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선양 (문단 편집) === 한국 역사 속의 선양 === [[한국사]]에서는 후삼국시대까지 전쟁으로 [[수도(행정구역)|수도]]가 함락되거나 해서 무력으로 멸망하는 사례가 많았고, 왕족들이 중국으로 압송당하는 등 기본적으로 선양을 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중국의 천명사상이 한반도에는 제대로 전파되지 않아 한국사의 고대는 명분보다는 힘의 원리, [[약육강식]]의 구도로 진행되었다. 다만 [[신라]]에서 마지막 [[성골]] [[진덕여왕]]이 죽게 되어 성골의 대가 끊기자 원래는 왕이 될 수 없는 신분이었던 [[진골]]이자 당시 신라의 실권자였던 [[김춘추]]가 대신들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고 김춘추가 세 번 사양했다가 마지못해서 받아들였다고 하는데, 이는 일반적인 양위라기보다는 절차상 선양에 가까운 과정이다. 왕족 계급이 정해져 있었다가 단절되고 새로운 인물을 추대해야 했던 신라 사회의 특수성으로 인해 나타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중국의 선양 개념과 유사한 형태는 먼저 [[신라]]의 [[경순왕]]이 [[고려]]의 [[왕건]]에게 항복한 사건에서 나타나나, 왕건은 이미 그 전부터 고려라는 나라의 왕이었고 경순왕이 한 일은 별도의 나라였던 신라를 고려에 들어다 바친 것일 뿐이라 선양의 정의에 맞지 않는다. [[견훤]]이 왕건에게 위협하는 편지를 보내고 왕건이 견훤을 비판하는 답서를 보내는 과정에서 신라 왕실을 중국의 [[주나라]]나 [[한나라]]에 비유하고 신라 왕을 멋대로 죽인 견훤을 [[왕망]]과 [[동탁]]에 비유하거나[* 왕망과 동탁 둘 다 신하로서 주군인 천자를 폐위하고 죽인 인물들이다.] 서로 존왕(尊王)을 논하는 등 신라왕실을 고려나 후백제보다 명목상 일종의 한반도판 [[천자]]로 간주하는 의식이 엿보이기도 하지만, 이런 의식과 허례는 경순왕이 귀부를 청하기 전부터 없어져 있었다. 935년 경순왕이 고려에 귀순을 청할 때 왕건이 몇 차례 거절했던 건 여러 차례 사양하는 선양의 구도를 따라한 것이지만, 대왕 신라왕에게서 왕위를 넘겨받는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신라왕이 대왕인 고려왕에게 나라를 바치는 구도로 진행되었다. 중국의 선양 개념에 가장 가까운 형태는 [[고려]]의 [[공양왕]]이 조선의 [[태조(조선)|태조]] [[이성계]]에게 왕위를 물려준 것이라 하지만, 선양은 협박에 의할지라도 왕이 스스로 물려주는 것을 말하는데 이건 공양왕이 이성계에게 순순히 선양한 게 아니라 태후가 함부로 임금을 폐위한 다음 성이 다른 이성계에게 왕위를 전하는 전개였기 때문에 고려 - 조선의 교체 또한 어쨌든 전형적인 중국식 선양의 형태는 아니었다. 그리고 조선이 개국된 뒤에는 선양한 공양왕을 비롯한 [[개성 왕씨]] 대다수가 [[왕씨 몰살|나중에 조직적으로 살해당한다.]][* 그래서 여기서 피하기 위해 왕(王) 자를 살짝 고친 전(田)씨나 전(全)씨, 옥(玉)씨 등으로 위장한 사람도 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런 이야기는 전씨나 옥씨가 가짜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어 해당 성씨 당사자들은 불쾌해하는 사람이 많음을 주의해야 한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성을 바꿔 숨어 지낸 사례는 분명히 있다. 다 그런 건 당연히 아니지만.] 최초의 선양은 오히려 조선 왕조 내에서 몇 번 이뤄졌으나, 엄밀히 말하자면 이건 선양이 아니라 양위다. 우선 첫째 사례는 조선 [[정종(조선)|정종]]과 [[태종(조선)|태종]]의 관계. 다만 두 사람은 친형제 사이고 즉위 때부터 실권은 이방원에게 있는 형태였으며 즉위 2년 만에 곧바로 왕위를 넘겼기에 선양의 다른 사례와는 달리 순조롭고 평화롭게 이루어졌다. 정종과 태종의 사이는 선양한 뒤에도 매우 좋아서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에는 '[[격구]](擊毬)하고 술자리를 마련하여 극진히 즐거워하였으니 태상왕이 부른 것이다.'라는 기록이나 '태상왕(정종)이 일어나 춤을 추니 임금도 일어나서 춤을 추었다. 태상왕께 헌수하고 춤을 추고 연구로 화답하며 매우 즐기다.'라는 기록도 남아있으니 정말로 사이가 좋았던 듯하다. 선양의 정의가 '혈연이 아닌 남에게 물려준다'이고 보면 선양도 아니고 그냥 양위다. 그 후엔 단종-세조의 교체가 있는데, 사실 세조는 단종의 숙부이기에 이 또한 선양이 아니고 양위. 다만 이렇게 실제로 양위의 형태를 띔에도 선양이란 표현을 쓴 것은 조선 깊숙히 자리잡은 유학의 영향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유교는 도덕적인 군주가 천하를 다스리면서 인의를 실현하는 것을 이상적으로 보았다. 때문에 한 임금이 평가를 좋거나 나쁘게 받는 기준은 도덕성과 인의였고, 다음 임금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기준 역시 인의였다. 때문에 다음 왕에게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물려주는 왕에게 인의가 있다는 것을 표현할 필요가 있었고, 이는 중국 고전에서 선양이란 형태로 이루어졌으므로 선양이라 표현한 것이다. 선양은 협박에 의할지라도 왕이 스스로 물려주는 것을 말한다. 일제강점기에 [[전주 이씨]] 황족이 [[일본 황실|일제 황가]]로 편입된 것은 [[이완용]]과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맺은 [[한일합방조약]]에 의한 것이었으며, [[순종(대한제국)|순종]]은 끝까지 합방조약에 반대했고, 원래 존재하던 다른 나라의 황가에 [[왕공족]]으로 편입해 들어간 것이므로 당연히 선양이 아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