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성경 (문단 편집) ==== 주의: 구약의 폐기는 신약의 자기 이해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 아래 문헌에서도 강조되다시피, 그리스도인 독자가 구약을 신약에 의해 폐기되었거나 철 지난 문서로 보는 건 올바른 독법이 아니다.이러한 왜곡된 독법을 바로잡는 것은 '''유다교의 시선에서 뿐만 아니라, 신약의 자기 이해에도 부합한다.''' >그리스도인 독자가 구약의 내적 역동성의 종착점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인식할 때, 이것은 소급적인 인식이며 그 출발점은 본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도들의 설교를 통해 선포된 신약의 사건들에 있다. 그러므로 유다인들이 본문 안에서 선포된 내용을 보지 못한다고 말해서는 안 되고,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에 비추어, 그리고 성령 안에서 본문 안에 숨겨져 있던 '''잉여 의미{{{-2 (surplus de sens)}}}'''를 발견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한다 >---- >-교황청 성서위원회(위원장: [[베네딕토 16세|요제프 라칭거]]),[[http://m.catholicbook.kr/goods/goods_view.php?goodsNo=1000006971| 《그리스도교 성경 안의 유다 민족과 그 성서》]]{{{-2 ''Le peuple juif et ses Saintes Écritures dans la Bible chrétienne''}}}, 제2부 가.6.[* 다음 링크에서 각 언어 번역을 볼 수 있다: [[http://www.vatican.va/roman_curia/congregations/cfaith/pcb_doc_index.htm|#]] 원문은 프랑스어이다.] >여기서 관건은 결국 성경의 개개 텍스트들의, 그리고 그리스도교 성경의 경우에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두 부분의 고유한 가치와 의의를 인정해 주고, 그것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규범적 토론으로 이끄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해석학을 규범적 토론의 해석학이라 이름 붙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방법론상으로''' 또는 '''대화상으로''' 이 토론은 이를테면 같은 눈높이에서 이루어지거니와, 여기서는 그때그때 논의되는 하느님 인식들과 하느님 이해들이 신중히 비교되고 관련지어지고 분석되어야 한다. >...... 간단한 예를 통해 설명해 보자. >'''코헬렛'''이 죽음을 인생의 종지부로 주장한다고 해서, 신약성경의 부활 소식에 근거하여 그 책을 신학적으로 불완전한 것으로 비난하고 또 거기서 신약성경에 의해 지양되어야 '''마땅한''' 구약성경의 전형적 한계를 보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에게도 매우 유익한 코헬렛의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하며 더 나아가 신약성경의 부활신학에서 한 중요한 차원을 빼앗는 것인즉, 이 차원은 바로 코헬렛과의 대화에서 명료해진다. 코헬렛은 죽음이 인간 삶을 끝장내며 이것은 하느님도 취소하시지 않는다고 도발적이고 매정하게 강조하지만, 그렇다고 코헬렛에게 인간의 삶이 의미 없는 것이 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반대다. 죽음의 권세에 맞서 코헬렛은 즐거움을 촉구하거니와, 즐거움은 하느님의 선물이요{{{-2 (3,13)}}} 그 안에서 하느님 자신이 인간에게 당신의 말씀을 전달하신다.{{{-2 (5,19)}}}. 이렇게 즐거움은 인간이 자신의 필멸성에 대한 인식을 뛰어넘고, 또 자기 삶을 하느님의 현존 안의 삶으로 이해할 수 있는 체험이 된다. 코헬렛의 하느님은 현재의 하느님이니, 그분은 현재의 삶을 안배하시고 사람을 가상의 세계로의 혹은 아예 환상적인 미래로의 도피에서 지켜 주고자 하신다. 그런 도피를 코헬렛은 가로막는다. "네가 가야 하는 저승에는 일도 계산도 지식도 지혜도 없기 때문이다"{{{-2 (9,10)}}}. 