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선쥔루 (문단 편집) === 신해혁명에 참여하다 === 1911년 신해혁명이 발발했을 때, 선쥔루는 진시하(陈时夏)와함께 저장성 봉기의 구체적인 작전을 설계하고 봉기를 성사시키는 데 일정부분 기여했다. 1912년 초, 선쥔루는 저장성 교육회 부회장에 당선되었고 저장성 임시 대표의원이 되었으며 2월에 저장성 교육국장을 맡아 저장성내 학교를 정비하고 교육제도 개혁에 착수했다. 그후 청나라가 무너지고 중화민국이 성립되자, 그는 연말에 각종 행정직을 사임하고 국회 참의원 저장성 후보의원에 당선되었다. 1912년 4월, 통일공화당 참의원에 선출된 선쥔루는 5월 주추펑의 소개로 중국동맹회에 가입했고 8월에 국민당원이 되었다. 1913년, 그는 국회의 [[위안스카이]] 탄핵을 지지했고 천단 헌법 초안 작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국민당의 2차 혁명에 호응했다. 그러나 2차 혁명은 9월에 실패로 끝났고, 선쥔루는 의원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1916년 6월, [[리위안훙]]이 황제를 칭하다가 각지의 반발에 못이겨 취소한 뒤 병사한 위안스카이의 뒤를 이어 총통이 되었다. 서쥔루는 저장성 대표로서 베이징에 가서 리위안홍과 국책을 함께 상의했다. 이후 그는 1917년 3월 사법부의 비서를 역임했고 장요증(张耀曾), 이근원(李根源) 등과 함께 정학회에 참여했다. 그러다가 [[북양군벌]] 내부의 정치 암투에 질려버린 그는 법무부 비서관 사임 후 고향으로 돌아갔다. 1918년 6월, 광저우 국회는 선쥔루를 정식의원으로 선출했다. 이후 그는 광저우에서 참의원 활동을 하며 헌법제정에 참여했으며 1919년 9~10월 [[돤치루이]] 정부의 남벌 계획을 막기 위해 저장성으로 가서 저장성 군벌이 단치루이에게 협력하지 않고 중립을 택하도록 유도했다. 그는 1920년 9월 호법군 검찰청 총검장을 맡았으나 10월에 사직하고 상하이로 향했다. 그는 상하이에서 [[카를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연구하고 창작을 생업으로 삼아 <가정신론(家庭新论)>을 저술해 중국인의 가정 문제를 논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