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성경 (문단 편집) === 토마스 아퀴나스의 성경 읽기 === [[토마스 아퀴나스]]가 성경을 읽는 방법이 특별히 설명할 가치가 있다. 토마스는 당대까지 통용되던 교부들의 성경 해석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동시에 현대 성서학의 기본 전제를 함축하고 있는 매우 중용적인 가르침을 남겼다. >제9절: 성경은 은유적·상징적 화법을 써야 할 것인가[* 병행문헌: 「명제론집」 제1권 서문 제5절: 제34구분 제3문제 제1절, 제2절. 「이교도논박대전」 제3권 제119장. 「보에티우스의 삼위일체론 주해」 제2문제 제4절 참고.] > >아홉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성경은 은유를 쓰지 말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 > 1.사실 앞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제1문제 제5절] 최하위 가르침의 고유한 것은, 모든 학문 중에 최상위를 차지하는 이 학문에는 적합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가지가지의 유사(類似)나 표상(表象, 표현)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은 모든 가르침 중에 최하위에 있는 시가(詩歌) 고유의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유사를 사용하는 것은 이 학문에는 적합하지 않다. > 1.그 밖에도 이 가르침의 임무는 진리를 명백하게 드러내는 데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진리를 드러내는 사람들에게는 포상도 약속되어 있다. 「집회서」 제24장 제31절에서는 "나를 빛내는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라."고 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유사를 통해서는 진리가 은폐된다. 물체적 사물들의 유사 밑에 신적인 것들을 전달하려는 것은 이 가르침에 적합하지 않다. > 1.그 밖에도 어떤 피조물들은 탁월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신적 유사에 접근한다. 따라서 만일 피조물들에서 어떤 것은 하느님한테로 (하느님과 비슷한 것으로) 취해진다면 이런 채택은 할 수 있는 한 탁월한 피조물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며 최하위의 피조물들에서 이루어질 것이 아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흔히 이런 사례가 발견된다. > >그런데 다음과 같은 반론이 있다. >「호세아서」 제12장 제10절에서는 "나는 그들에게 환상을 많게 하였으며 예언자로 하여금 내 유사를 사용케 하였다."라고 한다. 어떤 것을 유사에 의해 전하는 것은 은유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은유를 쓰는 것은 거룩한 가르침에 속한다. > >나는 이상의 것에 답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신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물체적 유사 밑에 전하는 것은 성경에 적합하다.''' 사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그 본성에 따라 배려한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감각적인 것을 통해 초감각적인 것, 가지적인 것에 이르는 것이 본성적이다. 그것은 우리의 모든 인식이 감각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에서 영적인 것이 물체적 사물들의 은유 밑에 우리에게 전달되게 되는 것은 적절한 것이다. 또 디오니시우스가 「천상위계론(天上位階論)」 제1장에서 "신적인 광명은 여러 거룩한 베일로 감싸이지 않고서는 달리 우리에게 비쳐질 수 없다."고 한 것도 바로 이 점을 말한 것이다. 영적인 것들이 물체적 사물들의 은유 밑에 제시되게 되는 것은,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제1장 제14절에서도 "나는 유식한 사람에게나 무식한 사람에게나 의무를 지고 있습니다."라고 한 바와 같이,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인 것으로 주어지는 성경에게 합당한 것이다. 그것은 초감각적인 것을 그 자체로서는 이해하기에 적합하지 못할 만큼 무식한 사람들도 어떻든 성경을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 > 1.