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성경 (문단 편집) === 구약 정립의 역사 === >그라츠{{{-2 (H. Graetz, 1871)}}} 이후의 지배적인 이론에 따르면, 구약 경전의 세 부분은 - 이 부분을 이루는 책들이 오래된 것이라는 속단을 배제한 채 - 점진적으로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토라는 페르시아 시대 말기 이전, 늦어도 400년 330년 사이에 집대성되었으며, {{{-2 (전기 예언서와 후기 예언서가 잇따라 배열된)}}} 지금 형태대로의 느비임은 기원전 200년경{{{-2 (Steck, 1991 참조)}}},[* 발췌자 주석: Odil Hannes Steck, 《Der Abschluss der Prophetie im Alten Testament: Ein Versuch zur Frage der Vorgeschichte des Kanons》 (BthSt 17), Neukirchen-Vluyn, 1991.] 다시 말해서 팔레스티나에서의 프톨레마이오스 시대 말기에 출간되었다. 한편 크투빔은 훨씬 불규칙적이며 보다 개방적인 하나의 총서를 이루고 있었다. 이 총서는 기원후 1세기 말 '야브네{{{-2 (Yabne)}}}[* 발췌자 주석: 얌니아] 종교회의'에 라삐 유다교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비로소 마무리되었을 것으로 본다. 기원후 70년 로마제국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난 다음 크투빔 수집이 마감되었으며, 그 결과 성경 전체가 완성을 보게 된다. 이로써 유다교의 위경적인 종교문학 양산에 종지부가 찍히고, 이단적이라 평가된 작품들, 특히 묵시적 또는 그리스도교적인 작품들이 유다교 경전에 삽입되는 일이 차단된다. 야브네의 라삐들은 팔레스티나와 디아스포라의 유다교 공동체에 확고하면서도 공인된 '기록들'을 제공함으로써 유다교가 새로운 국가적 재앙 속에서도 살아남을 가능성을 부여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로의 히브리어 성경이 탄생한 배경이라고 말할 수 있다. >---- >-드 쀠리{{{-2 Albert de Pury}}}, "구약성경의 경전", Th. 뢰머{{{-2 Thomas Römer}}} 외 공저, 《구약성경 입문》{{{-2 Introduction à l'Ancien Testament}}} 제1권 ([[수원가톨릭대학교]]출판부 2019), 24-25쪽 유대교는 타낙(히브리 성경)을 율법서(토라, 기독교에서는 모세오경이라 부름), 예언서, 성문서(시편 등)로 분류한다. 이 중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이 율법서이며, 유대교의 구약관은 율법서를 중심으로 한 동심원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본래 율법서에 적혀있는 내용들은 오늘날과 같은 형태가 아니었으며, 부분적인 기록이나 구전 등으로 흩어져 내려오던 것이다. 그러나 기원전 597-587년의 바빌론 유배는 유대인의 정체성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했다. 이스라엘과 하느님 사이의 관계를 떠받치고 있는 모든 기둥들이 뿌리째 흔들린 것인데, 왕은 유배 당했고 하느님 현존의 상징인 성전은 파괴되었고, 하느님의 선물인 '약속의 땅'은 이방인에게 점령 당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도대체 누구이시고 그분은 어떤 방법으로 백성에게 개입하시는지를 말할 수 있는 다른 길을 모색해야 했다. 따라서 히브리인들은 기존 문헌들을 총합하여 '움직이는 조국'이라 할 수 있는 율법서를 써내게 된다. 특히 바빌론을 무너뜨리고 뒤를 이은 [[아케메네스 페르시아]]는 피지배 민족에게 종교적 자치권을 부여하였고, 히브리인들이 종교적인 전승들을 법전의 형태로 엮는 데 적대적이지도 않았다. 