [[양주시]], [[남양주시]], [[용인시]] 등지에 위치한 경우가 많다. 따라서 성저십리를 조선시대의 [[그린벨트]]로 일컫는 사람도 있다. 성저십리와 사대문안을 합치면 그 면적이 현 [[서울특별시]] [[서울/강북|강북]] 지역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조선후기를 기준으로 강북에서 [[노원구]], [[도봉구]], [[중랑구]], [[광진구]] 전부와 [[은평구]] 일부([[수색동]], [[증산동]], [[진관동]] 전역과 [[신사동(은평구)|신사동]] 일부 제외), [[강북구]] 일부([[우이천]] 지류인 화계천 이북 [[수유동]] 일부 및 [[우이동]] 제외), [[마포구]] 일부(상암동 제외)를 제외한 전역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부터 1930년대까지)에 농촌 지대로, 사대문안 거주자들에게 식량 제공처와 같은 역할을 했다. 수송 수단이 발전하지 않은 전근대 사회에서 도시에는 항상 거주자들에게 식량을 공급할 수 있는 경작지가 필요했으며, 도시의 인구 규모는 거의 전적으로 해당 도시 근교의 식량 생산력에 의존했다. 한양은 한반도 최대도시로서 막대한 식량을 요구했기 때문에 근교에 넓은 농지가 필요했던 것이고, 어차피 한양 사람들이 농사지어서 먹고 사는 평야였기 때문에 행정구역상으로도 한성부에 편입시켰다. 뒤에 또 나오지만, 사대문안이 진정한 한양이고, 성저십리 지역을 비롯한 당시 외곽지역(현 서울특별시에 속한)은 한양이 아닌 경기도였다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성저십리도 조선시대 때부터 엄연히 '''한양'''이었다. 비슷하게 오해를 받는 [[한성부]]를 살펴보면, 한성부를 조선시대에도 경기도 관할이었단 점을 들어[* 사실 한성부가 완전히 경기도와 별개로 분리된 지역이라는 설과, 경기도가 한성부까지 간접적으로 관할했다는 설로 갈린다. 다만, 역으로 경기도도 [[포도청]]의 관할구역이었다.], '한양이 아닌 경기도'라고 인식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한성부]]는 조선 후기부터가 아니라 조선 초부터 중앙 직할의 행정기관으로 쳤으며,[[http://m.terms.naver.com/entry.nhn?docId=1181480&cid=40942&categoryId=33373|출처 : 태종때부터 중앙직할이라 기술.]] 정2품인 한성 판윤은 관찰사(현재의 도지사) 종2품보다 더 높은 직급이었다. 물론 [[여의도]]를 제외한 [[서울/영등포|영등포]], [[서울/강남|강남]]을 포함한 한강 너머 전 지역은 저 때도 경기도 시흥현([[시흥군]]), [[광주부#s-1|광주부]]([[광주군(경기도)|광주군]]), 과천현([[과천군]]), 양천현([[양천군]]), 부평부([[부평군]])에 속했다. 괄호 안은 [[23부제]]를 시행할 때 명칭이다. [[고려]] 초기에 [[양주시|양주]] 일부였다가[*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나오는 [[정도전]]의 신도가(新都歌) 첫 구절 "녜ᄂᆞᆫ 양쥬 ᄭᅩ올히여(옛날에는 양주 고을이었다) 디위예 신도형승(新都形勝)이샷다(그 경계에 새 도읍의 형상이 빼어나도다)] 현 서울 도심일대가 [[남경(고려)|남경]]으로 승격되면서 서대문구 일부와 용산구 일대가 그쪽으로 편입되었고, 나머지 지역은 양주 일부로 남았다는 설이 있고 남양주 삼패동까지 남경 직할지였다는 설도 있다. 이성계가 도읍을 정할 때 지금 [[종로]] 일대를 수도로 하고, 1395년 [[1395년]] [[6월 6일]]에 한양부를 옛 수도인 개성부를 따라 한성부로 개칭하면서 양주군을 한양에서 분리시키며 [[한양도성]] 바깥에 있는 지역은 [[고양군|고양현]]과 [[양주군]]으로 편입시켰다. 