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선후회의 (문단 편집) == 배경 == 1924년 [[2차 직봉전쟁]]에서 [[장쭤린]]의 [[봉천군벌]], [[돤치루이]]의 [[안휘군벌]], 펑위샹의 국민군이 합세하여 [[북경정변]]을 통해 대총통 [[차오쿤]]을 축출하고 [[직예군벌]] 정권을 무너뜨리는데 성공했다. 펑위샹은 호경익, 손예 및 휘하 장령들과 연명으로 통전하여 정전과 전쟁의 뒷처리, 즉 선후 문제를 위해 전국의 인물들의 모여 대책을 강구하자고 제안했다. 펑위샹은 10월 26일, 돤치루이를 국민군 대원수로 추대하는 한편 [[중국 국민당]]의 영수인 [[쑨원]]에게 북상하여 국사를 공동으로 토론할 것을 제안했다. 쑨원은 이에 응하여 10월 27일 펑위샹과 돤치루이에게 곧 북상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후 11월 1일 펑위샹, 돤치루이, 장쭤린이 조속한 입경을 청하자 11월 10일, 대원수 직은 [[후한민]]에게, 북벌은 [[탄옌카이]]에게 맡긴 후 자신은 북상선언을 발표하여 불평등조약의 폐지와 국민회의 소집운동을 전개했다. 한편 베이징에서는 장쭤린과 돤치루이가 연합하여 11월 15일, 돤치루이를 임시집정으로 추대하였고 돤치루이는 이에 응하여 11월 24일 임시집정에 취임했다. 당시 중국에서는 강소독군 [[치셰위안]]을 비롯한 10개 성이 11월 2일 차오쿤의 하야 이후 수립된 황부의 대리내각을 승인하지 않겠다는 통전을 보내고 있었고 [[옌시산]] 등은 돤치루이 추대를 주장하였다. 직예군벌의 잔여세력마저 돤치루이 추대를 주장하자 과두정을 구상하던 펑위샹은 자신의 주장을 접고 돤치루이 추대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임시집정에 추대된 돤치루이는 [[회선 사건]] 이후 중화민국의 기존 법통이 무의미하다는 입장을 가지고 차오쿤 헌법, 임시약법, 국회를 소멸시켜 새로운 법통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비상국회의 국회의원들은 대의기구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이에 반대했다. 돤치루이의 임시집정 취임은 상당히 독재적인 정권의 출현과 더불어 국민당이 시국해결에 참여할 길이 사실상 막혀버린 것과 같았다. 돤치루이는 쑨원의 국민회의 소집 운동에 대응하기 위한 한가지 방책으로 선후회의 소집을 제안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