코헬렛이 '죽음 '''후의''' 삶'이라는 관념을 거부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하느님 현존의 시간으로서 '죽음 '''전'''의 삶'에 대한 중시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의 관점에서 보아도 고유한 중요성을 지닌 언명인즉, 신약성경과 상충되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죽음 전의 삶'과 '''근본적''' 연장선상에 있는) '죽음 후의 삶'에 대한 믿음에 하찮지 않은 심층 차원을 선사한다. >---- >-에리히 쳉어{{{-2 (Erich Zenger)}}} u.a., 《구약성경 개론》{{{-2 ''Einleitung in das Alte Testament''}}}, 이종한 옮김, 33-34쪽.[* 굵은 글씨는 책에서 강조된 것이다.] >28. ... 신약 성경이 존재하기에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의 관계에 대한 질문, 예를 들어 신약 성경의 내용이 구약 성경의 내용을 대신하거나 무효화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제기된다. 2세기에 마르키온이 이러한 입장을 내세웠다. 그는 신약 성경이 약속의 책인 구약 성경을 낡아 버린 것으로 만들어, 해가 떠오르면 달빛이 더 이상 필요 없듯이 새로운 것의 광채 안에서 구약 성경이 사라지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__이러한 히브리 성경과 그리스도 성경의 뚜렷한 단절은 결코 그리스도 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이 되지 못하였다. 오히려 그리스도 교회는 144년에 마르키온을 쫓아내며 그가 주장한, 구약 성경의 모든 요소를 제거한 순수한 '''그리스도''' 성경이라는 개념을 배척하였다.__ 그리고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의 주인이신 유일하신 하느님에 대한 교회의 신앙을 증언하여 두 성경의 일치, 곧 '''계약들의 일치'''{{{-2 (concordia testamentorum)}}}를 견지하였다. > >29. 물론 이는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이 맺고 있는 관계의 일부일 뿐이다. 구약 성경의 공동 유산은 유다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유대의 중요한 바탕이 될 뿐만 아니라 두 신앙 공동체들의 관계에 근본적 긴장을 야기하였다.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신약 성경에 비추어 구약 성경을 읽는다는 사실에서 드러난다. 곧 그리스도인들은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다음과 같이 적절하게 표현한 확신을 지닌 것이다. “신약은 구약에 감추어져 있으며 구약은 신약 안에서 드러난다”{{{-2 (「구약 칠경 발췌 주해」[Quaestiones in Heptateuchum], 2,73)}}}. 이러한 의미에서 대 그레고리오 교황은 구약 성경은 신약 성경의 선포이며 신약 성경은 구약의 최고의 주해라고 정의하였다{{{-2 (「에제키엘서 강론」[Homiliae in Ezechielem], I, VI, 15; 제2차 바티칸 공의회, 하느님의 계시에 관한 교의 헌장 「하느님의 말씀」[Dei Verbum], 16항 참조)}}}. > >30. __이러한 그리스도론적 주해는 그리스도인들이 신약 성경을 구약 성경의 완성으로 여길 뿐만 아니라 신약 성경이 구약 성경을 대신하는 것으로 여긴다는 인상을 쉽게 줄 수 있다. 이러한 인상이 올바르지 않다는 것은,__ 서기 70년의 제2성전 파괴라는 재난 이후에 유다교도 성경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성전에 묶여 있던 사두가이들은 이 재난에서 살아남지 못하였기에,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고유한 방식을 이미 발전시켰던 바리사이들을 따르는 랍비들이 유다교 신앙의 중심이 되어 성전 없이 성경을 읽고 해석하게 된 것이다. > >31. 이에 따라 이 상황에 대한 반응이 두 가지로 나타났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성경을 읽는 새로운 두 방식, 곧 그리스도인들의 그리스도론적 주해와 역사적으로 발전하게 된 유다교의 랍비 방식의 주해가 나타난 것이다. 