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선조(조선)/평가 (문단 편집) === 명나라 도주 계획 ===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어찌 갈 만한 지역을 말하지 않는가. 내가 천자(天子)의 나라에서 죽는 것은 괜찮지만 왜적의 손에 죽을 수는 없다." >하였다. 상이 세자(世子)를 이곳에 주류(駐留)시켜 두고 떠나는 것이 괜찮겠느냐고 하문하자, 철(澈)이 아뢰기를, >"만약 왜적의 형세가 가까와지면 동궁도 어떻게 여기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하고,[* 차마 왕에게 대놓고 막말을 하지 못해 완곡하게 표현하긴 했지만, 정철이 듣고는 기가 막혀서 '''"아비로서 어찌 아들을 전쟁터에 두고 떠난다고 하십니까?"'''라며 그를 질책하는 것이다.] >------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2506013_007|선조실록 27권, 선조 25년 6월 13일 신축 7번째기사]] ------ >상이 영변 행궁(行宮)에 납시어 호종한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최흥원(崔興源)이 아뢰기를, >"상께서 정주(定州)로 이주하고 싶으시더라도 우선은 여기에 머무르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일에 대한 내 생각은 이미 정해졌다. 세자는 여기에 머무를 것이니 여러 신하들 중에 따라오고 싶지 않은 사람은 오지 않아도 좋다."''' >하였다. 정철이 아뢰길, >"세자가 지금은 여기에 머물다가 끝내는 정주(定州)로 갈 것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귀성(龜城)이나 강변(江邊) 등처로 가야 할 것이다." >하였다. 철이 아뢰기를, >"세자가 여기에 머무르면 힘이 분산되어 조정이 모양을 이루지 못할 성싶고 인심도 역시 요동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호종하는 관원을 여기에 많이 머물게 하고 나는 가벼운 행장으로 옮겨갈 것이다." >하였다. 철이 아뢰기를, >"우선 평양의 소식이 오는 것을 기다려 봄이 어떻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여러 신하들이 머물자고 권하는 것이나 피하자고 권하는 것이 각각 소견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다시 갈 만한 곳이 있겠는가. 그러나 말하여 보라. 만약 있다면 내가 따를 것이다." >하니, 흥원이 아뢰기를, >"왜적의 기세가 꺾이면 북도로 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에 가산 군수(嘉山郡守) 심신겸(沈信謙)이 행재소(行在所)에 와 있었는데, 상이 내관(內官)에게 명하여 가산까지의 거리를 물어보도록 하니, 입계(入啓)하기를, >"90리 길입니다. 그러나 큰 강(江)이 둘이 있고, 가산에서 의주(義州)까지는 촌락이 다 비어 있으므로 인연(人煙)이 매우 드뭅니다." >하자, 철이 아뢰기를, >"서북 지방은 조금 완전하여 우리 나라 강토가 아직은 다 함락당하지 아니하였으니 어찌 피할 만한 곳이 없겠습니까. 강계(江界)는 사람들이 모두 방어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랫사람들은 어느 곳이든 못 갈 곳이 없겠지만 나는 정주(定州)로 피해야겠다. 평양이 함락당하면 함경도도 온전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이괵이 아뢰기를, >"평양이 함락당하면 우리 나라는 보전할 만한 곳이 없습니다." >하자, 철이 아뢰기를, >"임진(臨津)은 왜적이 주인이 되고 우리가 객(客)이 되었지만, 평양은 우리가 주인이 되고 왜적이 객(客)이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제 김정목(金庭睦)의 말을 들어보지 못했는가. 