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성서비평학 (문단 편집) == 성서비평의 등장과 발전 == 근대의 성서비평은 17-18세기 유럽의 계몽주의 운동과 함께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다. 특히 독일의 철학자 [[칸트]]가 인간 이성의 한계를 인정하고 초월적인 것을 인간 인식의 범위의 바깥에 놓자, 이러한 철학 사조의 영향을 받은 신학자들은 인간 이성의 합리적인 법칙이라는 범위 안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이해하고자 하였다. 즉 성서 또한 더 이상 불가침의 거룩한 문서가 아니라 해석과 평가의 대상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최초의 근대적 성서비평적 성서 연구는 프랑스 오라토리오회의 수사였던 시몽(R. Simon)에서부터 시작하였다. 그는 1678년에 출판한 <구약성서에 대한 역사적 비판>에서 최초로 [[모세오경]]이 한 사람의 저작이 아니라 여러 자료가 편집된 문서라고 논증하였다. 하지만 곧 이 저서는 금서 목록에 등록되었고, 시몽 자신 또한 수도회에서 제명되었다. 성서비평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비판적인 시선은 1943년 [[교황]] [[비오 12세]]가 교서를 발표하기까지 지속되었지만, 이후로는 성서비평 방법론을 가톨릭 주석가들의 의무로 규정할 만큼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시몽 이후 성서비평학은 여러 개신교 신학자들에 의해서 발전하였지만, 가장 큰 전환점을 마련한 학자는 독일의 성서학자 벨하우젠(Julius Wellhausen, 1844 - 1918)일 것이다. 그는 1878년에 출간한 저서 <이스라엘사 서설> 에서 소위 오경 문서설[* 벨하우젠 설 혹은 그라프(Henning Graf Reventlow, 1929 – 2010)의 이름을 딴 그라프-벨하우젠설이라고도 한다.]을 제시한다. 이 학설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모세 오경은 각기 다른 전승을 기록한 4가지 자료들(J, E, D, P 문서)을 가지고 여러 사람이 오랜 세월 동안 편집한 문서라는 것이다.[* J는 신의 이름을 야훼라고 부르는 구절들의 원래 자료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문서, E는 신을 야훼가 아닌 엘로힘으로 지칭하는 자료를 말한다. 한국어 성서에서는 신을 야훼 혹은 하느님, 주님으로 비교적 통일해서 지칭하지만, 히브리어 성서를 보면 창세기에서부터 신을 부르는 명칭이 구절마다 다르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고대 중동 세계에서 신의 이름이 가진 중요함을 고려해 본다면, 단일 저자가 두 가지 이름을 임의대로 사용했다는 반박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이후 성서비평학은 같은 시기 발전을 이룬 역사학, 고고학, 고대언어학과 같은 다양한 학문들의 영향을 받아 본문비평, 양식비평, 편집비평, 자료비평 등의 다양한 분야로 발전하였다. 21세기에 이르러서도 성서비평은 성서학의 한 분야로 자리잡고 있지만, 신학계에서 19세기만큼의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하고 있다. 사해문서 발견 사건 이후로 획기적인 발견 성과가 별로 없어 더 이상 새롭게 연구할 부분이 많이 남아있지 않은 것도 사실이지만,[* 사해 문서의 발견으로 편집비평과 편집사적 연구가 더욱 활발하다.] 학자들은 더 이상 성서비평 그 자체를 연구하거나 논의하기보다는 성서 연구의 기초적이고 포괄적인 방법론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신약 성서비평으로 이름난 학자로는 메츠거,[* [[NRSV]] 성경 편찬위원장이기도 했다] 알란드 등이 있다. 마티니 추기경도 신약 성서비평 연구에 많이 참여했다. 하지만 성서비평학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 교회의 특성상, 성서비평학에 대해 신학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은 신앙인들에게는 그저 신학자들의 고리타분한 학문 놀이로 여겨짐과 동시에 신앙을 파괴하는 행위로 매도당하기도 한다.[* 성서비평은 갓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한 신학도가 신학교에서 처음 만나는 장벽 중 하나이기도 하다. 교수가 소위 신실한 신앙을 가진 신학도들에게 성서비평 책을 던져주면 [[멘탈붕괴]]에 빠진다(...).] 이들 중에는 성서비평을 단순히 신앙을 파괴하는 행위라는 차원을 넘어서서 '하느님의 말씀을 고의적으로 변개하기 위한 사탄의 계략'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반면에 가톨릭에서는 성서비평학에 적극적인 풍모를 보인다. 예를 들어 [[예비신자 교리]]에서 강사(예: 수녀)가 창세기에 대한 강의를 하면서 구약 경전화 과정에서 사제들 사이에서 내려온 전승과 민중들 사이에서 내려온 전승이 각각 편집되었을 것이라는 내용을 가르치는 식. 심지어 교황 [[비오 12세]]는 바티칸의 최고위 간부가 아니면 볼 수조차 없는 [[성 베드로 대성당]] 지하에 묻힌 [[베드로]]의 유골의 연령 감식을 받기도 했다.[* 공사 중 발견된 코르넬리아 가도(Via Cornelia) 발굴에서 교황청 소속 학자들은 전승대로 그레고리오 경당 제대 뒤편에서 베드로의 무덤을 확인했다. 전승에서 내려오던 붉은 묘실 벽과 기둥, 그리고 무덤에 새겨진 ‘베드로가 여기 아래 있다’라는 글귀 등이 발견되어 비오 12세는 베드로의 무덤이 이곳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유골의 연령 감식이라는 모험을 강행했고 성공했다. 비록 이 유골이 베드로 본인의 것이라고 100% 확신할 수는 없지만, 연령 감식에 따르면 베드로의 순교 당시 시점과 거의 일치하여 가능성을 높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