이 두 방식의 주해는 저마다 성경을 새롭게 해석하는 방법을 담고 있기에 그 관계를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새로운 중요한 문제가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 교회와 성전 파괴 이후의 랍비 중심의 유다교는 나란히 발전하였지만 서로 대립하고 서로에 대하여 알지 못하였기에 이 문제를 신약 성경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었다. 수세기에 걸친 이러한 상반된 입장을 넘어서서, 성경을 읽는 새로운 이 두 방식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어 “풍요로운 상호 보완성”을 이해하고 “하느님 말씀의 부요를 깊이 이해하도록 서로 돕도록{{{-2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 249항)}}} 하는 것이 유다교와 가톨릭이 나누는 대화의 과제가 되었다. 2001년 교황청 성서위원회에서 발표한 「그리스도교 성경 안의 유다 민족과 그 성서」{{{-2 (The Jewish People and Their Sacred Scriptures in the Christian Bible)}}}는 그리스도인들이 __“유다교의 성경 해석이 가능한 해석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고 또한 인정해야 하며 “그것은 제2성전 시대의 유다교 성서와 연속성을 지닌 해석으로서 병행적으로 발전한 그리스도교 해석과 유사한 해석”__이라고 말한다. 그러고 나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이끌어 낸다. “이 두 가지 해석 모두 각자의 신앙관과 연관되어 있는데, 해석은 그 신앙관의 결과이자 표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가지 해석을 다른 해석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2 (22항)}}}. >---- >-교황청 유다교위원회, 〈가톨릭과 유다교의 관계에 대한 신학적 문제에 대한 숙고〉[* 굵은 글씨는 원문에서 강조한 것.] [[https://cbck.or.kr/Documents/Curia/402619|#cbck]][[https://archive.is/q3hjv|#archive]] 구체적인 예시로 이사야서 7장 10-17절을 들어 말히자면, 이 예언은 1차적으로 당시 남왕국의 왕자 탄생을 예언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사야서는 1차적으로 동시대 유다인들이 들으라고 나온 예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남왕국의 왕자 탄생을 넘어, 더 미래의 어떤 신적인 사건을 예고한 것으로 보는 것은 '''신약의 시선에서 뿐만 아니라, 유다교의 자기 이해에도 부합한다.''' 왜냐하면 [[칠십인역]]에서도 이미 이 구절을 과거 남왕국의 왕자 탄생 예고를 넘어, 미래에 있을 '동정녀에 의한 메시아 탄생 예고'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반드시 주의해야 할 점은, 구약에서든 신약에서든 예언이나 예형이 먼저 있었던 사건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집트 탈출을 바빌론 탈출의 예형으로 보았다고 해서 예레미야와 에제키엘이 이집트 탈출의 의의를 부정한 게 아니며, 베드로 1서 3장 20-21절이 노아의 방주를 세례의 예형으로 해석했다고 해서 저자가 노아의 방주를 무슨 동화책 읽듯이 한 게 아니듯, '남왕국 왕자 탄생'과 '동정녀에 의한 메시아 탄생'은 서로를 배제하는 개념이 아니다. >따라서 이사 7,10-17의 단락에서도 일차적으로는 아하즈 시대를 배경으로 이 말씀이 그 당시 사람들에게 갖는 의미를 읽어내야 한다. 그다음에 비로소 마태오 복음서가 이 본문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고려할 수 있는 것이다. 이때 피해야 할 가장 큰 오류는, 이 예언을 아하즈를 대상으로 한 것이라고 해석한다면 같은 본문을 예수님께는 적용할 수 없게 된다는 생각이다. 