왜적이 만약 뗏목을 만들어 일시에 진격해 오면 그 예봉(銳鋒)을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흥원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에는 피할 만한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현재 요동으로 들어갈 것을 의논하고 있는데 요동으로 일단 들어가면 조종(祖宗)의 종묘(宗廟)·사직(社稷)을 장차 누구에게 부탁하시겠습니까." >하자, 철이 아뢰기를, >"1주(州)·1읍(邑)만 가지고서도 역시 도모할 수 있습니다." >하니, 흥원이 아뢰기를, >"중국이 우리를 받아주지 않고 왜적이 또 뒤에서 핍박하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지금 정주(定州)로 이주한다는 분부가 있자 인심이 동요되고 있으니 잘 생각하여 처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괵이 아뢰기를, >"시종신(侍從臣)을 보내어 조치하는 일을 우선 멈추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괵이 아뢰기를, >"이 지경에 이르러 어찌할 수는 없습니다마는 전일에 왜적과 통신(通信)한 일이 있었으니 중국에서 그다지 믿어주지 않을 성싶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요동에 들어갈 수 없단 말인가. 왜적의 문서(文書) 중에, 그들의 장수를 8도에 나누어 보내겠다고 하였으니, 우리 나라 지방에서는 피할 만한 곳이 없을 성싶다." >하였다. >------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2506013_005|선조실록 27권, 선조 25년 6월 13일 신축 5번째기사]] ------ > 상이 이르기를, >"요동으로 가든지 다른 곳으로 가든지간에 부질없이 의논만 할 것이 아니라 속히 결정하여 그 때를 당해서 갈팡질팡하는 폐단이 없도록 하라." >하니, 대신들이 아뢰기를, >"당초에 요동으로 가자는 계책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의논을 들은 뒤로는 신민들이 경악하였으나 달려가 하소연할 곳도 없었으니 그 안타깝고 절박한 실정이 난리를 만난 초기보다 심하여 허둥지둥 마음이 안정되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비록 왜적들이 가까이 닥쳐왔지만 하삼도가 모두 완전하고 강원·함경 등도 역시 병화(兵禍)를 입지 않았는데, '''전하께서는 수많은 신민들을 어디에 맡기시고 굳이 필부(匹夫)의 행동을 하려고 하십니까.'''[* 조선왕조실록에서 대놓고 왕에게 필부를 운운하며 왕의 행동에 반대하는 예는 사실상 선조가 처음이라고 볼 정도이다. 그 연산군도 패륜, 악행, 폐단 등의 강한 어조의 비판이 들어갔을 지언정, 필부라는 말은 없었는데. 이 당시 필부라는 말이 신분제가 공고한 사회에서 하찮은 남자를 일컬음을 생각하면 거의 왕에게 '''"전란중에 백성은 놔두고, 조선 반도 떠날거면 왕위에서 사퇴해라."'''라고 말한 것과 크게 다를 게 없다. 한마디로 대신들이 선조의 무책임함을 질책하는것이다. 게다가 조선의 국시인 유교는 '부자유친 군신유의' 왕은 어버이요 백성은 자식이라는 논리로 통치를 해왔고 그것이 통치의 근간이었다. 만인의 어버이인 왕이 그냥 자기 살자고 튀고 싶다는 판이니 유교적인 질서를 기반으로 사는 양반들은 당연히 어이가 터졌을 것이다.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아니 세상에 자식을 버리고 도망가는 부모가 어디에 있습니까?"'''고 따지지만 못했을뿐 필부에 비유하여 말했음은 확실하다.] >그리고 명나라에서 대접하여 허락할는지의 여부도 예측할 수 없으며, 일행 사이에 비빈(妃嬪)도 뒤떨어져 갈 수 없는데, 요동 사람들은 대부분 무식하여 복색(服色)도 다르고 말소리도 전혀 다르니, 비웃고 업신여기며 무례(無禮)히 굴면 어떻게 저지하겠습니까. 비록 요동에 도착한다 하더라도 그곳의 풍토와 음식을 어떻게 견디시렵니까. 생각이 이에 이르자 눈물이 절로 흐릅니다. 요동으로 가는 문제는 신들은 '''결코 다시 의논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명나라 병사들이 비록 많이 왔지만 우리 나라에서 향도하는 군사가 없어서는 안 되니 이 향도군을 모집하는 것도 시급합니다. 본주(本州)에 토병(土兵)들이 거의 1천 명쯤 되니, 지금 비록 무너져 흩어졌지만 만약 과거(科擧)로써 소집한다면 그들을 모으는 일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병조(兵曹)에서 내일 활쏘는 것을 시험보이려고 하니, 상께서 당분간 여기에 머무르셨다가 다시 왜적의 소식을 들은 다음 수상(水上)을 경유하여 벽동(碧潼)에 이르러 며칠 머무르시다가 또 강계(江界)로 가 형세를 보고 또 설한령(薛罕嶺)을 경유하여 함흥(咸興)에 이르시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하니, 알았다고 답하였다. >------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2506024_001|선조실록 27권, 선조 25년 6월 24일 임자 1번째기사]] ------ >[[신잡]](申磼)[* [[신립]], 신급(申礏), 신할(申硈)의 형.]