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선통제 (문단 편집) === 소련의 포로 === [[제2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에 접어들자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만주국에 군대를 진주시켰고, 그에 따라 만주국도 사실상 붕괴되었다. 푸이는 피난길에 오르면서 [[퉁화시]] 부근에서 간단한 회의를 소집해서 만주국을 해산했다.[* 흔히 이곳이 [[누르하치]]가 후금을 세운 곳이라는 말도 하는데, 그와는 다른 곳이다. 후금이 세워질 때 수도인 허투알라는 랴오닝성이고 퉁화시는 지린성으로 서로 다르다. 여기가 누르하치의 조상인 건주위 [[여진족]]의 땅에 속할 뿐. 또 재밌는 점은, 바로 퉁화시가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 부근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이것도 푸이가 결정한 것이 아니라 일본과 만주국의 잔존 내각에서 [[장제스]]와 협상하기 위해서 걸리적거리는 만주국 따위는 빨리 없애 버리기 위해 시급히 결정한 일로 푸이는 붓으로 죽죽 그은 임시 조서를 읽으면서 그야말로 얼렁뚱땅 퇴위해야 했다.[* 푸이가 마지막까지 꼭두각시였음을 말해주는 증거였다. 히로히토가 취급하는 조서는 한 자 한 자 개행까지 신경써가며 편집증적으로 격식을 따졌다. 자세한 것은 [[옥음방송]] 문서로. 일본 스스로도 푸이는 황제 취급조차도 안 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래도 만주국 주요 인사들이 [[한간]]으로 취급되어 재판을 받고 엄벌에 처해질 때 정작 푸이 본인은 무사했던 것은 이런 대우를 받은 덕분이었다는 점이 아이러니.] 장징후이 등이 소련군과 협상할 수 있으리라 여겨 신경으로 갔다가 줄줄이 체포되는 동안 푸이는 일본으로 피란가라는 통보를 받고 비행기에 탑승했다. 비행기가 좁아서 [[돈숙복귀비 이씨|복귀인]]조차도 쫓겨나는 지경이었고 자기는 어떻게 해야 하냐는 복귀인에게 푸이는 기차를 타고 일본에 가라고 헛소리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비행기가 이륙하기 직전, 공항이 소련군에게 점거당하면서 [[1945년]] [[8월 17일]]에는 [[소련군]]에게 붙잡혀서 전범 대우를 받았다. 소련군에 체포되었을 당시만 해도 푸이는 공포에 떨었지만, 소련은 한번도 다뤄본 적이 없는 타국의 군주포로[* 알려진 대로 소련은 러시아 혁명으로 [[니콜라이 2세|황제]]를 비롯해 [[로마노프 왕조]]의 직계 일족들을 총살시켰기 때문이다. 반면 과거 공산권이었던 불가리아와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 같은 여타 동구권 국가들의 경우 2차 대전 이후에 왕정을 없애고 공산정권을 성립시키는 과정에서 구 왕가 일족들에 대해 처형 대신 국외추방, 입국금지 정도에 그치는 등 러시아 혁명 직후의 소련보다는 비교적 온건한 방식으로 처분이 이루어졌다. 나중에 이들은 모국에서 공산당 정권이 붕괴/해체되고 민주화된 직후에 와서야 귀국이 실현됐다.]에 대해 특별 대우를 해주었다. 그가 수감된 모르카프카 수용소의 소장은 그를 위해서 작은 파티를 열어주고, 그에게 어떤 요구 사항이 있는지 물어보기도 했으며 이후의 생활도 푸이와 그의 일행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었다. 소련 측은 그들을 요양자처럼 대했다. 음식도 매일 4끼[* [[아침]]은 [[빵]], [[과자]], [[커피]], [[차]] 등을, [[점심]]은 요리 2개와 탕 1개, 오후 3~4시 경에는 간단한 [[간식]]을 주고, [[저녁]]은 서양식으로 풍성하게 나왔고 [[와인]]이나 [[사이다]] 등도 나왔다.]를 배급했다. 음식 뿐만 아니라 거처에 있어서도 푸이는 [[라디오]]가 있는 독방을 받았고, 소련 측은 그가 [[피아노]]를 칠 줄 안다는 사실을 알고 피아노도 거처에 가져다 주었다. 다른 수감자들이 노동을 할 때 그는 산책을 하거나 간수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나중엔 [[수용소]] 밖을 나가 [[등산]]을 하거나, 강가나 숲으로 산책을 했다. 오히려 이 시기 활동범위는 [[허수아비]] 황제 노릇을 할 때 보다 넓었으며, 하고 싶은 일도 자유롭게 했다. 푸이는 하루 종일 [[불경]]을 읽거나 좌선수행을 하고, 점도 치면서 놀았다. 그리고 함께 수감된 시종들에게 황제로서 문안 인사를 받았다. 이때 몸에 좋은 광천수를 대접받아 건강도 상당히 좋아졌으며, 같이 끌려온 장징후이나 시치아 등 만주국 내각 포로들은 푸이가 소련에 영향력이 있는 줄로만 알고 푸이에게 아부하면서 자신들을 중국에 다시 돌아갈 수 있도록 스탈린에게 부탁해달라고 푸이에게 간청했다. 푸이는 자신도 포로 신세에 불과하다면서도 마지못해서 스탈린에게 편지를 썼지만 자신이 소련에 살고 싶다고 보낸 편지와 마찬가지로 묵살당했다. 이후 [[하바롭스크]]의 수용소로 보내져 공산주의 교육을 받았고, 여기서 푸이 일행은 2층 건물을 따로 받아 사용했는데 1층은 시종들이, 2층은 푸이가 머물렀다고 한다. 현재 수용소는 철거되고 휴양지로 바뀌었다. 일행도 청소와 식품 수령 등의 노동에 참가했지만, 푸이는 여기서도 일은 하지 않았다. 다만 수용소장이 정원에 [[농사]]를 짓도록 허용해 시종들이 풋[[고추]]와 [[토마토]], [[가지]], [[강낭콩]] 등을 심어 길렀는데 이들 채소들이 쑥쑥 자라는 게 신기했던 푸이가 직접 물을 주고 관리했다고 한다. 이후에 45특수전범수용소로 이송 되었는데, 이곳에서도 우대 조치는 계속 되었다. 이러한 소련의 호의에 대해 푸이는 몹시 의외로 여기고 고마워했다. 나중에는 중국으로 송환 되는 것을 걱정해서[* 사실 푸이 일행이 동족인 국민당이 아니라 소련에 잡힌 것은 일단 행운이었다. 국민당은 친일파나 왕징웨이 정권 관계자[[한간]](중국판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을 거의 예외없이 처단했다. 이후에 국민당을 이기고 집권한 공산당도 이들을 처단하지는 않았지만, 푸이처럼 10년간 수감생활을 해야했다.] 소련군 관계자에게 자기 소지품으로 갖고 있던 금품이나 시계 등을 뇌물로 주고 중국 송환을 막아 달라고 요청할 정도였고, 러시아어를 아는 동생 푸제를 시켜 [[스탈린]]에게 4차례나 감사와 함께 소련에 머물 수 있게 허락해 달라는 편지를 써 보냈다. 국민정부가 집권하던 시절에 스탈린은 푸이의 편지를 프라우다에 게재하는 등 그에게 호의적인 반응을 보냈으나 국공내전이 시작된 1947년부터는 푸이의 편지를 무시했으며, 1950년에 온 마지막 편지는 분명한 거절의 의사를 표명하고 푸이를 마오쩌둥이 집권한 중국으로 돌려보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