그러므로 첫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시가(詩歌)는 그 표현을 위해 은유를 사용한다. 그것은 표현이 인간에게 본성적으로 즐겁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이 은유를 사용하는 것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필요하고 유익하기 때문이다. > 1.둘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신적 계시의 빛은 디오니시우스도 말하는 바와 같이, 그것을 가리고 있는 감각적 형상 때문에 소멸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진리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것은 계시를 받은 정신들로 하여금 유사성 안에 머물러 있지 않고 오히려 초감각적인 것들의 인식으로 그 정신들을 들어올리기 위해서다. 또한 계시를 받은 사람들을 통해 다른 사람들도 이런 세계에 대해 가르침을 받게 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성경의 한 곳에서 은유로 전해지는 것이 다른 데서는 더 명백히 설명되는 것이다. 또한 형상적(形像的) 숨김 자체는 탐구자들의 훈련을 위해서도, 불신자들의 조소에 대비하기 위해서도 유용하다. 여기에 대해 「[[마태오 복음서]]」 제7장 제6절에서는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마시오."라고 한다. > 1.셋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디오니시우스가 「천상위계론」 제2장에서 가르치는 바와 같이, 성경에서 신적인 것들을 고귀한 물체의 형상들로보다는 천한 물체의 형상들로 전하는 것은 더 적절한 것이다. 이것은 세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쨰로는 이렇게 함으로써 인간 정신이 더 쉽게 오류에서 해방되기 때문이다. 사실 이때 신적인 것들에 대해 말해지는 것은 고유한 의미로 말해지는 것이 아닌 것이 명백하다. 만일 고귀한 물체의 형상들로 신적인 것들이 표현된다면,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있을 수 있을 것이며, 특히 물체보다 고귀한 어떤 것을 전혀 생각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것들이 아주 의심스러울 것이다. ─둘째로는 이 방법이 이 세상에서 우리가 하느님에 대해 갖는 인식에 더 적합하기 때문이다. 사실 하느님에 대해서는 무엇인가보다는 무엇이 아닌가가 우리에게 더 명백하다. 따라서 그 유사가 하느님에게서 멀면 멀수록 더욱더 그런 유사는 하느님에 대해 우리가 말하고 생각하는 것을 넘어 하느님에 대한 더 참된 평가를 하게 된다. 셋째로는 이와 같은 방법으로써, 신적인 것이 부당한 사람들에게는 더욱더 감추어지는 것이다. >---- >제10절: 성경은 한 자구(字句) 안에 여러 의미를 갖는가[* 병행문헌: 「명제론집」 제1권 서문 제5절, 제4권 제21구분 제1문제 제2절 제1소문제 제3이론에 대한 해답. 「능력론」 제4문제 제1절. 「임의(자유)문제토론집」 제3권 제14문제 제1절, 제7권 제6문제 전체. 「갈라티아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 제4장, 제7강 참고.] > >열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성경은 한 자구 안에 여러 의미, 다시 말해 역사적 혹은 자의적(字義的) 의미, 우의적(寓意的) 의미, 전의적(轉義的) 내지는 도덕적, 신비적(천상적) 의미 등 여러 의미를 내포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 1.사실 한 성경 안에서의 여러 의미는 혼란과 기만을 조성하며 논증의 견고성도 없게 된다. 따라서 의미가 다양한 명제들에서는 논증이 진행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런 논증에 따른 어떤 오류들이 지적된다. 그런데 성경은 어떠한 오류도 없이 진리를 드러내는 데 있어 효과적이어야 한다. 따라서 성경에서는 한 자구 안에 여러 의미가 전해지면 안 된다. > 1.그 밖에도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앙의 유익론」에서 "구약이라고 불리는 책은 네 가지로 전달된다. 즉 역사적으로, 원인론적으로 소급하여, 유비적으로, 우의적으로 전달된다."고 한다. 그런데 이 넷은 앞서 말한 넷과는 다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성경의 같은 자구가 앞서 말한 네 가지 의미로 해설되는 것은 적합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 1.