이 아뢰기를, >'''"요동을 건너면 필부(匹夫)가 되는 것입니다. 필부로 자처하기를 좋게 여긴다면 이 땅에 있더라도 피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요동으로 가겠다는 선조에게 대놓고 요동가면 왕위에서 사퇴할 것을 요구한다.] >... >신잡은 아뢰기를, >"여기 있는 군신(群臣)들이 누군들 국가를 위하여 죽으려는 마음이 있지 않겠습니까? 대가[* 선조의 어가]가 우리 땅에 머물러 계신다면 거의 일푼의 희망이라도 있지만 일단 요동으로 건너가면 통역(通譯)하는 무리들도 반드시 복종하지 않을 것은 물론, 곳곳의 의병들도 모두 믿을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제장(諸將)[* 여기있는 군신들을 말함]들은 패배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대가가 요동으로 건너가는 것만을 두려워합니다."''' >하였다. >------ >[[https://sillok.history.go.kr/id/kna_12508002_001|선조실록 29권, 선조 25년 8월 2일 기축 1번째기사]] 선조가 단순히 도망쳤다고 해서 간과하는 부분이 있는데, 결국 [[임진왜란]]은 조선이 이긴 전쟁이라는 점이다. 결과론적으로 선조가 도성을 버리고 도망친 것은 의도야 어떻든 마냥 잘못되었다고 보기는 힘든 선택이었다. 도망을 안 쳐서 '''[[토목의 변|왕이 잡혔다면]] 조선은 그대로 멸망했을 것이다.''' 냉정하게 이야기하면, 사로잡히지 않고 죽었다면 세자를 새 왕으로 옹립하고 버틸 수라도 있는 반면, 현직 왕이 생포당하면 그대로 패배 확정이기에 '''나라를 위해서라도''' 왕은 유사시 안전한 곳으로 도망칠 필요가 있다. 실제로 이렇게 도망을 치려다 실패하여 붙잡혀서 패전한 전쟁이 바로 [[병자호란]]이고 그 결과는 [[삼전도의 굴욕]]이고, 옆 나라인 [[명나라]]가 [[토목의 변]]으로 피똥을 쌌었고 결국 이렇게 망했으니, 왕이 잡히는 게 얼마나 큰 문제인지는 역사가 증명한다.[* [[숭정제]]는 남경으로 천도할 수 있음에도 끝까지 하지 않아 명나라는 정통정권이 이자성의 난으로 북경에서 붕괴되어 버리는 바람에 대를 이으려던 [[남명]]도 여러 정권이 난립하며 교통 정리조차 안 되었고, 그래서 청군에게 각개격파를 당했다. [[청나라]]는 도망을 안 쳐서 망한 점은 명나라와 비슷하나, 이쪽은 [[위안스카이|특정 권신]]이 [[신해혁명|배신]]할 가능성을 배제한 탓에 그 권신 때문에 망한 케이스다. 명나라(남명 제외)가 신하의 배신이 아니라 순수하게 반란군에 의해 멸망한 것과는 대조적이다.] >일단 수도를 버리고 도망갔다는 것에서 해명을 할 필요가 있는데, 이것에 대해 우리가 너무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있어요. 예를 들면 수도를 버리고 후퇴하는 건 서양 사람들 입장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안 돼요. 단, 이건 있어요. 봉건 영주가 적이 쳐들어 왔는데 도망가잖아요? 그러면 주변 모든 인물들에게 인망을 잃어버려요. 왜? "내가 영주로서 군림하고 세금을 받는 것은 너희들을 지켜주기 위해서야!" (라는 것이 당시 사회 시스템이었으니까요.) 산적이 쳐들어 왔는데 보안관이 도망을 쳤어. 그러면 보안관은 끝이죠. 하지만 왕은 보안관이 아니에요. 보안관이 아니라 국가 시스템을 운영하고 관리하는 사람이지. 그러니까 '''왕이 전쟁을 포기하고 제 할 일을 안 했느냐''', 이 기준으로 왕의 잘못을 판단해야지, '''피난 간 것이 비겁하다고 말할 순 없는 거에요'''.[* 상술한 다른 사례에서도 볼 수 있지만, 선조를 사로잡기 위해 임진왜란 초기 일본군은 하삼도에 대한 교두보를 확보하려 하지 않고 곧바로 한양을 향해 쾌속진격을 했는데, 선조가 도주하면서 이 계획이 틀어져 후속 대책을 세우느라 한 달이나 진격이 지체되었고, 이 틈을 타 조금이라도 해놨던 전쟁 준비를 기반으로 한 의병들이 사방에서 쏟아지는 걸 마주해야만 했다.] >------ >[[임용한]], [[토크멘터리 전쟁史]], [[https://www.youtube.com/watch?v=AMN3alnXASs|67부 〈고려 vs 거란 전쟁 2〉]] 현대에도 국가 원수가 잡히거나 사망하면 거의 패배하는데, 과거는 특히 더했다. 당시 일본의 병법도 '''적장만 잡으면 끝'''이라는 논리 하에 전국시대를 보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 또한 1순위 목표로 '''선조의 신변 확보'''를 두고 한성을 가장 빠른 속도로 진군하는 방법을 택했다. 