이것은 잘못된 이해다. '''구약의 예언서들에서도 어떤 시대의 예언이 다른 시대에 새롭게 해석되는 것을 볼 수 있듯이, 살아있는 말씀인 성경의 본문은 어느 한 시대에 매이지 않고 계속적인 재해석 과정을 거치면서 처음에 지녔던 의미를 보존하면서도 그와 다른 의미를 더 지니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 >-안소근 수녀, 《거룩한 독서를 위한 구약성경 주해 29-1: 이사야서 1-39장》, 바오로딸, 2016, 137쪽 현대인의 시선에서 보자면 하나의 텍스트가 이렇게 재해석되는 과정이 기이하게 보일 수 있으나, 성경은 기본적으로 히브리 문화권에서 그들의 문체와 이야기 방식과 감수성을 바탕으로 쓰인 것이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엔 그리스도교 내부에서도 미드라쉬를 적극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이웃 종교를 공부하기 위해서만이 아니고, 신약이 구약을 보는 시선과 고대 그리스도고 교부들의 성경 주해에서 '히브리적 사고'가 막대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가령 [[바울로]]만 하더라도, 오늘날 현대인의 사고 과정으로 그의 서간을 읽으면 사고 과정이 매우 기이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으나, 히브리 문화의 예형론과 미드리쉬적 논법을 고려한다면, 바울로의 말하기 방식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미드라시적인 서술은 구약성서{{{-2 (집회 7:27-28, 1마카 7:16-17)}}}와 신약성서{{{-2 (갈라 4:21-31, 히브 3:7-4:11, 7:1-10)}}} 및 쿰란문학에서 나타난다. 요한 6:31-60과 지혜 11:2-19:22는 미드라시적인 설교를 보여 주는 좋은 예이다. >---- >-가톨릭대사전, '미드라시' 항목 >어떤 교부들은 아주 일찍부터 성경 해석에 대한 유다인들의 전승에 몰두하였다. 오리게네스, 에우세비우스, 히에로니무스는 무수한 해석에 유다 전승을 근거로 끌어 댄다. 에프렘과 아프라하트 같은 시리아 교부의 저서에서 라삐들의 성경 해석 전승과 병행하는 구절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 오리게네스와 히에로니무스는 팔레스티나에서 오랫동안 살면서 당대의 유다인들과 접촉한 것이 분명하고, 그 전승들이 유다인들에게서 왔다고 명확히 밝히기도 한다. ... 히에로니무스가 유다인들의 문헌을 많이 읽었다고 하는데 이는 퍽 확실한 것 같다. 그의 서한 36번에서 그는 유다인의 회당에서 적지 않은 책을 빌렸다고 했고, 카인의 죽음에 대한 유다인들의 전승를 인용하면서 "히브리인들의 문서 보관실에서" 재확인했다고 한다. >---- >-귄터 스템베르거{{{-2 (Günter Stemberger)}}} 씀. 이수민 번역. [[https://m.pauline.or.kr/?pId=FMGD0020&code=01&subcode=07&gcode=bo0021573&cname=book|《미드라쉬 입문 ―라삐들은 성경을 어떻게 다루었는가? 개론, 선택과 본문》]] 333-334쪽 그리고 교황청 성서위원회 문헌인 [[https://www.vatican.va/roman_curia/congregations/cfaith/pcb_documents/rc_con_cfaith_doc_20020212_popolo-ebraico_fr.html|《Le peuple juif et ses Saintes Écritures dans la Bible chrétienne》]]에서 '''잉여 의미{{{-2 (surplus de sens)}}}'''라는 과감한 단어를 선택한 것에서 알 수 있듯, 예형론적 사고에서는 '예형'[* 시간적으로 앞에 오는 것] 그 자체를 통해 '본형'[* 시간적으로 뒤에 오는 것이자, 예형이 가리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이집트 탈출만으로는 바빌론 탈출을 유추할 수 없듯[* 예레미야 등이 바빌론 탈출을 제2의 이집트 탈출로 예고했고, 바빌론의 멸망이라는 구체적인 사건이 경험되었기에 이런 유추가 성경 독자들에게 자명해진 것이다.], 구약의 사건 그 자체에서는 신약을 유추할 수 없다. 다시 이사야서의 예를 들자면, 남왕국 왕자 탄생 자체에서는 당연히 예수 탄생을 유추할 수 없다. 그러나 [[칠십인역]]이 이를 동정녀에 의한 메시아 탄생으로 읽었고, 훗날 예수 사건이 경험되었기에, 그리스도인 독자에게 '예수 탄생'이라는 의미가 자명해진 것이다. 곧, 바빌론을 탈출한 유다인들이 이집트 탈출 사건의 의의를 치워버려서는 안되듯이, 그리스도인이 구약의 의의를 치워버려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동일한 원리로, AD 1세기의 통일되지 않은 수많은 메시아관을 어리석다느니 무식하다느니 하면서 조롱하면 안된다. >1세기의 유다인들은 모두 메시아를 기다렸는가? 