이 율법서는 고전적인 가설에 따르면 크게 네 가지 계통의 문헌이 합쳐져 작성된 것으로 여겨진다. ||※주의: 20세기 중반 이후 반론들이 상당히 많이 쌓인 상태이므로, 고전적인 견해는 이렇다는 정도로만 알아 두자. 이 4출전 모델은 1970년경까지는 천하를 통일할 기세로 학계를 호령했고 따라서 알아 둘 필요는 충분하지만, "1970년대부터 확고부동한 것처럼 보이던 이 가설이 흔들리기 시작"하였으며[* 정태현, 《성서 입문 하권》, 109쪽] "그 고전적 형태는 이제 동조자가 거의 없"다.[* Erick Zenger u.a, 이종한 옮김, 《구약성경 개론》 163쪽] 비록 고전적 모델이 전적으로 완전히 거부된 것은 아니고 D와 P의 존재는 그 후로도 연구자들의 폭넓은(그러나 개별적 강조점들은 상이한) 동의를 얻고 있지만, J와 E는 "극히 의문시되거나 단호히 부인되고 있다."[* Erick Zenger u.a, 이종한 옮김, 《구약성경 개론》 163쪽]|| 첫 번째는 J문헌(야훼계 문헌)이다. 이는 가장 오래된 문헌으로,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지칭하기 위해 기원 설화로부터 시작해서 오로지 야훼라는 고유 명사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불린다. J문헌은 인간 창조로부터(창세 2, 4ㄴ-25) 모세의 죽음(신명 34), 더 나아가 땅의 정복에(여호 19)[* 여호수아기는 율법서는 아니지만, 율법서의 후속편 쯤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백성의 역사를 이야기한다. J문헌은 왕정 초기, 좀 더 자세히는 솔로몬 시대(기원전 940년경)에 기록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J문헌의 핵심 본문은 창세기 12,1-3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소명 이야기로 보이며, J문헌 계통의 저자는 이스라엘에게, 이 본문에서 이루어진 약속들이 다윗과 그의 후계자가 주도한 왕정 제도의 설정과 함께 실제로 성취되었음을 상기시키려 노력한다. 또한 J문헌은 유다 지파를 다소 편애하는 감이 있는데, 여기서 저자가 유다 지파 출신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저자'라는 개념은 전승 수집자 겸 엮은이라 할 수 있다.] 2번째 문헌은 E문헌(엘로힘계 문헌)으로, 이 문헌은 하느님을 엘로힘이라 부르기에 이렇게 불린다. [[독일어]]로는 '야비스트'(Jahwist), [[영어]]로는 '야위스트(Yahwist)'나 '저호비스트(Jehovist)'라 불리는 편집자를 통해 야훼계 문헌과 일찌감치 결합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며, 그 결과 창세기 20-22장의 아브라함 이야기의 경우 엘로힘계 문헌은 단편으로만 남게 되었다. 탈출기부터는 E문헌을 찾아내는 데 어려움이 많으며 야훼계 문헌에서 엘로힘계 문헌을 떼어 내는 작업을 포기하는 경우도 많다. E문헌은 경외심과 도덕적 자세를 강조한다. 또한 E문헌은 북 왕국 예언자들과 가깝다는 점에서, 북 왕국에서 나온 문헌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이후 북 왕국이 아시리아에 멸망하면서 남 왕국에 유입되어 받아들여진 것을 보인다. 3번째 문헌은 D문헌(신명기계 문헌)이다. 이 문헌은 신명기의 최초 본문을 가리키며, 기원전 622년 요시야 임금의 개혁을, 특히 예루살렘 성전을 합법적인 유일한 성소로 격상시킨 중앙 집권 정책을 정당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D문헌은 계약과 선택을 주제로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를 강조한다. 또한 D문헌이 율법을 말하는 부분은, 또한 반복적이면서도 열정적인 독특한 문체로 율법을 설명한다.[* 쉽게 알 수 있는 예로, 지금 당장 신명기와 레위기에서 아무 율법이나 골라서 문체를 대조해보자. 전자는 열정적이며, 후자는 건조하며 간결하다.] 물론 D문헌은 신명기에만 쓰인 것은 아니고, 신명기 이외의 율법서에서도 문체의 연속성이 나타난다. 