그 밖에도 앞서 말한 의미 외에도 그것들에 내포되지 않는 비유적 의미가 발견된다. > >그런데 다음과 같은 반론이 있다. >그레고리우스는 「도덕론」 제20권에서 "성경은 그 화법 자체로 모든 학문을 초월한다. 그것은 같은 언사(言辭)를 통해 행적을 말함과 동시에 비의(秘義)를 나타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 >나는 이상의 것에 답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성경의 작가는 하느님이다. 하느님은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 말만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사물 자체도 제공하는 능력을 갖는다. 그러므로 모든 학문에 있어서 말은 의미를 표현하는데, 이 학문은 말로 표현된 사물들이 또한 다른 어떤 것을 의미케 하는 고유성을 지닌다. 그러므로 말이 사물을 표현하는 첫째 표현이 첫째 의미에 속하는 것이다. 이런 첫째 의미는 역사적 내지는 자의적 의미다. 그런데 말을 통해 표현된 사물들이 다시 다른 사물들을 표현하는 의미 표현은 영적 의미라고 불린다. __그리고 이런 영적 의미는 자의적(字義的) 의미에 기초를 갖고 있으며 또 그것을 전제로 한다.__ >이 영적 의미는 세 가지 모양으로 구분된다. 사실 사도도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서간」 제7장 제19절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옛 법은 새 법의 상징이다." 그리고 디오니시우스가 「교회위계론」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새 법 자체는 '미래 영광의 상징'이다. 또한 새 법에 있어서는, 머리(그리스도)에서 행해진 것은 우리가 행해야 할 것들의 징표다. 그러므로 옛 법의 것들이 새 법의 것들을 의미한다는 데는 우의적 의미가 있으며, 그리스도에 있어서 혹은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들 안에 이루어진 것들이 우리가 행해야 할 것들의 상징이라는 데는 도덕적 의미가 있다. 그리고 영원한 영광 안에 있는 것들을 의미할 때는 천상적 의미가 있다. >그런데 작가가 의도하는 바는 자의적 의미이며, 또한 성경의 작가는 모든 것을 동시에 그 지성으로 파악하기 때문에 '''자의적 의미를 따라 성경의 한 자구 안에 여러 의미를 발견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론」 제12권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부적(不適)한 것이 아니다.''' > > 1.그러므로 첫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이와 같은 의미의 다수성은 다의성 혹은 (이와 비슷한) 다른 종류의 다수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하나의 말이 많은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그 의미들이 다수화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말을 통해 의미가 표현된 사물 자체들이 다른 사물들의 징표일 수 있으므로 다수화되는 것이다. 이렇게 성경 안에서는 어떠한 혼란도 야기되지 않는다. __그것은 모든 의미는 하나의 의미, 즉 자의적 의미에 기초를 갖기 때문이다.__ 다만 이 점에서만 논증이 이끌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도나투스파인 빈센티우스를 반박하는 서간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우의적 의미로 말해지는 바에서 논증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로 인해 성경에서 어떤 것이 잃어버려지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영적인 의미 안에 내포된 신앙에 필요한 것으로서, 성경의 다른 곳에서 자의적 의미로 명백하게 전해지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 1.둘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이미 말한 셋, 즉 역사, 소급적 원인, 유비 등은 자의적인 의미라는 하나에 속한다. 아우구스티누스 자신도 설명하는 바와 같이 역사는 어떤 것이 단적으로 서술될 때이고, 소급적 원인이란 말해지는 것의 원인이 지적되는 경우인데, 예컨대 「[[마태오 복음서]]」 제19장 제8절에서 모세가 왜 아내를 버릴 허락을 주었는지의 원인을 주께서 직접 지적하시는 경우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의 완고함 때문이라고 하신다. 