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성경 (문단 편집) === [[성서주석학]]을 통한 성경 읽기 === > 성경의 의미는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문자적 의미{{{-2 (literal sense)}}}다. 문자적 의미는 눈이 보이는 글자 그대로의 의미다. 대부분의 경우 문자적 의미만으로 충분할 수 있지만 많은 경우 이 의미만으로 성경의 깊은 가르침을 파악할 수 없다. 문자적 의미만을 고집하는 축자주의{{{-2 (literalism)}}}는 때로 근본주의 해석을 낳고 이 해석이 반인륜적 범죄를 부추길 수 있다. > 둘째는 문학적 의미{{{-2 (literary sense)}}}다. 문학적 의미는 성경 저자가 본문 안에 담아 전달하려는 메시지다. 이 의미를 밝혀내기 위해서는 역사비평의 제반 방법이 유용하다. 그러나 문학적 의미에만 매달리게 되면 성경 본문을 과거의 틀에 가둘 수 있다. 또한 본문 해석에 대한 수많은 가설과 이론으로 본문 자체를 해체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 셋째는 영적 의미{{{-2 (spiritual sense)}}}다. 영적 의미는 문자적 의미와 문학적 의미를 넘어서 성경을 읽는 오늘의 독자에게 성령께서 선물하시는 현실적 의미다. >---- >-바오로딸, 《거룩한 독서를 위한 성경 주해》 총서 머리말 우리는 일상에서 말을 할때든 진지한 문어체를 구사할때든, 문자적 의미와 비유, 수사적 의문 등을 자연스럽게 섞어가며 발언한다. 요컨대, 우리는 서로간에 '문학적 의미'로 의사소통을 한다. 그리고 성경 역시도 글이니만큼, 본문 자체는 '문학적 의미'에서 독자에게 말을 한다. 그렇기에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혹은 비유로만 파악하려는 것은 올바른 독법이라 할 수 없다. 다만 저자와 독자 사이에 놓인 시공간의 격차 때문에 본문의 문학적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고, 그렇기에 진지하고 열정적인 학습 태도가 필요한 것이다.[* 물론 성경은 최종학력이 국민학교인 아저씨도 즐기는 책이며, 반드시 주석서를 학습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중세 학설이든 요즘 학설이든 일단 주석서가 있으면 훨씬 낫다. 안타까운 점은, 성경이 [[테트리스|접근성이 높으면서 비로소 이해하기에 난이도도 높은]] 문헌이라, 인터넷에서 주관적인 독후감에 의한 잘못된 정보가 (그리스도인에 의해서이든 무신론자에 의해서이든) 범람한다는 점이다.] 가령 신명기에서 전쟁에 관한 율법을 보자. 신명기는 '''"히타이트족, 아모리족, 가나안족, 프리즈족, 히위족, 여부스족을 모조리 전멸시켜야 한다"'''(신명 20,17)고 말한다. 이는 마치 전쟁 중인 이스라엘인 독자에게 가나안인 전멸을 의도하는 것처럼 읽힌다. 하지만 그러한 독법은 단지 현대인의 감수성과 충돌하는 것을 넘어, 신명기 본문이 의도하는 1차적 의미와도 거리가 멀다. 여기 제시된 민족들은 신명기가 저술될때 이미 사라졌기에 이들 민족에 대해 유다인 독자가 느끼는 감정은 현대 한국인이 거란족에 대해 느끼는 감정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따라서 실생활에 문자 그대로 적용할 수도 없었다. 아래에서 게오르크 브라울리크가 지적하듯, "이 법은 가나안 원주민들을 꼬집어 열거하고(20,17), 훗날 다른 민족들에 대한 절멸 전술은 분명히 반대한다. 실제로 가나안인들의 근절을 겨냥했다면, 이 법은 대상 없는 요구를 한 셈이다." 오히려 신명기는 이미 쇠퇴한 과거의 민족들에 대해서는 절멸을 말하지만, 독자와 인접하여 사는 인근 민족들에 대해서는 절멸 언급을 피하는 곡예를 구사한다.[* 신명기는 에돔에 대해서는 "그들에게 싸움을 걸지 마라. 내가 세이르 산을 에사우에게 소유지로 주었으므로, 너희들에게는 그들의 땅을 한 치도 주지 않을 것"{{{-2 (신명 2,5)}}}이라 말하며, 비슷하게 모압에 대해서도 "모압을 괴롭히지도 말고 그들에게 싸움을 걸지도 마라. 