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성리학 (문단 편집) ==== 반론 ==== 충효(忠孝)를 이용해 백성을 국가 권력에 예속시키는 일도, 성리학에서 비로소 나타난게 아니라 한나라 때부터 나타나는 유서 깊은 이데올로기일 뿐이었다. 마치 성리학이 충효 사상을 가르치는 도덕 선생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지만 군주에 대한 일방적인 충성보다도 오히려 역성 혁명을 긍정하기까지 하는 것이 주희 시대의 신유학적 정치 관점이었다. 한 왕조 이후 천 년 이상 철저하게 이단으로 취급되던 [[맹자]]를 다시 주요 경전에 포함시킨 것도 주희의 업적이다. 권력자의 입장에서는 역성혁명을 긍정하는 '맹자'의 사상은 매우 껄끄러울 수 밖에 없는데, 걸핏하면 정치를 제대로 못하고 인성이 글러먹은 왕은 물러나야 한다는 이야기가 튀어 나오기 때문이다. 당장 군군신신부부자자부터가 그런 이야기다. 위에서는 "군주는 영원한 군주"라는 뜻으로 신분제를 공고히하는 사상이라고 주장했지만, 실제로는 '''아니다'''. "임금이 임금답고 신하가 신하다우며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세상이 평안하다"라는 뜻으로, 바꿔 말하면 '''"임금이 임금답지 못하면 갈아치워라"'''라는 뜻이다. 송나라 때는 군주의 전제 정치가 약화된 시기였으며 왕안석의 신법을 비롯한 여러 개혁안들이 나타날 수 있는 시민 계층이 형성된 시기였던 것이 이같은 진보적 관점을 태동시켰다고 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몽골의 칩입과 반달리즘을 통해 성리학적 질서는 중국에서 완전히 파괴되었고, 이후 유교가 다시 자리 잡는 것은 명나라 이후이다. 물론 남송 대의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내용이 아니라 실천과 의지를 중요시하는 자기 개발서 비슷한 관점이 명대의 주류가 되었지만... 또한 성리학이 신분제도 강화를 옹호하고 지배층의 수탈을 정당화한다는 오해도 있는데 이는 왜란과 호란 후에 생긴 사회혼란으로 부터 자신들의 기득권을 공고히 하기 위해 성리학을 변질적으로 해석하여 생긴 부작용이지 성리학이 피지배층에 대한 수탈과 지배층의 횡포를 정당화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는 당시 성리학을 교조적으로 받아들이고 성리학을 악용한 지배층 잘못이 크다. 이는 전근대 사회의 한계라고도 볼 수는 있다. 애초에 당시에는 신분제와 차별이 당연시되던 시대였으니. 그리고 처음에는 의도는 좋았을지언정 후에 권력자의 입맛에 따라 오용되거나 변질되는 경우도 살펴봐야 한다. 당장 불교나 기독교 등도 평등을 주장했지만 이후 권력자들이 자신들 통치와 지배 이데올로기 정당화로 써먹은 걸 떠올려보자. 이러한 현상은 비단 조선만이 아니라 전세계에서 목격될 수 있는 현상이라 성리학만의 문제라고 할 수는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