이를테면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조상들의 하느님' 등의 표현은 D문헌의 문체다. 4번째 문헌은 P문헌(사제계 문헌)으로, 창세기 1장의 천지 창조의 첫 번째 이야기로 시작해서 모세의 죽음 또는 약속의 땅 진입으로 마감된다. 이 문헌의 의도는 사제 제도, 할례, 파스카 축제 등 제의 제도의 정당화에 있다. P문헌은 '''가장 늦은 시기에 작성된 최후의 문헌이자 율법서의 기초 문헌'''으로, 다른 문헌들은 P문헌의 보충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시기적으로는 바빌론 유배 시대나 그 이후 히브리인들의 정치적 자립이 결여되어 있던 시기에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 P본문들은 표현이 간결하며, 수적 정확성과 족보에 관심을 가지며, 경신례와 전례에 관계 된 모든 것을 선호한다. 이러한 P문헌의 특징은, 바빌론 유배로 인한 공간적 분산을 전제로 하면서도, 페르시아 시대에 사제단과 재건된 성전을 중심으로 유대인 공동체를 조직하려는 시도를 드러낸다. 그렇기에 유대인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위해 제시되는 제의와 축일들을 자주 언급한다. 이와 같이 여러 본문이 합쳐져서, 페르시아 시기 때 우리가 아는 율법서의 최종형태(혹은 최종형태에 매우 근접한 모습)가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율법서는 에즈라가 이를 확정하고 기원전 398년 공포한 이래 공적인 결정의 척도가 되었다. 페르시아 정부는 이때부터 다섯 권으로 된 '모세의 책들'을 제국의 모든 유대인들을 다스리는 헌장으로 인정하였으며, 제국의 유대인들 또한 이 책들에 신앙과 실천 생활에 관한 문제를 조정하고 해결하는 규범적 가치를 부여했다. 율법서에 이어서 집대성 된 모음집은 '예언서'이다. 예언서는 전기 예언서와(여호수아기, 판관기, 사무엘기 상하권, 열왕기 상하권) 후기 예언서로(이사야서, 예레미야서, 에제키엘서, 12개의 소예언서) 나뉜다. 예언서는 토라에 버금가는 규범적 권위를 가지지는 못하지만, 율법을 실천적으로 주해하는 기초가 되었고 율법의 효력을 넓혀 나갔다. 마지막으로 확정된 것은 '성문서'이다. 이는 예루살렘 성전의 경신례와 회당 집회 때 사용되었고, '시편'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성문서의 책들은 권위나 수용 면에서 그 사정이 각기 달랐다. 각 권의 권위는 그 용도에 따라 큰 차이를 보였다. 이렇게 율법서, 예언서, 성문서가 합쳐진 것이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구약의 기초 형태다. 그러나 이 시기까지는 정경목록이 확정되지는 않았다. 이후 헬레니즘 시대가 도래하면서 유대교와 구약은 변화를 맞이한다. 한 히브리 공동체가 기원전 4세기 말엽에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 세워졌으며, 이때에 팔레스타인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강역에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페르시아가 그러했던 것처럼 종교적 특권을 히브리 공동체에 허용했으며, 이 특권으로 히브리인들은 국가의 보호 아래 고유한 율법으로 관리되는 '민족'을 이루면서 자신들의 경신례와 문화적 특수성을 보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집트의 유대인들은 점차 일상에서 그리스어를 쓰게 되면서, 율법 역시 그리스어로 곧 번역되었다. '아리스테아의 편지'라 불리는 문서에 의하면 이 번역은 프톨레마이오스 2세 시대에 왕명으로 알렉산드리아에서 이루어졌으며, 예루살렘의 대사제가 선정한 팔레스티나의 72명의 유대인 학자들이 일을 맡았다고 한다. 여기서 번역된 책을 '칠십인역'이라 불리게 된다. 