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성모무염시태 (문단 편집) === 역사 === 무염시태 교리는 [[하느님의 어머니]] 이론과 평생동정 이론보다 늦게 대두되었지만 초기교회부터 중요하게 믿어져 왔다. 그리스도교 서방교부 중의 하나인 [[아우구스티누스]]도 이 교리에 대하여 말한적이 있을 정도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잉태와 자손생식으로 인하여 원죄가 이어진다고 하는 원죄 교리를 주장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원죄가 남성의 정액을 통해 유전된다고 주장했다.] 한편 중세의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러한 아우구스티누스 이론을 수용하여 마리아에게 원죄가 없다면, 그녀에게 예수의 구원이 필요 없는 것이 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타락한 인간의 자손인 마리아가 잉태되었을 때, 이미 원죄에 아래에 있게되는것이다. 물론, 마리아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이후에 동정녀가 된다고 보았다. 즉, 마리아의 육체에 그리스도의 영이 들어감 후에 성화(聖化)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죄에서 자유롭게 된다고 주장했다. 반면 '선행 구속론'을 주장한 [[둔스 스코투스]]가 있다. 스코투스는 성모무염시태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보편성과 대립되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창세 이전에 계획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업으로 인하여 성자(聖子)가 보내졌고, 그러한 절대적 중재자인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인하여 마리아는 미리 보호되었다고 하였다. 마리아가 원죄없이 태어남으로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이 부정되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는 인간에 상황에 하느님이 조건지어지는 것으로 모순이 된다고 여겼다. 더하여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개념을 차용하는데 '''가장 먼저 의도한 것이 가장 마지막에 실행(성취)된다''''는 이론이다. 즉, 완벽한 결과(그리스도)를 위해 완벽한 상태(무원죄)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리스도 중심주의가 스코투스의 선행 구속론의 골자이다. 중재자인 그리스도는 마리아가 [[원죄]]에 사로잡히지 않게 할 수 있었고, 그것을 하고자 하면, 할 수 있었다. 이렇게 마리아는 그리스도에 의하여 구원받은것이 아니라 원죄로 부터 보호(선행은총)를 입은 것이다. >'''성모께서는 원죄로부터 구원받을 필요가 있기 이전에 이미 원죄로부터 보호받았으며, 이는 한 사람이 죄를 짓고 나서 용서하는것보다 처음부터 죄에서 보호함으로써 사람을 구하는 것이 훨씬 더 나은 선이라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 >ㅡ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의 무염시태에 관한 질문들』(Quaestiones disputatae de immaculata conceptione beatae mariae virginis)에서 그리고 이 이론은 후일 [[교황 무류성]]으로 믿을교리로 선포되는 비오 9세의 『형용할 수 없는 신』(Ineffabilis deus)에 등장하는 무염시태 교리에 토대가 되었다. 스코투스는 당시 논쟁에서 세가지 가능성을 제시한다. >첫째, 하느님께서는 마리아를 결코 한 순간도 원죄의 지배하에 있지 않게 하실 수 있다. >둘째, 마리아를 어느 한순간만 원죄로부터 성화하실 수 있다. >셋째, 어느시기가 지난 다음 마리아를 원죄로부터 성화하실 수 있다. >---- 스코투스는 세가지 가설중 하느님께서는 가장 좋은 것을 주려고 하셨을거라고 말한다. 이러한 이론에서 신의 의지(voluntas)는 할 수 있다면, 그것을 원하기만 하면 행하는 것은 문제가 없는 것이다. 이에 의하면 신은 마리아가 원죄 없이 태어나게 하는 것이 가능하고 그렇게 행한 것이다. 이렇게 스코투스는 신의 의지를 내세워 마리아의 무염시태가 타당하다고 본 것이다. 즉, '''하느님께서는 하실수 있었고 원하셨으며 따라서 하셨다.''' 이러한 역사젹 배경에 따라, 가톨릭 교회사에서 무염시태의 옹호측은 주로 프란치스코회, 반대측은 도미니코회를 중심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도미니코회측에서도 무염시태를 받아들이는 등 교회의 일치된 의견이 나타나면서 마침내 1854년 12월 8일 회칙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2 ''Ineffabilis Deus''}}}에서 교의가 명시적으로 선포되었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이를 교황의 무류한 선포라고 본다. 이 선포와 훗날의 [[성모몽소승천]] 선포가 교황의 무류성과 엮여있기에 일각에서는 마치 교회에서 논쟁적인 사안을 교황이 억지로 밀어붙여서 통과시킨 것 처럼 오해하는 경우도 많으나, 이 선포들은 당시 가톨릭 교회의 일치된 의견이었다. 