현 [[용산구]] [[둔지산]]을 경계로 서쪽은 부원현(富原縣)에, 동쪽은 [[양주군]]이 되었고, 양주군 관아는 지금의 [[광진구]] [[광장동]] 일대 또는 [[양주시]] 고읍동 일대에 두었다. [[1424년]]([[세종(조선)|세종]] 6년)에 이르면 한성부의 인구가 증가하고, 공신들에게 나눠 줄 땅이 모자라져 [[흥인지문]]과 [[남소문]][* 현재 남소문이라 부르는 [[광희문]]은 이때 없었고, 남소문은 지금의 반얀트리호텔 바로 옆에 있었다.] 바깥 지역을 한성부에 편입하고 동부 인창방(仁昌坊)과 숭신방(崇信坊), 남부 정심방(貞心坊)과 예성방(禮成坊) 성신방(誠身坊)으로 편제했다. '''이것이 [[성저십리]]의 시초이다.''' 당시 편입된 지역은 둔지산 동쪽의 현 [[용산구]] [[이태원동]]부터 [[성동구]] [[성수동]]까지, 북쪽으로는 [[강북구]] [[수유동]]에 이르렀고, [[신당동(서울)|신당동]], [[행당동]] 이남 지역은 남부에, [[왕십리]] 이북 지역은 동부에 들어갔다. [[1461년]] [[2월 27일]]에 동쪽으로 큰고개(현재 동)와 송계원()까지 서쪽으로 양화진(절두산), 노고산, [[불광천]]을 잇는 선까지 모두 성저십리에 편입되었다. [[1426년]](세종 8년)에 보고된 인구 통계에 의하면 도성 안의 인구는 103,328명이었으나 성저십리의 인구는 6,044명으로 전체의 5.5%에 불과하였다. 그럴만도 한 것이 세종 초기까지 사대문안도 다 개발되지 않아서 지금 장충동, 필동, 묵정동 일대가 숫제 개발되지 않은 숲이었다. 이는 계획도시 한성이 개발되는 과정에서 초기에는 육조거리와 종로, 보신각에서 남대문으로 이어지는 거리에만 사람들이 모여 살았기 때문이다. 이후 우리가 흔히 아는 북촌과 남촌 쪽이 개발되고, 배후지역인 성저십리의 인구도 증가했다. 그 와중에 [[연산군]] 재위 후기에는 [[격구]]와 [[사냥]]을 하겠답시고 성저십리의 가옥들을 죄다 철거하는 만행이 벌어지기도 했다. 조선후기 [[경신대기근]] 때에 다른 대도시에 구휼미를 보내다 한양 주변만 구휼미를 보내면서 다른 지방에서 한양으로 모여들어 사대문안 지역의 인구수용능력이 한계에 도달하여 현 서울역 주변지역과 현 창신동, 숭인동 일대부터 민락이 빽빽하게 들어서기 시작하며 성 밖 인구가 계속해서 늘어나 [[1789년]]([[정조]] 13년)에 성저십리 인구가 무려 76,782명으로 전체 인구의 40.6%까지 증가하였고, 대부분 경제활동에 종사하면서 서울 한양이 경제도시로 성장하는 배경이 되었다. [[1751년]]([[영조]] 27년)에는 동부 12개 방에서 연희방·천달방·덕성방·서운방·관덕방·흥성방 6개 방이 폐지되었고 남부 정심방, 예성방, 성신방이 폐지되고 둔지방(屯芝坊), 한강방(漢江坊), 두모방(豆毛坊)으로 다시 나누었다. 서부에서 신화방을 폐지하고 용산방(龍山坊)과 서강방(西江坊)을 신설하여 8개 방에서 9개 방이 되었고, 북부에는 명통방을 폐지하여 9개 방에서 8개 방이 되었다. 1788년(정조)에 북부에 연희방, 연은방, 상평방을 신설하여8개 방에서 12개 방이 되었다. [[조선]] 조정이 한양(서울)의 경계를 표시하기 위하여 한양 외곽에 금표(禁票)를 여러 개 설치하였다. 