하지만 선조의 도피로 인해 예상치않게 전쟁이 길어져 조선군이 재집결한 시간이 벌어지고 일본군은 각지에서 보급로가 끊기고 [[이순신|충무공]]과 [[의병]]의 활약, 명나라의 지원군 등으로 인해 전쟁은 장기전으로 흘러들어가게 되었다.[* 분명히 국왕을 비롯한 전쟁을 책임질 사령부가 적군에게 생포되는 것은 치명적인 타격이 될 것이고, 때문에 [[됭케르크 철수작전]]처럼 후대에 크게 인정받는 철수 작전도 분명히 있다. 당연하지만 왕이 잡히면 그 순간 구심점을 잃은 조선은 질 확률이 증가하므로 도망치는 것 자체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겁쟁이라고 놀리든 뭐든, 나라를 위해서라도 국가의 상징인 왕은 살아야 한다. 사실 제일 좋은 것은 '''도망칠 상황 자체를 만들지 않는 것'''이겠으나, 도망쳐야 하는 상황이라면 제대로 도망치는건 욕을 먹긴 커녕 일을 잘 한 것으로 칭찬해 마땅한 행동이다.][* 왕이든 대통령이든 적에게 잡힐 경우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 있는 점은 분명히 사실이므로 이승만[* 이승만은 피난해서 욕을 먹는 것이 아니라. 남쪽으로 내려오지 못한다며 피난하려는 사람들을 안심시킨 후, '''말 없이 혼자 피난 간 것이 욕을 먹는 것이다.''']이든 선조든 피난 자체로 비판하는 것은 삼가야 할 것이다. 일단 왕이 붙잡힐 경우 '''최선의 경우'''가 인조가 청나라에게 당했던 수모. 좀 나쁜 경우가 원나라의 부마국, 속국이 된 고려 말기의 경우이며, 최악의 경우가 식민지가 되어서 나라가 사라지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고[* 척화파로 알려진 김상헌이 출성항복을 끝까지 해선 안된다고 주장한 이유 중 하나이며 신하들도 강화도가 점령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진 후 김상헌은 "지금이라도 결단하면 (살아남을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다른 신하들은 "항복 하면 위태로울 확률 반 망할 확률 반이지만 항복 안하면 백이면 백 망하고 말 것입니다." 라고 했다.] 대통령의 경우도 그 정치적 파급력은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고, 전쟁은 공산군의 승리로 그대로 끝날 수 있는 문제이다.(또한 이승만의 경우는 수도 함락이 기정사실화 되었을 때의 패닉과 그로 인한 혼란을 막아야 했다.) 실제로 [[고려 현종]]은 거란의 2차 침공 당시 무사히 피난하는 데 성공하여 [[공세종말점]]에 도달케하여 회군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고, 이 틈을 탄 [[양규]] 등이 반격의 기회를 마련하는 데 성공했다.[* 덤으로 현종은 전쟁의 최고 에이스인 [[강감찬]]에게 '''궤장'''을 주고 손수 모자에 꽃도 꽂아주는 등 대접을 제대로 해 줬다. 선조와 철저히 대비되는 임금이다.][* 다만 선조도 공을 세운 장수들을 푸대접하지만은 않은것이 [[니탕개의 난]]에서 [[신립]]이 공을 세우자 자기가 먼저 [[신립]]을 마중나갔고, 심지어는 자기가 직접 [[곤룡포]]를 벗어서 [[신립]]에게 입혔을 정도로 [[신립]]의 공훈을 매우 높게 평가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 초기에 수도를 쭉 지키면서 전선 유지를 독려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라는 훌륭한 반례가 21세기에 존재하긴 하지만 이것도 사실상 도박에 가까운 위험한 행동이다. 그러한 도박이 제대로 먹혀 들었으니까 망정이지. 당시엔 [[키이우]] 한복판에서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양국 특수부대들이 교전을 벌이고 있었고 러시아군 측은 방공호의 위치를 알아낼 경우 최소 포로, 혹은 아예 사살할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에 분명한 위험 한복판에 뛰어든 것이나 다름 없었으며, 국가 원수의 생포 또는 사망은 전쟁 수행에 있어 결정적인 치명타를 입힐 수밖에 없다.] 일본군은 최단 시간 내에 한양을 점령했으나 정작 목표였던 왕의 확보에는 실패하면서, 오로지 한양만을 위해 진격하느라 외면했던 각지에서 의병과 관군이 튀어나오며 전쟁의 양상이 크게 달라진다. 다시 말해 왜란이 터지고 빠르게 [[명나라]]로 향해 원군을 요청한다는 선조의 선택지는 사실 그 상황에서 조선의 임금이 선택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이라고 보아야 한다.[* 왜란 당시에 선조는 도망만 쳤고 [[이순신]]과 [[권율]]이 잘 해서 전쟁을 이긴 것이란 판단은 굉장히 짧은 이해다. 