내가 아르를 롯의 자손들에게 소유지로 주었으므로, 너희에게는 그 땅 어느 곳도 소유지로 주지 않을 것이다."{{{-2 (신명 2,9)}}}라고 한다. 현대 한국인이 애증을 느끼는 대상이 거란족이나 선비족이 아니라 일본인, 중국인임을 고려하면, 신명기가 얼마나 의도적이고 정교한 곡예를 구사하는지 조금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신명기가 서술하고 또 명령하는 가차없는 폭력에 의한 땅 정복은 하나의 관념적 구상물이다. 이것은 신앙이 요구하는 철저함의 상징, 하느님께서 당신의 일을 역사 안에서 완수하신다는 사실의 상징이다. __이민족 전멸 명령의 정형화된 적용은, 가나안 땅 점유 이후의 전쟁들뿐 아니라 훗날 유배로부터 이스라엘의 귀향과 관련해서도, 단호히 배제된다.__ > >열두 지파로 이루어진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을 완전히 정복하고 그곳 주민 전체를 전멸시켰다는 전쟁은, 그 가설을 신명기가 설계하고 그 가설의 성취를 여호수아기가 보도하지만, 역사상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그 땅 주민들의 씨를 말린 잔혹하고 거룩한 전쟁이라는 표상은, 오래된 전승 요소들{{{-2 [예컨대 전리품 획득을 포기하고 신에게 사람·가축·물적 재화를 완전(절멸) 봉헌하는 승전, 이른바 헤렘}}}{{{-4 ''herœm''}}}{{{-2 전쟁에 관한 보도들. 이미 멸망한, 부분적으로는 전설적인 종족들 목록. 토박이 종족들의 추방을 포함한 땅 약속들]}}}을 의도적으로 체계화하고 일반화한다. 이 은유{{{-2 Metaphrik}}}의 개별적 모티브들{{{-2 (예컨대 군사적인 테러 위협)}}}은 아무래도 신아시리아의 선전포고와 언어와 표상 세계에서 자극받은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이스라엘 초창기의 '사실{{{-2 史實}}}적' 재구성을 의도했던 것은 아니니, 이민족 절멸 계명은 문학적으로 처음부터 '''우화적·종교적'''인 의미에서 말해진 것이다. __과연 이 계명은 일러야 요시야 시대에서, 즉 이 계명이 적용되는 종족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시대에서 유래한다.__ 기원전 7세기 말엽인 그 당시 이스라엘은 이미 자기 땅의 큰 부분을 다시 잃었다. 적과 적의 소유물을 절멸시킨다는 헤렘이라는 개념은, 온 땅이 너희 소유이며, 너희가 하느님을 철저히 신뢰하기만 하면, 그분은 그것을 너희에게 넘겨주실 것이다, 또는 잃어버린 땅을 다시 마련해 주실 것임을 암시하고자 했다. 하느님은 당신을 믿고 순종하는 모든 사람을 위해, 당신께 맞서는 모든 자에게 압도적 승리를 거두신다. 여호수아기의 경우도 비슷한데, 이 책은 (신명기계 가나안 땅 정복 설화의) 이 발생사적 단계에서 신명기와 조화를 이룬다. 가나안 땅 점유가 처음에는 정탐자들의 보고를 듣고 난 이스라엘의 불신 때문에 좌절되었고{{{-2 (신명 1,32; 참조: 9.23-24)}}}, 여호수아 주도하에 성공했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하느님의 선물이었다{{{-2 (요약: 여호 21,43-45)}}}. 여기서 묘사하는 전투들의 철저성은, 여호수아기의 본디 의미에 따르더라도, 이스라엘 역사 초창기의 초토화 전술에 대한 사실{{{-2 史實}}}적 확언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느님 신뢰의 철저성에 관한 설화적 상징이다. 이 철저한 하느님 신앙{{{-2 (이에 근거해 이스라엘은 초창기에 자기 땅을, 즉 자신의 행운을 얻었다)}}}의 전쟁 은유는 또한 훗날 수백 년간의 국가 존립 이후 실패한 역사의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 >모세가 요르단 동쪽의 아모리족 임금들과의 헤렘 전쟁을 약설{{{-2 略說}}}하기 전에, 신명기 화자{{{-2 話者}}}의 중간 언급은 뒤이어질 야훼와 이스라엘의 정복 전쟁들과 이민족 절멸을 세계사적 '통례적'인 현상들로 상대화한다. 