그리고 유비는 성경의 한 곳의 진리가 다른 곳의 진리에 배치되지 않는 경우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네 (의미) 중 우의적인 것만이 세 영적 의미를 위해 제시된다. 예컨대 성 빅토르의 위고는 우의적 의미 안에 신비적(천상적) 의미도 포함시킨다. 그는 그의 「명제론집」 제3권에서 세가지 의미, 즉 역사적·우의적·전의적(비유적) 의미만을 제시한다. > 1.셋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여야 한다. 비유적 의미는 자의적 의미에 내포된다. 그것은 어떤 것은 말을 통해 고유하게 표현되고 또 어떤 것은 형상적(形像的)으로 표현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자의적 의미는 형상(形像) 자체가 아니고 형상화된 것이다. 예컨대 성경에서 하느님의 팔이라고 할 때 자의적 의미는 하느님이 이런 지체를 지녔다는 뜻이 아니고 오히려 지체를 통해 표현되는 것, 즉 작용의 능력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서 확실한 것은 성경의 자의적 의미에는 결코 거짓이 내포될 수 없다는 것이다. >----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2 ''Summa Theologiae''}}} 제1부 제1문 9-10절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 설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당대까지 통용되던 교부들의 성경해석법을 간단히 짚어야 한다. 교부들의 성경해석법은 기본적으로 약간의 바리에이션 차이만 있을 뿐 [[오리게네스]]가 틀을 잡은 것인데, 오리게네스는 성경의 의미를 다음 세 가지로 구분했다. ||ㄱ. 영적 의미 = 영성적 의미 ㄴ. 혼적 의미 = 도덕적 의미 ㄷ. 신체적 의미 = 자의적{{{-2 (字義的, 문자적))}}} 의미[* 주의를 주자면, 여기서 말하는 '문자적' 의미는 근본주의식 성경 해석법을 말하는 게 아니다. 성경의 텍스트 자체가 의도하는 문필적{{{-2 (문학적)}}} 의미를 말한다.]|| 오리게네스는 ㄷ보다 ㄴ에, ㄴ보다 ㄱ의 가치를 높이 보았으며, 성경 해석의 목표로 ㄱ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이 해석법이 신학에 엄청난 공헌을 한 것에는 그 어떤 이견의 여지도 없지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특히 구약성경에서 그리스도론적 의미를 읽어내는 데 매우 큰 공헌을 하였다.] 성경 저자가 의도한 의미보다는 해석자의 주관을 중시할 위험이 있었다.[* 오해를 막기 위해 말하자면, 정작 이 해석법의 창시자인 [[오리게네스]]는 통념과 달리 대부분의 해석이 문자적 해석이며, 구절의 문자적 의미가 불분명하다거나 혹은 도덕적, 영성적 의미가 분명한 경우에 매우 신중하게 도덕적이거나 영성적 의미를 탐색하였다. 즉 이 해석법의 문제점은 오리게네스 당사자보다는 후대인들의 오남용에 있다. 지금도 아마추어나 사이비 해석자들이 {{{-2 (오리게네스의 해석법을 악용하여)}}} 주관적인 독후감을 성경 해석법이라고 끄적이는 경우가 허다하다.] 토마스의 해석이 지니는 특징은, 이러한 구분법을 계승하되 문자적 의미가 성경 해석의 기초라는 데 초점을 찍음으로써 주관주의의 위험을 극복한 것이다. 토마스는 성경의 의미를 다음과 깉이 구분하였다. ||ㄱ. 자의적{{{-2 (字義的, literal, 문자적))}}} 의미 = 역사적{{{-2 (historical)}}} 의미 ㄴ. 영적{{{-2 (spiritual)}}} 의미 -우의적{{{-2 (allegorical)}}} 의미 -도덕적{{{-2 (moral)}}} 의미 = 전의적{{{-2 (轉義的, tropological)}}} 의미 -천상적{{{-2 (anagogical)}}} 의미|| 이러한 구분법은 근본적으로 오리게네스의 바리에이션이며 따라서 교부들의 구분을 계승한 것이지만, 토마스는 성경의 모든 의미가 문자적 의미에 기초한다고 보았다. 곧, 성경 텍스트 자체가 독자들에게 의도하는 1차적인 문필적 의미를 이해하는 게 최우선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필적 의미를 해석한 후에야, 그냥 문필적 의미에서 머무르던가, 혹은 그 문필적 의미에 기초하여 영적 의미로 나아가든가 하는 것이다. 따라서 토마스의 해석법은, 근본적으로는 교부들의 해석법을 계승한 매우 전통적인 해석법이면서도, 성경 해석자의 기초적인 작업은 텍스트 자체의 문필적 의미라는 것에 초점을 찍음으로써, 현대적인 성서주석학을 함축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