전술했듯이 우선 그 이순신과 권율을 등용한 군주가 바로 선조이고, 도성까지 점령당한 판국에 국가 원수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해결책인 외교적 방법으로 명군의 파병을 얻어낸 것도 어느 정도 성공적이었다. 사실 명군이 별 활약도 없이 민폐만 끼쳤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사실 명군은 존재 자체도 큰 도움이 되었다.[* 비록 [[벽제관 전투]]의 패배로 전선을 고착화시키기도 하고 민폐도 많았지만 [[명나라군]]의 전투력과 지원이 있었기에 조선군이 재정비할 여유를 가질 수 있었고 조선이 거둔 승리가 빛을 발할 수 있었다. 실제로 정유재란 때는 명군이 지상군의 주력이었으며, 임진왜란 때는 5만~7만 4천 명 가량, 정유재란 때 파견된 명군 규모가 무려 9만~11만 7천 명이다. 특히 [[정유재란]] 당시에는 [[명나라군|명나라 군]]이 한반도 남부에서 일본군과 전면전을 전개하며 일본군을 압박하였고,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 역시 사실이다. 만약 [[명나라군|명나라 군]]의 이러한 활약이 없었다면 설사 히데요시가 죽었더라도 일본군이 한반도 남부에서 철수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상정할 수 있다. [[https://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9/01/2015090102501.html|#]]] 일본군 입장에서는 적을 둘이나 한꺼번에 상대해야 하니 상대적으로 부담감이 더 컸다.] 다행히 그 선택지가 먹혀들었고, 명의 원군을 얻어냈으며,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관군과 의병이 일어날 시간도 벌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침략을 당한 전쟁에서 승전해 나라를 지켜냈다는 결론은 적어도 사실이다. 여기까지는 전혀 문제가 없으나... 선조가 도망을 간 이유가 조선의 승리를 위한 자신의 옥체 보전이 아니라 '''그저 일신이 살고 싶어서 튀었다'''는 것이 문제다. '''한마디로 선조의 행보는 전쟁 수행을 위한 일시 후퇴와는 전혀 상관없이 [[구엔 반 티유|국가의 존망을 책임지기 싫어서 벌인 도주]]였다.''' 위에서 말한 대로 선조의 후퇴가 인정받기 위해서는 후퇴 이후 다시 병력을 모으고 방어선을 재정비하는 등의 일본군에 맞서 조선을 지키려는 행보가 있었어야 하는데,[* 선조도 나름대로 전시 대응체계를 가동하기는 했다. 임진강 방어선, 평양성 방어선 등 병력 모으고 방어선을 짜기는 했다. 문제는 둘 다 담당 지휘관의 삽질로 허무하게 무너졌다는 것. 그래서 전국에 격문을 돌려 의병(조선이 의병들이 스스로 일어나서 승리한 민중의 승리라고 보는 시선도 있지만 조선은 의병들을 신속하게 정규 군사체계에 편입시키고[* 참고로 의병장은 전부 양반이었다. 물론 그 양반들 밑에 자발적으로 모인 건 결국 민중이니 민중의 힘도 없는건 아니다.] 군권과 식량 조달을 위한 조세권을 주면서 적극적으로 대응했다.)을 소집, 즉 민방위 체계를 작동시키고 혹여나 자신이 잡힐 경우를 대비하여 세자였던 광해군에게 권한 일부를 이양하여 전시 체제에 돌입하였다. 일본군의 진공이 생각보다 빠르고 신속하여 오버를 한 경향이 있다.] 선조는 그 부분에 있어서 매우 부족했다는 평가를 듣는다. 진짜 문제는 피난이 아니라 '''아예 나라를 버리고''' 요동을 넘어가려 했다는 것이다.[* 국내에서 피난을 하며 버티는 게 아니라 아주 적극적으로 다른 나라로 튄 왕이 난이 평정된 고국으로 귀환할 수 있는 확률이 생각보다 그렇게 높지 않다. 몽골의 침입 때 고려가 강화도에 짱박혔음에도 어쨌든 나라를 유지한 건 그래도 그것이 국내였기 때문이었다.[* 이쪽은 그냥 본토 방어를 완전히 포기하고 니들이 한반도 점령하든 말든 우리도 한반도 약탈하면서 강화도에서 버틸 거다 수준의 마인드였기에 선조보다 나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무신 정권은 한반도 본토를 방어할 의지 자체가 없는 상태로 몽골이 쳐들어오면 도망쳤다가 몽골군이 물러나면 다시 본토로 군대를 보내서 세금만 약탈해갔다.] 그렇기에 기를 쓰고 신하들이 반대했고, 명나라는 처음에는 선조를 '''일본의 첩자라고 의심했다가''' 나중에 진실을 알고선 기가 찼으며, 조선의 명맥을 유지할 왕이라는 구심점을 만들기 위해 신하들이 양위를 해서 '왕'의 권위를 광해군에게 넘겨줄 생각까지 한다. 조선이라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신하들이 왕을 적대하는 지경까지 간 것. 