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설악산 (문단 편집) === [[콩라인]] === 울산바위 전설에서 풍기는 뉘앙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어쩐지 [[금강산]]보다는 못한 이미지가 있는 산. 금강산이 명산인 건 [[삼국시대]]부터 알려져 있었다.[* [[신라]]가 [[제사]](소사小祀)를 지내는 산 중 설악산이 있다는 기록이 있어서 [[http://db.history.go.kr/id/sg_032r_0020_0200|#]] 이 때도 설악산이 완전 듣보잡까지는 아니었긴 하지만,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금강산은 풍악, 개골산 등 여러 이름으로 설악산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자주 등장한다.] 금강산도가 한국회화의 한 장르로 분류될 정도로 오랫동안 한민족의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 되었던 금강산과는 달리, 설악산이 예술적 창작의 대상이 된 것은 드물었다. [[단원 김홍도]]가「[[토왕성 폭포|토왕폭(土王瀑)]]」나 「계조굴(繼祖窟)」을 그리긴 했지만, 『[[김홍도필 금강사군첩|60폭 금강산화첩]]』에 포함된, 즉 금강산을 그린 그림에 [[끼워팔기|세트로 끼워넣은]] 것이다. 설악산의 다양한 아름다움은 김하종(金夏鐘, 1793 ~ ?)이 19세기 초반 『해산도첩(海山圖帖)[* 비단에 수묵담채, 29.7×43.3cm, 국립중앙박물관]』에 그린 「설악경천벽(雪嶽擎天壁)」, 「설악전경(雪嶽全景)」, 「설악쌍폭(雪嶽雙瀑)」 등은 김하종에 의해 처음 회화의 대상으로 선정된 것이었다.[[http://weekly.chosun.com/news/articleView.html?idxno=15059|#]] 조선 후기에 들어서 발굴된 설악산에 비해 금강산은 전근대시대부터 국제적 명성을 갖고 있었다. 중국 송나라 [[소동파]]는 고려를 지극히 싫어했지만 금강산을 흠모했다고 알려져 있다.[* [[https://www.hankyung.com/politics/article/2001110992858|'願生高麗國 一見金剛山'의 출처가 불분명하다는 기사]]로 인해 국내 토착기반의 민간어원이나 설화로서 가능성을 고려해 "알려져 있다"라는 표현으로 고침.] 구한말에도 금강산은 외국인에게 'Dianmond mountain'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 여사나 지크프리트 겐테(Siegfried genthe) 등 다양한 방문객들이 그 후기를 기행문에 남겼다. [[일제강점기]] 때는 설악산보다 금강산이 훨씬 유명한 관광지로서 일본에도 금강산 여행 가이드북이 팔리고 금강산 가는 관광철도가 지어질 정도였으니 [[남북분단]] 현대 이전까진 설악산의 인지도는 가까운 금강산보다 많이 딸리긴 했다. 그렇기에 한때는 설악산 자체가 전근대에는 금강산의 외권으로 폭넓게 포함된 지역으로 여겨졌다. 즉 '''설악산이라는 지명자체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은''' 적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휴전선이 설악과 금강을 가르며 금강산 방문이 현실적으로 금지되자 휴전선 이남 지역에서 설악산을 독자적인 산행의 대상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이후 설악산의 아름다움은 재발견이 많이 되어 1995년 설악산을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유산 잠정목록|세계자연유산 후보]]로 등재신청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