당시 [[한강]]변 [[망원동|망원정]] - 성산 - 모래내나루(沙川渡; 사천도) - [[서대문구#북가좌동|시위동(時威洞)]] - [[역촌동]] 돌곶이고개(石串峴; 석관현) - 관(영서역)터고개(關基峴; 관기현) - 아미산(峨嵋山) - [[북한산|삼각산(三角山) 돋누리고개(豬噬峴; 저서현) - 삼각산 돋봉(猪噬峯; 저서봉), 현 수리봉 - 삼각산 보현봉]] - 화계사 버덩이(菩洞; 보동) - [[강북구#번동|벌리(伐里)]] - 장위 - 송계--원--교(松溪橋) - 중량포(中浪浦) - 살곶이다리(箭串橋; 전관교) - [[한강변]] 두뭇개(豆毛浦; 두모포)[[https://gijuzzang.tistory.com/3784285|#1]][[https://db.history.go.kr/law/item/compareViewer.do?levelId=jlawa_305_0180_0250|#2]], 현재로 치면 [[한강]](동호대교 - [[용산구|용산]]포구 - [[마포구#마포동|마포]] - 망원정) - 성산동 - 가좌 - 역촌동 - 대조동 - [[불광동]] - [[북한산]] - 수유리 - [[우이천]] - 벌리 - 장위리 - 옥수동([[홍제천]] - [[불광천]] - [[북한산]] - [[우이천]] - [[중랑천]])을 잇는 선이다. 그런데 자료마다 성저십리의 경계가 조금씩 다르게 나타나서, 그 정확한 경계는 알기가 쉽지 않다. 다만 성저십리의 경계를 갈랐던 자연하천은 화계천, [[우이천]], [[중랑천]], [[한강]], [[홍제천]], [[불광천]]이다. 조선전기 범위와 조선후기 범위, 그리고 [[구한말]] 범위가 각각 다르다. 조선전기 기준으로 마포-부암동-[[정릉(서울 성북)|정릉]]-종암동-[[청량리]]-[[왕십리]]-[[한남동]]이 경계. 혹은 이들 지역을 성저오리(城底五里)라 칭하기도 하였다. 20세기 중반까지 남아있던 성저오리 경계표는 원래 서울 성북구 정릉동에 있었다가 본래 자리에는 푯말만 남기고 경계표는 경복궁으로 옮겨졌다.[* 도로건설로 인해 성저오리정계석표를 1970년에 [[경복궁]]으로 옮기고, 본래 위치에는 본 비석이 있었던 자리임을 밝히는 푯말만 남겼다고 한다. 하지만 어처구니 없게도 위치를 알리던 푯말도 어영부영 없어져 버려서 더 이상 성저오리정계석표가 정확히 원래 어디 있던 것인지 알 수가 없는 상태다. 성저오리정계석표 실물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의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참조: [[https://www.museum.go.kr/site/main/relic/search/view?relicId=35835128|국립중앙박물관 - 성저오리정계석표]]] 이 성저오리는 현재 서울 도심인접생활권에 해당하며, 지역 범위로는 [[내부순환로]] 안쪽 영역에 가깝다. '''아래 단락부터 조선초기나 구한말이 아닌, 조선후기를 기준으로 작성한다.''' 동부 경계는 우이천과 중랑천이라는 확실한 자연경계로 나뉘어져 있어서 자료마다 별 차이가 없지만 서부 경계는 자료마다 제각기 다르다. 보통은 홍제천과 서대문-불광동 사이에 있는 작은 산맥(?)으로 보기는 하지만, 심지어 [[1949년]] 당시 서울시 서부 경계 혹은 1911년 당시 경성부 서부 경계를 성저십리 서부 경계로 보기도 한다. 이 경우 수색동과 상암동도 성저십리 추정지역 안에 들어가게 된다고... 네이버 지명사전에 수록된 동(洞) 역사 내용은 이 기준을 따른 듯 하다. 그런데 1911년 당시 경성부 경계는 일제에 의해 근대적인 방법으로 정밀하게 측량된 것이라서 오히려 이쪽이 정확할지도 모른다. 조선후기에 [[김정호]]가 발행한 <청구요람>에 따르면 한성부 서부 경계가 진관동 편입 이전의 서울시 서부 경계와 대체로 일치한 것으로 보인다.[[http://blog.naver.com/hiomc/20185439073|#]] 최완기 저 <한양>(교학사, 1997)에 따르면 [[영조]] 때 주민들의 요구로 성저십리 서부 경계가 서대문구에 있는 산맥(무악재/길마재?)에서 홍제천으로 확장되었다고 한다. 