이에 관한 비판은 너무나 중대하여 아래 "명나라 도주 계획"에서 별도로 다룬다.] 이렇게 되면 가타부타 이야기할 필요 없이 그냥 대단히 적극적인 선조의 행위로 조선이라는 나라가 사라져버릴 수 있었고, 그건 누가 봐도 '''[[나만 아니면 돼|조선이 망해도 상관없으니 나는 살겠다]]'''는 제스처였다.[* 하다못해 손자인 인조도 이렇지는 않았다. 이괄의 난 때는 호남으로 도주했는데 이때 신하들이 영남으로 도주하느냐 호남으로 도주하느냐 의견이 갈렸는데 김류는 충의로운 선비가 많으니 왕의 뜻에 따라 일어설 이들이 많을 거라며 영남으로 가자는 의견에 문을 숭상하는 영남보다는 '''무를 숭상하는''' 호남이 낫다고 해서 호남으로 갔다. 즉 반격을 위해서 호남으로 간 거다. 정묘호란 때 강화도로 도주하긴 했어도 이 역시 이런 일에 대비한 매뉴얼에 따른 것이었으며, 병자호란 당시의 몽진 역시 할아버지가 제 목숨 하나 살겠다고 토낀 것과는 다르다. 인조 자신도 남한산성에서 45일간 맞서긴 했으며 그 사이 왕을 지원하러 온 병력이 왔고 대체적으로는 숫자 때문인지 지는 게 많았지만 [[광교산 전투]] 등 이긴 전투도 없잖아 있었다. 비록 졌기 때문에 왕이 도망을 못 치면 어떤 꼴이 벌어지는지를 본인 스스로 증명해버린 게 문제지만, 마음가짐만은 할아버지랑 비교하는 게 미안할 정도다.] 흔히 현대인들에게 전황이 매우 좋지 않다고 말을 하지도 않고 [[국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라며 서울 사수 의지를 표명하는 왜곡 방송을 틀어놓고 야음을 틈타 대전으로 도주한 6.25 전쟁 초반 '런'승만과 함께 엮여서 런조로 까이지만, 살펴보면 이승만과 비교하는 것도 실례인 수준이다. 일단 이승만은 [[일본|옆나라]]로 [[일제강점기|도망칠 생각은 없었고]](...) 적어도 [[한강 인도교 폭파]]는 북한군의 진격을 늦추어 [[공세종말점]]을 앞당기는 한 편 그렇게 번 시간을 활용해 UN군의 충원을 기다리고 국군을 확충하고 반격할 기회를 모색하려는 군사적 의도가 있었지만 선조는 그런 의도조차도 없었다. 차라리 반대로 했다면 욕이라도 안 먹었을지도 모른다.[* 그나마 비슷한 예를 찾으라면 1941년 4월 유고슬라비아의 [[페타르 2세]]가 있는데 자신의 당숙이던 페타르 왕자는 친독 정책을 펼치며 국가를 보존했는데[* 믿기 힘들겠지만 히틀러와 나치 독일은 발칸반도에 대해서는 자신들에게 약간 우호적인 중립정도만 지켜주면 정말로 침공할 생각이 없었다. 당시 히틀러의 관심은 그의 원대한 꿈인 게르만 민족의 동방 고토 수복과 생활권 확보를 목표로 독소전쟁쪽으로 몰려있었고 영국을 본토에 가두어 놓기만 하는 걸로도 직접적으로 엄청난 압박을 주는 것이었기 때문에 굳이 지중해의 영국 세력을 건들 이유가 없었다.] 페타르 2세가 반독 성향 측근들과 쿠데타를 일으킨 다음 친연합 내각을 설립했다. 물론 페타르 2세도 독일을 자극하지 않으려했지만 쿠데타 과정에서 충분히 독일에게 모욕적인 행동을 한 것에 모자라 친연합 내각을 내세우자 히틀러는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기에 이른다. 이 사태를 자초한 왕이니 유고 국민들을 통합시켜 끝까지 싸워야 마땅했겠지만 '''영국으로 도망쳤다'''. 덕분에 유고는 거의 무혈에 가깝게 독일에게 점령당했고 잃어버린 명예는 티토가 이끄는 빨치산들이 목숨을 걸고 항쟁하면서 지킬 수 있었다. 그 덕에 전후 유고슬라비아 국민들은 페타르 2세에게 국민을 버리고 도망간 주재 어디 왕노릇하려나며 강하게 반발하며 항쟁 영웅 티토를 지도자로 내세우고 사회주의 공화국을 설립하기에 이른다.[* 유고 슬라비아 국민들의 선택도 있었지만 티토는 여러 공산주의자들과 다르게 스탈린의 꼭두각시도 아니었고 서방에 우호적인 자세를 취하던 공산주의자였다. 그렇기에 서방 연합국 입장에서는 인기 없는 티토를 내새울 이유가 전혀 없었다.]] 당장 군사적 대응은 당시 겨우 10대 중후반이었던 세자인 광해군과 신하들에게 모두 떠넘겨 버렸고,[* 물론 선조는 조선의 명맥 자체가 망하지는 않게 구심점을 삼도록 자기 딴에는 버리는 패인 광해군을 던졌는데 아마 선조는 별로 기대도 하지 않았고 우선 '나부터 살고 보자' 모드였던 것 같다. 그러나 예상 외로 광해군이 뛰어난 활약을 하면서 선조가 쩌리가 되는 효과가 생겨버렸다. 그리고 선조는 자신의 실책으로 잃은 권위를 내내 광해군을 갈구면서 회복할 생각을 한다. 이는 나중에 멀쩡한 황제를 버려두고 칭제를 했음에도 대계적 관점에서 아들을 인정하고 기꺼이 태상황으로 물러난 [[현종(당)|당현종]]과 너무나 대비되는, 누가 봐도 근시안적이고 한심한 일이었다. 당현종은 권력에 집착했고 자식에게는 상당히 잔혹한 인물이었음에도 배포는 컸고 아직 총기는 남아있었는지 나라의 통합을 위해서 자식의 권위를 높이는 방법을 선택했다.] 