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성리학 (문단 편집) == 의의 == 한편 불교의 폐단을 극복하고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려는 개혁적 열망은, 성리학을 도입하여 불교적 세계관을 몰아내는 지식인들의 거대 프로젝트로 결론이 내려지고 군부의 쿠데타와 협력하여 조선 왕조가 세워지게 되는 기초를 놓았다. 조선 초기의 성리학자들의 논의는 구 고려 왕조 시대의 종교적 생활 방식을 타파하는데 있었다. 성리학이 윤리적, 경제적 생활 이념으로 완전히 체화된 것은 퇴계와 율곡이 등장한 16세기 후반이었다. 중국에서는 일단 명 중기부터 [[양명학]]이 인기를 끌었다. 다만, 명 멸망 이후에는 일단 사상계에서 명나라 멸망은 양명학 때문[* 명 중기는 사상적으로 굉장히 자유로웠던 시기인데 이를 일종의 퇴폐로 규정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유럽의 가톨릭에 대한 인식과 조선의 불교에 대한 인식과 현대 한국의 유교에 대한 인식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건 보편적 현상이다.]이라는 보수적 경향, 그리고 청나라의 [[문자의 옥]] 크리 등으로 인해 유학 연구가 시망이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전하고 있다.] 하지만 성리학이 내내 주류였던 조선뿐만 아니라, 청나라에서나 에도 막부에서도 '''정부의 공식 이념 및 주류를 차지한 사상 체계는 성리학'''이었고, 그 위상은 축소된 바가 없었다. 일본 성리학은 에도 막부 시절 발달되었고, 한국에서 임진왜란 때 포로로 끌려간 [[강항]]이 큰 영향을 주었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에도 막부는 대놓고 양명학을 탄압했다. 결론적으로, 성리학은 송나라에서 창시되었으나 조선에서 재발견되고 발전되었다. 혹은 또 다른 학문으로 재탄생된다. 이이와 이황의 추종자들은 이이와 이황이 성리학을 집대성했다고 보는데,[* 이황의 대표작 '성학십도'는 성리학의 요체를 [[마인드 맵]] 열 장으로 쌈빡하게 정리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는 병풍으로 만들어 곁에 두고 공부에 쓰라고 임금(구체적으로는 [[선조(조선)|선조]])에게 바친 책이지만, 내용이 좋아 선비들도 애독했다.] 이건 순수하게 한국 유학의 관점에서 그렇다는 이야기고 우주론까지 나가는 개념은 원래 주희의 성리학에는 없던 개념이다. 이 때문에 해동 성리학이나 조선 성리학으로 별도로 분류되기도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