야훼께서 편을 드셨던{{{-2 (2,21.22)}}} 이스라엘 이웃 종족들{{{-2 (2,12.23)}}}도 이미 당시의 전{{{-2 前}}} 주민들을 결딴냈다. > >'''신명기 7장'''의 관점에 따르면, 헤렘은 이스라엘에 대한 야훼 애착의 한 귀결이며, 이스라엘이 하찮고 숫자 적고 힘없지만 야훼에게 선택된 것은, 이 세상에서 그분의 역사적 행동의 도구가 되기 위함이다. 약속의 땅의 강력한 일곱 민족을 절멸(완전) 봉헌하라는 명령의 배경에는, 전쟁을 역사 안에서의 신의 '심판'으로 여기는 근동의 통상적 견해가 있다. 여기서는 인종차별주의적이거나 민족주의적인 경향을 정당화하려는 게 아니며, 참으로 겨냥하는 바는 인간의 행동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끝끝내 신뢰해야 할 이 세상에서 하느님 행동의 절대주권임을 이 관념의 보편주의적·신학적 단초가 분명히 알려 준다. > >'''9,1-7'''에서 요르단 서쪽 땅의 정복이란, 은총과 공로에 관한 엄밀한 신학적 논증의 표현 수단일 따름이다. 이 논증은 이스라엘의 완고함을 염두에 두고, 가나안인들의 악함을 평준화한다. __그러므로 양쪽 모두 땅에 대한 권리 주장을 할 수 없다.__ 이스라엘이 자신의 끊임없는 거부·실패에도 불구하고 그 땅을 얻는다면, 그것은 오로지 야훼께서 우두머리 조상들에게 하셨던 맹세에 충실하신 덕분이다. 다시 말해, 순전한 은총의 선물이다. > >'''20,10-20'''의 전쟁에 관한 법은 __후대의 전쟁들과, 여호수아 지휘하의 유일회적 주민 절멸 정복 전쟁을 명백히 구별하고 있다{{{-2 (20,15-18)}}}. 이 법은 가나안 원주민들을 꼬집어 열거하고{{{-2 (20,17)}}}, 훗날 다른 민족들에 대한 절멸 진술은 분명히 반대한다. 실제로 가나안인들의 근절을 겨냥했다면, 이 법은 대상 없는 요구를 한 셈이다.__ > >'''29,21-27'''은 유배를 앞서 내다본다. 그때에는 다른 민족들에게 대항하는 일이 아예 없어질 것이다. 다른 민족들은 이 재앙의 원인을 묻다가, 자신들의 대답을 통해 이스라엘의 하느님 야훼께서 역사 안에서 당신의 권리를 관철하셨다고 이스라엘과 함께 신앙고백을 하게 될 것이다. 예전에 가나안의 일곱 민족을 그렇게 위험스러운 존재로 만들었던 상황이 반전된 것이다. 요컨대 그들은 이스라엘을 자기 하느님에게서 떨어져 나가도록 미혹할 터였다. > >이어지는 '''30,1-10'''의 귀향 예언은 유배된 자들을 이민족들 사이에서 데려옴과 관련하여, 이집트 탈출 때와는 달리, 하느님의 폭력 행위에 관해 전혀 말하지 않는다. __특히 약속의 땅의 새로운 소유에 관한 예언에, 이민족 절멸에 관한 언급은 전혀 없다.__ 이스라엘의 집합과 약속의 땅으로의 귀환은 이스라엘의 폭력 행위 없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는 원칙적으로 타당하다. >---- >-게오르크 브라울리크{{{-2 G. Braulik}}} OSB, "신명기", 에리히 쳉어{{{-2 Erich Zenger}}} u.a., 《구약성경 개론》{{{-2 Einleitung in das Alte Testament}}} (분도출판사 2012), 259-261쪽 또한 저자의 의도와는 별개로, 후대 독자들의 '수용 미학'[* 독어 Rezeptionsästhetik: 텍스트가 내용을 그릇처럼 자체 안에 담고 있지 않으며, 텍스트의 의미는 오히려 독서 행위를 통해 창출·성립된다는 데서 출발하는 문학 이론. 여기서 텍스트는 독자와 상호 작용을 해야 하는, 반쯤 비어 있는 독서 지침으로 파악된다. Rezeptionsästhetik에 의하면 문학 유형에 따라서 텍스트의 의미는 많거나(예: 기술적인 사용 설명서) 혹은 적게(예: 픽션) 확정되어 있다.] 관점도 배제해서는 안된다. 물론 성경 역시도 많은 문학 작품들이 그러하듯이 '저자가 의도한 의미'를 경원시할 수는 없지만, 많은 문학작품들이 그러하듯이 '어쩌면 저자가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새로운 의미'를 가지기도 한다. 