국왕인 선조 자신은 그렇게 번 시간을 가지고 '''전쟁을 완전히 포기하고 나라가 침략자들에게 망하든 말든 명나라로 도망칠 계획'''만 잡고 무리수를 둬 가며 강행했다. 특히 이 요동 도주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도 선조가 막판에 나라를 버릴 수 없다고 마음을 돌려서 안 간게 아니고 명나라 측에서 일국의 왕이 전쟁 중에 왜 나라를 버리고 외국으로 오냐며 받아주지 않아서 도망을 '''못''' 친 것이다. 선조가 어찌나 빠르고 간단히 나라를 버렸는지 명나라 조정에서 선조가 도주하는것이 계략이고 몸을 피하는 척해서 일본과 내통하여 명나라를 치려는 음모가 아닌지 의심할 정도였다. 농담이 아니고 자국 원수가 싸움다운 싸움도 안 해보고 토껴서 "나 좀 살려주시오."도 아니고 "나 망명 좀 받아주시오." 하면 외국에선 이상하게 볼 일이다. 게다가 일본군의 진군속도는 가히 경이로울 지경이라 아무 전투도 없이 진격한 것과 거의 동일할 정도로 진격해오고 있었다. 본인이야 "안남국도 멸망당한 뒤 입조하니 전쟁이 끝나고 회복시켜줬다."라며 다시 돌아올 마음을 밝혔지만, 안남국의 사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짐작컨대 후 쩐 왕조 얘기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후 쩐 왕조는 명나라가 복국하였으나 얼마 못가 명나라가 무너뜨렸다.]는 정말 운이 좋았던 하나의 고사일 뿐, 왕이 나라를 떠나고 멸망한 사례는 훨씬 많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없었다. 그런만큼 '''자기 목숨 하나 보존하겠다고 왜군에게 나라와 백성의 목숨을 몽땅 팔아넘기고 도망쳐서 명과 조선 둘 다 위기에 몰아넣는 선조'''를 받아들여줘야할 명분과 이유 따윈 명 측에 있어 절대로 없기에 문전박대를 하고 지옥반도가 되고 있던 조선으로 돌려보낸 것. 거기에 신하들의 반대도 거셌다. 6월 13일 기사에서 요동으로 들어가기 위해 정주로 가겠다고 말을 하자 [[정철]]이 평양의 소식을 기다려야 하며 아직 강토가 완전히 함락가지 않았으니 중국으로 가면 안된다고 간언하지만 끝까지 도망가겠다고 고집을 부렸으며 8월에 이르러서는 선조가 총애하는 신하인 신잡조차 선조에게 대놓고 요동을 건너는 순간 왕이 아니라 필부가 된다고 평하면서, '''필부가 되기를 원하면 이 땅에서도 피란할 수 있다'''고 말하며 반대했을 정도였다. 쉽게 의역하자면 [[캐삭빵|"정 요동에 가고 싶다면 퇴위하고 서인(평민) 신분으로 내려가라"]]는 식으로 선조를 노골적으로 비난하는 것이다. 실제로 선조의 행적에 대해서 실망한 명과 조선의 조정에서는 광해군을 왕으로 추대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움직임까지 있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진짜로 선조가 요동으로 넘어가면, 신하들이 반발하며 선조를 폐위하고 광해군을 왕으로 추대했을 수도 있다.[* 이러한 일들은 결국 선조가 광해군을 경쟁 상대로 여기게 되고 결국 광해군이 이 시절 보여주었던 총명한 모습을 다 잃고 암군으로 전락하는데 일조한다.] 조선시대가 한국사 왕조들 중에서 왕이 강력했다고 하나,[*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시간이 다소 지난 뒤 고구려의 왕이었던 보장왕을 안동 도호부의 도독에 앉혔는데, 이는 고구려 유민들에게 '''옛 왕이 우리를 섬기고 통치하니 너희도 충성해라'''는 메시지를 주기 위함이었다. 조선에 비하면 지방 분권적인데다 이미 멸망한 나라의 옛 군주에게 모여들 민심이 이 정도였다.] 이 시기 선조의 권위는 그의 실책들 때문에 밑바닥이었다.[* 만에 하나 선조의 목적대로 요동 망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면 이미 해외로 도망간 국왕을 위해서 상술했던 의병이나 명나라의 원군이 얼마나 소극적으로 변했을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좋은 예시로 경술국치 이후 대한제국 황실이 일제에 협조하게 되고 일제의 특혜를 받아 호의호식하게 되자 유림들을 중심으로 한 의병이나 독립운동이 약해졌고 동시에 복벽이니 군주제니 하는 것도 약해져 1919년쯤 되면 모두가 방향은 달라도 군주정이 아닌 공화정을 외치게 된다. 물론 이때야 공화국이라는 개념이 없었으니 새 왕조가 수립되었겠지만 어쨌든 진짜로 선조가 도망쳤다면 선조는 사실상 조선의 마지막 군주가 되었거나 광해군이 어찌어찌하여 유지시켜도 귀국을 못하거나 귀국해도 [[탈문의 변]] 같은 사건이 없는 이상은 다시는 왕으로 복위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망명 전에 선조가 폐위당하고 [[광해군]]이 즉위했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명에서는 광해군으로 왕을 교체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논의도 있었다. 