또한 아리스테아의 편지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이 그리스어로 번역된 율법이 히브리어 율법과 동일한 가치를 지녔다고 인정한 것이 드러난다. 처음에 칠십인역은 율법만을 번역하였으나, 후에 율법에 이어 유대교의 신앙과 삶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되는 책들도 번역하게 되었다. 예언서와 시편이 먼저 번역되었고 기타 문서들이 작품의 영향력과 권위에 따라 그 뒤를 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마저도, 유대교 전체에서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경전의 범위를 자세히 알기는 어렵다. 단편적인 사실들은 그나마 남아있는데, 로마인들에게 맞섰던 유대인들의 최후 저항 요새였던 마싸다(기원전 73년 함락)에서 집회서 두루마리 하나가 발견되었기에 회당에서는 집회서가 쓰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분파별로는 여전히 복잡하다. 사두가이는 오직 율법서만을 인정했으며, 오늘날의 용어를 쓰자면 '가장 좁은 정경 목록'을 사용했다. 한편 쿰란의 에세네 공동체는 토빗기와 집회서는 물론 바룩서도 사용했으며, 에녹서나 희년서와 같은 몇몇 외경들과, 공동체 생활을 규제했던 공적인 문서(공동체 규칙서, 성전(聖戰) 규칙서, 성가책, 새 예루살렘서 등)에도 똑같은 권위를 인정하였다. 그리고 그래츠에 따르면 기원후 80년에서 100년 사이쯤에, 바리사이 유대인 학자들은 얌니아에 모여 경전 목록을 작성한다. 우선 이들은 논란이 되던 몇몇 책들의 권위를 확인했으며(코헬렛, 아가, 에스테르기), 그들이 보기에 최후의 예언서라 할 수 있는 하까이서와 즈카르야서와 말라키서 이후의 책들은 경전 목록에서 제외했다. 이와는 달리,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한 디아스포라의 유대인 사회는 70인 역을 보았기에 제2경전에 속하는 책들은 물론 주요 외경들까지 경전으로 받아들여 사용하였고, 이는 그곳에서 주로 활동하던 기독교 세력에게 계승되었다. 기독교는 앞서 설명하였듯이 1세기에는 유대교 회당에서 유대교의 한 분파로서 활동하였기에 당연히 유대교에서 쓰던 경전들을 계승했다. 다만 1세기 유대교는 하나의 통일되고 일관된 공동체가 아니었고 '정경 목록' 역시도 유대교 내부에서는 통일되지 않았었다.[* 물론 복음서들을 보면 바리사이가 사두가이보다 상대적으로는 긍정적으로 묘사되는 차이는 있지만, 바리사이가 정통이고 나머지는 짝퉁이라는 식의 관점을 가질 필요는 없다.] 다만 대략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른바 얌니아 회의에서 제외된 상당수의 책들을, 이미 작업이 끝난 그리스어 역본을 바탕으로 계속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2세기 초 랍비 아키바의 할라카와, 3세기 초반 [[오리게네스]]의 증언은 이를 잘 보여준다. 랍비 아키바는 집회서 등의 외경을 보는 무리(당시 나자렛파로 불리던 유대계 기독교인)들을 멸망당해 마땅한 이단으로 저주하며 유대교 안에서 축출을 시도하였다.[* 다만 얌니아 회의는 현재 부정하는 추세이고 저주기도문이 유대사회에 보편적으로 수용됐는지, 아님 후대의것인지는 좀더 발굴과 연구가 필요하다.] 오리게네스는 얌니아에서 확정된 유대교 성경을 수용하는 방향으로 기울어 있던 자들을 반박하며, 구약 성경의 그리스말 역본을 기초로 한 '기독교 성경'의 권위를 옹호하였다. 이렇게 기독교 경전은 서방 교회를 중심으로 점진적으로 확정되어 나갔다. 그러나 동방 교회는 경전을 확정할 규범 마련을 위해 어떠한 법적인 결정도 내려 본 적이 없으므로, 오늘날까지도 정경목록에 대해 통일되지 않은 입장을 보여 왔고, 정교회권 신학자들의 견해도 약간씩 다르다. 반면 서방 및 북아프리카 교회는 카르타고 공의회와 인노체시오 1세 교황의 편지가 입증하고 있듯이 4세기 말경부터는 제2경전을 포함한 공통 목록을 소유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