가령 구약성경의 아가에서 이러한 예를 볼 수 있다. 아가는 유대교에서도 그리스도교에서도, 하느님과 '여성으로 표현된 백성'의 사랑을 노래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본문 그 자체로만 보자면 아가는 그냥 남녀간의 사랑노래이며, 신학적인 이야기는 본문 안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따라서 오늘날의 주석학자들은 아가의 문학적 의미를 주석하는데 주력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독자들의 우의적 감상이 무가치해지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구약 정경에 아가가 들어가 있다는 것이, 본문 그 자체에서는 보이지 않는 우의적 해석을 맥락적 의미에서 옹호해준다. >아가의 신학에 관한 물음에 관련하여 거듭 숙고되는 문제를 쿨{{{-2 C. Kuhl}}}은 이렇게 둘러 말한다: "아가에는 종교적 사상이라는 게 전혀 없다. 과연 책 전체에서 첫 줄부터 끝 줄까지 하느님도 종교도 ··· 나오지 않으며, 그래서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이 책이 정경이 될 수 있었고 더구나 축제 두루마리에 들어가게 되었는가라는 물음을 회피할 수 없다."{{{-2 (C. Kuhl, ''Das Hohelied und seine Deutung'', 1937, 141)}}}. 아가에 대한 우의적이고 제의적인 해석은 이른바 매우 세속적인 이 사랑 노래 모음집에서, 텍스트 자체는 제공하지 않는 신학적 의미를 끄집어내려는 시도라고 흔히 비판받는다. 하지만 문학 기호론적 관점에서만 보더라도, 우의적 해석을 아예 그릇된 것으로 평가할 수는 결코 없을 것이다. 한 텍스트의 의미는 그때그때의 맥락에 의해서도 규정된다. 하나의 문학적인 텍스트, 다시 말해 다소간 '열려 있는 텍스트'는 다양한 맥락화를 통해 다양한 의미를 획득한다.아가를 성경이라는 맥락 안에서 읽는 독자에게는 [하느님과 당신 백성 관계의 길고 긴 여정에 관해 이야기하는 성경에서, 이 관계는 사랑과 혼인이라는 개념과 은유를 통해서 표현되거니와{{{-2 (참조: 호세 2장; 예레 2장; 에제 16장; 23장)}}}] 우의적·예형론적 이해가 실로 수긍이 간다. 아가의 이른바 '원래 의미'를 되찾고자 하는 것은 반{{{-2 反}}}맥락화 또는 재맥락화의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 >-루트거 슈빈호르스트쇤베르거{{{-2 Ludger Schwienhorst-Schönberger}}}, "아가", 에리히 쳉어{{{-2 Erich Zenger}}} u.a., 《구약성경 개론》{{{-2 Einleitung in das Alte Testament}}} (분도출판사 2012), 680-681쪽 구체적인 성경 해석의 예시로 '노예제'를 생각해보자. "과연 성경은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는가?"라고 질문했을 때, 신구약 저자들이 동시대 독자들에게 말하고자 했던 1차적인 문필적 의도에서 말하자면, 구약이든 신약이든 인간 저자들은 분명하게 노예제를 전제하고 있다. 가령 바울로는 [[필레몬서]]에서 노예제를 하나의 사회적 현실로서 전제하고 있으며,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는다. 결국 성경의 인간 저자들이 동시대 독자들에게 의도했을 의미에서만 보자면, 성경은 노예제 폐지의 근거가 될 수 없다. 하지만 분명히 말하자면, '노예제는 하느님의 뜻에 반대된다'는 결론은 성경의 내부 논리로부터 합리적인 연역적 귀결로서 도출이 된다. 이런 견해는 고대, 중세, 근대를 거치며 그리스도인들에게 점점 확산되었고,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리스도인들의 건전한 '상식'이 되었다. 