오히려 명나라에서 선조를 일본군의 앞잡이가 된 것으로 오해할 정도였고, 파병 온 이여송을 일국의 국왕인 선조가 버선발로 나가 맞이한 사실 등은 선조가 국격을 얼마나 가볍게 해서 실추시켰는가를 가늠하게 하며, 그 절박함이나 명에 대한 과도한 의존이 전쟁 내내 이여송을 비롯한 명군 장수들로부터 면박을 당하는 단초가 되었다.] 더불어 선조는 의주로 도주하는 과정에서 임진강에서는 배를 불태우고 평양성에서는 앞에서는 평양성을 지키겠다고 백성을 속이고는 밤에 몰래 도주하는 등 백성들의 피난을 방해하는 행보도 욕을 먹고 있다. 게다가 병법에 대해서도 무지해[* 육군과 수군에게 부산으로의 진격을 계속해서 명령했다. 당시 부산이 일본군의 상륙지점이라는 점을 보면 분명 부산에 있는 일본군을 다 없애면 큰 타격을 줄 수 있는건 확실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곳을 일본이 그냥 방치할 리가 없으며 기본적으로 육지에서 싸우는 건 육군이 할 일이다. 하지만 문제는 조선 육군과 수군 모두 선조의 명령대로 부산의 일본군을 공격할 형편이 안 되는데도 계속 공격하라고 닥달하여 육군 총사령관인 권율과 해군 제독인 이순신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상륙작전은 왜 생각해보지 않냐고 하겠지만 일본 육군+수군을 육군의 협력 없이 조선 수군만으로 감당한다는 건 말이나 되겠는가? 오죽하면 이순신이 거듭 그럴려면 육군이 이쪽으로 와서 합동으로 작전해야 한다고 했겠으며 심지어 그 멍청한 원균마저 나중에는 이를 깨달았겠는가?][* 다만 완전히 무지하다고 보긴 어렵다. [[제2차 진주성 전투]]를 앞두고는 진주성의 상황이 급박하다고 여겨 명나라측에 연락하여 외교적으로 진주성을 구원할 생각을 하기도 했다. 문제는 이런 논의를 하기 전에 이미 진주성은 묵사발이 나버린 상태였다는 것이다.] 전과의 보고에 대하여 사실관계 확인을 명확히 하지 못해 [[이순신]]을 파직시키고 [[원균|실적을 부풀린 장수]]를 그 자리에 앉혀서 [[칠천량 해전|조선의 모든 함대를 괴멸시켜버린 사건]]을 초래했으며[* 물론 당시에는 실적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기는 했다. 오죽하면 나중에(칠천량 해전 후) 원균을 까던 신하들도 삼도수군통제사가 되기 전까지는 이원익 등 일부를 빼면 원균의 실체를 모른 채 그런대로 싸우는 장수 쯤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결국 원균이 허위보고를 올려도 알 길이 없던 당시 상황도 문제였던 셈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선조를 실드칠 수 없는 노릇인게 아무리 원균이 공을 부풀리더라도 그게 이순신의 공을 능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도 잘하고 있던 이순신을 끌어내리고 원균을 세운다는 건 누가 봐도 삽질 오브 삽질이다. 게다가 이순신에게 명을 내리고 '어명을 따르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파면시키고 백의종군시키며 욕을 보이고 지휘권과 명예를 박탈한 것은 전적으로 선조의 권한으로 일어난 일이다. 따라서 그 책임과 [[나비 효과|이후 일어난 원균의 실책도 온전히 선조의 잘못이 원인으로 일어난 결과로 읽힐 수 밖에 없다.]]] 일본 육군의 육상 보급선을 흔들어놓은 의병 지휘관들에게 이후 공신들의 공과를 논함에 있어 행한 하대는 옹호할 거리가 될 수 없다. 그저 순전히 '''개인적 안위'''만을 생각해 적극적으로 '''나라를 버리려고''' 했고, 결국 그것을 보다못해 조선을 지키기 위해 명과 신하가 합심해서 '''왕을 폐위시키려는 상황'''까지 만든 것은 결국 선조 본인이었다. 또한 백성들의 입장에서도 왜적이 따라올까봐 임진강의 배를 모두 불태워 백성들마저 도망칠 수 없게 했으며, 평양성으로 도주 후 평양을 지키겠다고 선언해놓고 야반에 몰래 도망친 점은 도저히 옹호를 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이런 옹호하기 힘든 추태를 보인 탓에 현대에는 '''런조'''([[런#인터넷 밈|Run]] + 선조)라는 새 묘호를 하사받고 신나게 까인다. --그래도 도망은 잘 갔으니 [[인조|런도못한조]]보다는 낫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