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성영재 (문단 편집) === [[쌍방울 레이더스]] 시절 === [[광주제일고등학교 야구부|광주일고]][* 당시 [[김응룡]] 감독은 [[동대문야구장]]에 4번이나 찾아와서 고민하다가 동기생 [[이종범]]을 1차 지명으로 낙점했으며 [[광주동성고등학교 야구부|지역 라이벌 고교]]의 잠수함 투수였던 [[박충식]]도 1차 지명 후보였다.][* 이종범은 [[청룡기 전국고교야구대회|청룡기]] 결승전 연장 11회말에서 [[군산상업고등학교 야구부|군산상고]]에게 끝내기 2루타를 작렬하며 5대4 역전승에 기여했다. 이종범 외 광주일고 동기로 [[정영규]]가 있다.]와 [[인하대학교|인하대]](1989학번)를 졸업하고 [[한국프로야구/1993년/신인드래프트|1993년]] [[쌍방울 레이더스]]의 2차 1순위 지명을 받아 계약금 1억 원을 받고 입단했다. 당시에는 삼성이 뽑은 [[박충식]]보다 유망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당시 해태가 1차 지명을 위해 [[이종범]]과 저울질했던 [[광주광역시|연고지]] 선수를 [[박충식]]으로 아는 사람이 많은데, 사실은 성영재였다.], 쌍방울 역사상 최초로 억대 계약금을 받은 신인이자 당시 해태의 1차지명을 받은 고교동기인 이종범보다 더 비싼 계약금을 받았다.[* 이종범은 7천만원밖에 받지 못했는데 이유가 해태 프런트에서 '광주는 서울보다 물가가 싸기 때문에 서울에서 1억원을 받는 것보다 광주에서 7천만원을 받는게 낫다'는 황당한 말을 해서였다.] 참고로, 해태는 1991년 신인 1차 지명에서 광주일고-[[인하대학교 야구부|인하대]] 출신 좌타 내야수 [[김기태(1969)|김기태]] 대신 [[진흥고등학교 야구부|진흥고]]-[[한양대학교 야구부|한양대]] 출신 우완 투수 [[오희주]]를 뽑았지만 기대에 훨씬 미달했고, 김기태는 신생 쌍방울에서의 프로 첫해부터 홈런 2위를 기록하며 맹활약했다. 이듬해인 1992년 해태는 광주일고를 막 졸업하는 [[박재홍(야구)|박재홍]]을 1차 지명했지만 해태의 지명을 거부하고 [[연세대학교 야구부|연세대]]에 입학했다. 결국 해태는 1993년 [[건국대학교 야구부|건국대]]를 졸업한 [[이종범]]을 영입하고서야 김기태, 박재홍을 놓친 아쉬움을 풀었다. 지금 와서 보면 성영재가 팀을 잘못 만났을 뿐, 성영재가 삼성으로 갔거나 아님 [[박충식]]([[광주동성고등학교 야구부|광주상고]]-[[경희대학교 야구부|경희대]])이 쌍방울로 갔다면 충분히 운명이 달라졌을 수 있다. 데뷔 첫 해 성적은 타선의 지원을 못 받거나 상황이 여러 모로 꼬이는 등으로 인해 평균자책점은 4.03으로 나쁘지 않았지만 지독히도 승운이 없어 1승 13패를 기록하였다. 동기생이자 동일한 옆구리 투수인 [[박충식]]이 [[1993년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보여 준 강인한 이미지에 밀렸을 뿐더러, 더군다나 하필이면 데뷔했던 1993년에는 [[양준혁]], [[이종범]], [[김경원(야구)|김경원]], [[박충식]], [[이대진]], [[이상훈(좌완투수)|이상훈]], [[구대성]], [[마해영]] 과 같은 향후 프로야구 10년을 좌지우지할 선수들이 대거 입단하여 비교적 관심도가 떨어지는 면도 있었다. 그러나 성영재는 입단 첫 해부터 [[쌍방울 레이더스|쌍방울]]의 붙박이 [[선발 투수|선발]]로서, 매년 120~150이닝을 먹어 주는 언더핸드 에이스 노릇을 했다. 커리어 하이를 찍었던 1996년에는 10승 5패 ERA 2.37을 기록하여 쌍방울 팀 내 유일 10승 투수이자 최다승 투수이기도 했다. 특히 [[현대 유니콘스]], [[한화 이글스]]를 상대로 강해서 [[김성근]]은 [[현대 유니콘스]]와의 [[1996년]] 플레이오프를 회상하면서 "1차전 선발이었던 영재가 손가락 부상만 당하지 않았어도 우리가 이겼을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결국 쌍방울은 2차전까지 연달아 승기를 잡았지만, 성영재의 공백을 실감한 채 남은 세 경기를 내줘 한국시리즈 진출 문턱에서 탈락해야 했다. [[김성근]] 체제에서 유일하게 붙박이 선발이었던 투수가 성영재였던 만큼 그의 위상은 확고했으나, 붙박이 선발인 만큼 [[김성근]] 체제 특유의 벌떼 야구의 특징상 선발승을 손해 본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렇게 팀의 에이스로 점차 자리잡고 있었던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은 '''병역 문제.''' 과거 현역 판정을 받았던 그는 [[추간판 탈출증|허리디스크]] 수술, [[혼전임신|속도위반]][* 그 당시만 해도 결혼한 뒤 아이가 2명 이상 있는 입영 대상자는 면제 판정을 받았다.] 등 합법적인 선에서의 병역 면제를 시도했지만 실패하여 현역 입대하게 되었고, [[의병 제대]]를 위해 국군병원 군의관에게 3,500만 원의 언더머니를 제공한 뒤 목표를 이룬다. 그러나 훈련량 부족과 누적된 어깨 피로로 인해 성적이 해마다 떨어졌고, 설상가상으로 고향 팀 [[해태 타이거즈]]에 [[이호준]]을 상대로 [[트레이드]]된 후 2000년 겨울에 위의 병역비리 혐의가 적발되어 검찰에 구속 기소되었다가 이듬해 봄 [[집행유예]]를 받고 석방되기까지 동계훈련을 완전히 공치게 된다.[[https://www.google.com/amp/s/mnews.joins.com/amparticle/4004496|프로야구 성영재씨 병역비리 집유선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