이 시기에 연은방, 연희방, 상평방이 신설되었다고 한다. 그 이전의 성저십리 서부 경계는 반송방까지였던 셈. ~~왜 이리 자료마다 제각각인지~~ 1910년(1914년x) 당시 경성부 지도를 참조하면 구한말 한성부 경계의 보다 정확한 윤곽을 확인할 수 있겠지만 구한말 갑오개혁 이후 지금의 중곡동 등 일부 지역이 추가로 한성부에 편입되는 등 변동 사항이 있기 때문에 이를 그대로 조선후기의 경계로 추정할 수만은 없는 측면은 있다. 성저십리는 2010년대 초반만 해도 대중에게 인지도가 거의 없었으나 나무위키나 서울역사박물관 홍보물 등의 영향으로 지금은 약간 인지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19년에는 서울역사편찬원에서 조선시대 성저십리 연구를 집대성한 단행본을 발간했다. [[https://history.seoul.go.kr/m/contents/?u=435AA831-AC4D-52F5-1193-AE66C28BD77D|여기에서 무료로 열람하기]] 해당 단행본에 따르면, 18세기 중반 이전에는 성저십리는 행정상 애매한 부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저십리 주민들은 한성부의 통제를 받으면서도 조세는 한성부 편입 이전 원 소속 군현(양주목, 고양군)에 납부했던 것. 흥미롭게도 흑석동은 한때 애매하게 성저십리에 포함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애매한 모습은 18세기 중반 이후로 성저십리가 한성부 5부 체계에 완전 편입되면서 정리되었다. 이 과정에서 마을 이름에 계가 붙었다.(예: 안암동계, 여의도계) 조선후기부터 일제강점기에도 이러한 무허가 민락이 증가하여 주거환경이 악화되자 1930년대부터 성저십리 일부지역에서 오늘의 [[뉴타운]]과 비슷한 형태 계획적 도시개발이 진행되었다. 대표적인 곳이 현재 삼선교(동소문동)-돈암동(동선동)-보문동 지역과 이대 후문 일대 및 영등포역 인근(이곳은 공업지역으로 개발). 총 10여개가 넘는 지역이 개발예정이였으나 태평양전쟁으로 인한 물자부족으로 위에서 언급한 돈암,대현,영등포지구만 완료되고 타 지구는 개발 도중 개발중단, 혹은 아예 첫 삽도 뜨지 못했다. 19세기에 [[수색동]] 일대가, [[23부제]] 행정구역 개편과 동시에 양주군 고양주면 일부가 한성부에 편입되었다 (지금 광진구 중곡동 등). [[1914년]] 일제가 [[부군면 통폐합|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용산 일부([[서울역]] 인근 포함)와 현 창신동, 숭인동 일대를 제외한 성저십리 전 지역은 '''[[경기도]] [[고양시|고양]]군'''에 모조리 편입되었지만, [[1936년]]과 [[1949년]]에 차례로 서울(경성부)에 다시 흡수되었다. 사람들은 보통 조선시대 한양이라 하면, 대개 '''사대문안'''으로 국한하여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분명한 것은 인근 외곽지역이었던 성저십리 지역도 분명히 한양(한성부)의 일부였다는 사실이다. [[1994년]] 한양600주년 행사로 정부가 서울토박이를 물색하면서 내세운 지역적 조건에는 한양 사대문 안 뿐만 아니라 성저십리 지역도 포함되었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3122500289113001&editNo=5&printCount=1&publishDate=1993-12-25&officeId=00028&pageNo=13&printNo=1770&publishType=00010|기사]]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