오히려 교황들이야말로 매우 신중하게 유보적인 입장이었고, 소위 말하는 '교회의 하부 구조'에서 아래로부터 치고 올라와서 교의로 선포된 것이 진실에 가깝다. 물론 이걸 모든 가톨릭 신자의 개개인의 예외 없는 만장일치라 하긴 어렵겠지만, 당시 정황을 보면 '일치된 의견'이라 하기엔 무리가 없었음은 분명하다. >1884년 10명의 프랑스 대주교들이 교황 그레고리오 16세에게 공동 서한을 보내 [[성모무염시태|성모의 원죄 없는 잉태]]를 선포해 주기를 요청한다. 또한 1843년에는 당시 교황청 국무원장인 람브루스키니(Luigi Lamburschini, 十 1854) 추기경이 성모의 원죄 없는 잉태에 유리한 성서 구절, 전승, 교황청 문헌들을 다수 수집하여 논문을 발간하였고, 이 책은 여러 나라 언어로 번역되어 상당한 호응을 불러일으켰다. '''전통적으로 성모의 원죄 없는 잉태를 반대하던 [[도미니코회|도미니코회원]]들도 성모 신심 미사의 감사송에 “원죄 없는”(immaculata)이란 표현을 삽입하려고 노력하였다.''' > >... 교황 비오 9세는 1852년 20명의 신학자로 구성된 특별위원회를 소집하여 이 문제를 검토하게 하였다. 여기서 교의 결정의 근거로 삼을 만한 기준들이 논의되었는데, '''당시 주교단의 일치된 의견과 교회의 전례 실천도 교의 결정을 위한 긍정적인 기준으로 제시되었다.''' 1854년 3월 22일 21명의 추기경으로 구성된 자문위원회가 소집되어 회칙의 제4차 초안이 검토되었다. 같은 해 12월 2일 교황은 회칙의 최종 편집을 추기경단에 넘겨서 긍정적인 답변을 얻어 낸다. 마침내 1854년 12월 8일 회칙 「형언할 수 없는 하느님」{{{-2 (Ineffabilis Deus)}}}이 발표되어 ‘성모의 원죄 없는 잉태’가 교의로 선포되기에 이른다. >---- >[[손희송 베네딕토]] 주교, [[https://www.pauline.or.kr/bookview?code=02&subcode=01&gcode=bo1001569&cname=|『주님의 어머니 신앙인의 어머니 – 어제와 오늘의 성모 마리아』]], 서울가톨릭대학출판부, 2014, pp.171-173 >'''많은 주교, 신부들, 그리고 신자들은 ‘[[성모몽소승천|성모 승천]]’을 교의로 선포할 것을 지속적으로 청원하였다. 교황 비오 10세(Pius X, 十 1914)는 계속되는 청원에 대해 교의 선포 이전에 진지하고도 많은 연구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 1863년부터 1920년까지 19개 국가에서 1,615,000명의 성직자들과 신자들이 교황청에 성모 승천의 교의 선포를 청원하였고, 1921년부터 1940년 사이에 청원자 숫자는 6,471,000명으로 늘어났다.''' 청원자들이 내세운 군거는 다양했다. 일부는 성모 승천이 성경에 증언된 분명한 계시 진리임을 내세웠고, 다른 이들은 성모 승천을 사도들로부터 현재의 교회까지 끊이지 않고 전해져 내려 온 구전 사도전승으로 간주하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모 승천이 현재 교회의 일치된 신앙이라는 점을 근거로 교의 결정을 요청하였다.''' > >... 20세기 초반부터 중반까지 교의 선포 청원이 줄을 이었다.''' 로마는 더 이상 유보적인 자세를 취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 교황 비오 12세는 성모 승천을 교의로 선포하기 위해 어느 교황들보다 적극적으로 행동한다. 우선 1869년부터 1940년까지 3018건의 청원을 분석하게 하고, 그 결과 96%가 성모 승천의 교의 선포를 염원한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또한 '''교황은 교황 비오 9세와 마찬가지로 이 문제에 대해 주교들, 신학자들, 신자들에게,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추기경단에게 의견을 묻고 광범위한 동의를 얻어 낸다.''' 마침내 교황은 1950년 11월 1일에 회칙 「지극히 자애로우신 하느님」{{{-2 (Munificentissimus Deus)}}}을 통해서 ‘성모 승천’을 믿을 교리로 선포한다. >---- >같은 책, pp.175-178 >'''1854년과 1950년에 선포한 것은[* 발췌자 주석: 1854년에 선포된 교의는 '마리아의 원죄 없으신 잉태', 1950년에 선포된 교의는 '성모 승천'이다.] 어떤 논쟁에 대한 대응으로 내려진 것이 아니라, 교황과 친교를 이루는 모든 신자의 신앙에 대한 일치된 의견을 반영한 것입니다.'''[* The definitions of 1854 and 1950 were not made in response to controversy, but gave voice to the consensus of faith among believers in communion with the Bishop of Rome.] >---- >성공회-로마 가톨릭 국제 위원회{{{-2 (Anglican-Roman Catholic International Commission)}}}, 〈그리스도 안에서 은총과 희망이신 마리아〉{{{-2 ([[https://www.anglicancommunion.org/media/105263/mary-grace-and-hope-in-christ_english.pdf|''Mary: Grace and Hope in Christ'']])}}}, 2005[* 번역 출처: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교회일치문헌》 제2권, 2009, pp.298-300.], 제62항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