결국 "인간 저자들이 동시대 독자들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하였는가{{{-2 (과거형)}}}"에서는 성경이 노예제 반대에 근거를 주지 않지만, "성경이 지금 독자들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2 (현재형)}}}에서는 분명하게 노예제 반대의 근거가 된다. 후자의 독서법은 비그리스도인들 입장에서는 {{{-2 (아무리 그 의도의 정당함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책의 의미를 벗어난 것이지만, 성경을 '인간 저자와 성령의 공동 저작'으로 보는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정당한 것이다. 물론 이는 그리스도인들이 인간 저자의 문필적 의도를 무시해도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두 가지 의미 모두가 중요하다. '''바울로는 노예제를 전제하였었지만{{{-2 (과거형)}}}, 바울로 서간은 노예제를 반대하고 있다{{{-2 (현재형)}}}.''' 성경이 쓰여진 시대는 인쇄 기술이 미발달하였고, 일일이 필사를 하여 옮기던 시대였다. 때문에 간혹 앞뒤 일관성의 문제가 제기되기도 하나 많은 기독교 종파들은 대체적으로 하나의 성령 아래에서 씌어졌기에 내용상의 오류나 불일치는 크게 존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예를 들어 [[예수]]가 태어날 것을 [[가브리엘]] 천사가 예고하는 장면에서는,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나자렛의 요셉]]에게 예고하는 것으로 나오나 [[루카 복음서]]에서는 [[성모 마리아]]에게 예고하는 것으로 나온다. 그래서 기독교계에서는 복음서의 상이한 차이를 '모두 다 받아들여'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수태고지 장면은 처음에 [[성모 마리아]]에게 [[예수]]의 탄생을 예고한 후, [[성모 마리아]]의 정절을 의심하던 [[나자렛의 요셉]]에게 다시 한번 예고한 것이라는 식으로. 복음서마다 상이한 십자가상 7언(가상칠언)의 발언 차이도 복음서마다 묘사된 모든 말을 예수가 다 했다고 보는 게 신학계 정설이다. 성경은 만들어지고 전해지는 과정에서 편집되거나 첨가된 것이 많다. 그래서 후대에 첨가된(혹은 그렇다고 의심되는) 부분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현대 번역에서 해당 부분을 괄호 치고 주석으로 '오래된 사본에는 해당 내용이 없다'고 표시한다. 예를 들어 마가복음의 끝자락 또는 요한복음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 이야기가 있다. 필사자들의 의도적인 왜곡도 있을 수 있지만 [[기독교]]는 공인되기 이전에는 탄압받고 숨어서 믿는 종교였기에 기록물 역시 은밀한 방법으로만 전수될 수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서 확인·대조를 못 한 것이 한 원인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을 때에는 그 내용이 역사적 배경이 나오지만 모든 서술이 실제 사건에 100% 기반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 또한 상기되었듯, 성경에는 비슷한 내용인데 논점은 다른 경우도 있다. '누구누구가 멸절당했다'라는 내용과 '누구누구는 구원받았다'라는 기록(예리코 vs 니느웨)들이 그 예시. 다만 종교적인 관점에서는, 예를 들어 예리코는 악의 길을 걸어 멸절되는 원리를, 니느웨는 전도자의 자세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식으로 서로 다른 논점을 가지고 파악함으로써 모순을 피해갈 수 있는 경우도 있으니 그 점은 고려하자.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