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성리학 (문단 편집) == 배경 == [[송나라]] 시대에 성리학이 탄생한 주된 이유는 형식화, 획일화된 훈고학에 대한 반발과 '''[[불교]]'''의 영향력 증대라고 볼 수 있다. [[춘추전국시대]] 때의 [[유교]]는 [[형이상학]]적으로 그리 현란하지 않고 현실적인 학문체계였다. 이후 [[진(춘추전국시대)|진나라]] 때 발생한 [[분서갱유]]로 인해 소실된 유교 경전을 [[전한]]시기에 되살리는 과정 속에서 [[훈고학]]이 탄생하였으며, 이후 [[당나라]] 때 까지 훈고학이 유학의 주류가 된다. 그리고 이러한 훈고학은 [[당나라]] 때 공영달이 저술한 오경정의가 출판되어 관학화되자 결국 획일화, 형식화된 학문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나마 오경정의가 나오기 전까지는 금문학파-고문학파 간의 논쟁이라도 있었으나, 공영달의 오경정의가 출판되자 오경정의만이 옳다는 시각이 널리 퍼지면서 이러한 논쟁도 무의미하게 된다.] 결국 당나라 중기~말기 그리고 [[오대십국시대]]에 이르면[* 한국과 일본의 동양사학계에서는 이 시기를 당송변혁기라고 지칭한다.], 기존의 유학인 훈고학은 혼란한 [[안사의 난|시대]][[절도사|상황]] [[황소의 난|속]][[오대십국시대|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다.[* 오히려 이 시기에는 당나라 황실마저 도교를 사회 이데올로기로 내세웠다.][* 성리학 역시 명나라와 조선왕조 때에 이르러 관학화되었으며, 결국 명청교체기, 백련교도의 난 이후로 나타난 청나라 후기의 사회변화, 임진왜란 이후로 나타난 조선후기 사회변화 속에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되고, 이런 상황은 [[양명학]], [[실학]], [[공양학]] 같은 학문이 나타나는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전한]]말부터 인도에서 전래된 [[불교]]는 이전까지 중국 사상계에선 주목받지 않았던 여러 [[형이상학]]적 논점들을 깊이 다룸으로써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일대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더불어 [[도교]] 역시 [[후한]]말부터 재조명받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당나라]] 말기에 이르러 형식화, 획일화된 유학에 대한 문제의식, 당시 사회적으로 많은 폐단을 일으킨 불교와 도교에 대한 문제점을 인식한 여러 유학자들은 불교나 도교 등에서 여러 형이상학적 요소를 차용함으로써 유학을 재해석하고, 이를 통해 유학을 불교와 도교에 비해 우위를 갖는 학문으로 만들고자 하였으며, 유학의 형식화와 획일화를 극복하고자 했다. 이는 [[송나라]] 시기 [[주돈이]]ㆍ장재ㆍ소옹ㆍ정호ㆍ정이 등으로 대표되는 여러 유학자들이 구체화하였고 이를 [[주자(철학자)|주희]]가 집대성하여 이후 성리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다른 한편 당대 중국의 [[정치]] 상황 등 외적인 요소에 주목을 하는 시각도 있다. 이를테면 [[전한]] 이래 [[중국인]]들이 받아들인 북중국 중심주의가 [[금나라|금]]의 북중국 정복 때문에 깨지자, [[남송]]의 성리학자들은 이(理)와 기(氣)를 분리하여 정신적인 측면과 명분을 강조하는 '이'를 중심으로 하는 성리학을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위진남북조시대]]에 도교와 불교가 유행한 이유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5호의 침략과 이로 인한 화북지방 상실로 인해 한족 우위를 강조하는 화이사상이 깨지게 되자 현실도피 차원에서 문벌귀족들이 도교와 불교에 심취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국가 단위의 논리로 발전시킴으로써 '지정학적인 중심과 정신적인 구심점은 다를 수도 있다.'고 설명하는 [[프로파간다]] 전략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송나라의 [[관료제]]와 [[문치주의]]의 영향에 문화가 크게 발전한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성리학이 탄생하였다는 시각이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