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선후회의 (문단 편집) == 이후 == 이 와중에 3월 12일 쑨원이 간암으로 사망했고 4월 21일 선후회의는 별다른 성과 없이 흐지부지하게 끝났지만 집정정부는 성공적인 종결이었다고 자화자찬했다. 4월 30일에는 베이징 촉성회가 봉쇄되었고 상하이 촉성회 등 다른 지역의 촉성회에 대해서도 정부의 탄압이 가해졌다. 국민당은 쑨원의 사망과 내분, 그리고 [[5.30 운동]]을 비롯한 대외 문제의 발생으로 더 이상 독자적 예비회의 소집에 전념하지 못하게 되었다. 돤치루이는 국회를 해산한 후 5월 17일 국민대표회의주비처를 설치하고 허세영을 다시 주비처장으로 임명하여 헌법을 제정하기 위한 선거를 준비했다. 돤치루이는 6월 30일 국민대표회의가 끝나는대로 10월 이전에 헌법을 제정하여 집정에서 하야하겠다고 발표했다. 7월 4일 각성 장관에게 위원 선거를 요구하는 전보가 보내졌으며 8월 3일 국헌기초위원회가 소집되었다. 하지만 선거령 동안 극히 일부 지역에서만 선거가 이루어졌고 주비처장 허세영도 재정권 문제 때문에 사직해버렸다. 12월 11일 국헌기초위원회는 헌법초안을 작성하여 돤치루이에게 제출했지만 국민대표대회가 끝내 소집되지 못하면서 초안에서 멈추었고 [[손봉전쟁]], [[반봉사건]], [[직봉풍전쟁]] 등 군벌들 간의 전쟁이 끊임없이 벌어지고 집정정부는 이를 전혀 막지 못하면서 결국 완전히 민심을 잃게 된다.[* 예컨대 베이징의 [[서산회의파]]들은 [[린썬]], 쩌우루를 중심으로 베이징의 각 대학교수들과 함께 돤치루이의 통치를 비판하며 관세자주 3원칙 발표, 서산회의 소집, 돤치루이 하야 요구 시위 등을 전개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