확실히 아니다. ___사정이 그런 만큼 신약성서의 독자는 당시의 모든 유다인들이 폭넓게 받아들인 통일된 메시아니즘을 이 시대에 투사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___ 사실 예수의 면모에 다양한 메시아적 동기를 환원적으로 적용시킨 사람들은 바로 베드로 내지 나아가 주님의 형제 야고보의 노선을 따르는 유다계 그리스도교에 속한 이들이었다. 쿰란을 비롯하여 1세기 유다교 안에서 상황은 모호하였다. 그러기에 유다인들은 모두 군사적{{{-2 (軍士的)}}} 메시아를 기다렸는데 예수는 사랑를 설파하고 평화를 증진하는 자들을 찬양함으로써 권위를 인정받았다는 식의 단순한 설명에 너무 조급하게 동조해서는 안 된다. >---- >-Charles Perrot 씀. 백운철 번역. [[https://bundobook.co.kr/goods/view?no=6090|《초대교회의 예수, 그리스도, 주님 ―주석학적 그리스도론》]] 231-232쪽 신약의 관점으로도, "예수는 메시아이다"라는 신앙고백은 구약성경 책 자체만으로 알 수 있는 게 아니며, '예수 사건'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구약 텍스트에 대한 견해가 달라지는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교 관점에서도 구약 텍스트의 1차적 의미는 보존됨이 당연하다. >신약성경 문서들이 이스라엘 성경에 터하여 쓰였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성경 독해의 해석학적 단초는 분명해진다. '''신약성경은 이스라엘 성경'''{{{-2 (또는 그냥 구약성경)}}}'''의 빛 안에서 읽혀야 한다.''' 자주 인용되는 고대 교회의 성서학자요 번역자인 [[히에로니무스]]의 말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다"를, '구약성경을 알고 또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교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살짝 바꿔 말할 수 있겠다. >---- >-에리히 쳉어{{{-2 (Erich Zenger)}}} u.a., 《구약성경 개론》{{{-2 ''Einleitung in das Alte Testament''}}}, 이종한 옮김, 23쪽.[* 굵은 글씨는 책에서 강조된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교와 유다교에서 성전{{{-2 (聖殿)}}}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이해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구약 시대의 유다교에서 성전은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비록 제의{{{-2 (祭儀)}}}를 겉치레로만 할 경우 비판 받기도 하며, 성전이 없던 시대도 구약이 다루고는 있으나, 성전이 구약에서 얼마나 강조되는지는 두 말하면 입 아플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예수를 종말론적 대사제로 고백하면서 예루살렘 성전 제의의 문자적 준수를 하지 않게 되었으며, 유다교 역시 [[https://cbck.or.kr/Documents/Curia/Read?doc=402619&doctype=1&gb=T&search=%EA%B0%80%ED%86%A8%EB%A6%AD%EA%B3%BC%20%EC%9C%A0%EB%8B%A4%EA%B5%90%EC%9D%98%20%EA%B4%80%EA%B3%84%EC%97%90%20%EB%8C%80%ED%95%9C%20%EC%8B%A0%ED%95%99%EC%A0%81%20%EB%AC%B8%EC%A0%9C%EC%97%90%20%EB%8C%80%ED%95%9C%20%EC%88%99%EA%B3%A0|〈가톨릭과 유다교의 관계에 대한 신학적 문제에 대한 숙고〉]] 30항에서 볼 수 있듯, 성전 파괴 이후에 '성전 없는 유다교'인 라삐식 유다교의 형태를 취하게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구약에서 성전을 가리키는 구체적인 구절들을, 21세기 그리스도교와 유다교가 '철 지난 구절'로 읽을 수는 없다. 이 구절들의 문자적 준수는 21세기에 불가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 시대에 이 구절을 적은 저자가 의도한 1차적인 문필적 의미를 고려할 때, 오늘날의 그리스도교와 유다교의 고유한 성전 이해를 더 풍요롭게 할 수 있는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