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선양 (문단 편집) ==== [[선통제]] ==== [[파일:attachment/baton_touch.jpg]] [[마오쩌둥]]과 [[선통제]].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선통제]] [[푸이]]는 후대가 [[공화정]]이라는 점에서 약간 특수하지만, 권력의 이동이라는 면에서 보면 평화로운 선양(?)의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신해혁명]] 후 제정이 폐지되면서 [[중화민국]]에 평화롭게 정권을 인계한 선통제는 퇴위는 했지만, 1) 대청[[황제]]의 존호 유지, 2) 매년 400만 냥[* 1냥은 은으로 계산되며 현재 중국 돈 200위안, 한국 돈으로 4만 원 정도라고 한다. 현재 한국 돈으로도 1600억 원 정도이니 대단한 금액이다. 물론 황실이 거느린 시종 같은 인원이 꽤 많았던 데다 각종 행사에 지출되는 금액도 꽤 되었을 테니 퇴임 황제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돈은 이보단 적었을 것이다.]의 세비를 [[중화민국]] 정부가 부담, 3) [[자금성]], [[이화원]] 거주 허용, 4) 공사 중이었던 [[광서제]] 황릉 공사 지속 5) 청나라 황실 의식 허용 등의 특전이 있었다. 무혈로 순순히 물러난 보답으로 중화민국 정부가 예우를 해준 것이다. 일종의 "왕 있는 공화정([[비주권군주제]])"이라고 봐도 될 정도. [[위안스카이]]가 황제가 되네 마네 할 때도 어린 황제는 자금성에서 중화민국과 무관하게 "청나라의 황제"로서 평화롭게(?) 살았지만 선양의 피비린내 나는 선례에 따라서 자기 목숨도 위험하다는 생각에 불안해 했다고([[청나라 소조정]]도 참조). 사실 이렇게 순순히 물러난 것은 푸이가 아니라 그의 생부[* 푸이가 [[광서제]]의 양자 자격으로 황위를 이었기 때문에 푸이의 법적 아버지(양부)는 광서제다.]이자 광서제의 이복동생인 [[순친왕]](감국섭정왕)의 결단 때문이었다. 당시 푸이는 아무것도 모르던 어린 아이였고, 사실상 협상을 주도한 감국섭정왕은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황실이 더 이상 존속하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순순히 물러나는게 황족이 사는 길이라고 판단해 황실 폐지에 동의했다. 이후에도 이런 저런 복벽음모나 [[만주국]] 같은 곳에도 전혀 가담하지 않았고, 일본의 침략을 반대하고 중국의 단합을 외쳤다. 그 결과 그는 중화민국 시기는 물론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에도 청나라 황족의 최고 어른으로서 존경을 받으며 천수를 누릴 수 있었다. 후에 장훈([[장쉰]])의 복벽(왕정복고) 소동이 진압되었지만 공모자라 할 수 있는 선통제에 대한 예우는 계속되었다. 이런 복벽소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해 민국을 흔들었기에 푸이는 자금성에서 추방당하지만, 그래도 예우는 계속되어 매년 50만 원의 세비와 개인 재산은 보호받았다. 그러나 푸이는 불만을 느끼고 나중에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 집정을 거쳐 황제로 집권한다. 거기서도 괴뢰 신세였던 것은 매한가지였지만 일단은 황제였다. [[국공내전]]을 지나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후 푸이는 전범으로 기소되어 10년간 푸순(撫順) 수용소에서 복역했으나 예상과는 달리 처형되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러시아 제국]]의 [[로마노프 왕조]] 최후의 황제 [[니콜라이 2세]]와 그 일가가 [[적백내전]]의 급박한 상황에서 쫒기듯이 사살당했다는 것이 컸다. 설립 당시부터 러시아 공산당에게 버려진 자식 취급이나 당하고 사이도 그리 좋지 않았던 중국 공산당의 입장에서는 '''"러시아 너네는 황제를 죽였지만 우리 중국은 황제까지 감화시켜서 공산당으로 만들었다."''' 같은 자부심을 세울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중국에서 공산당이 집권한 후 수많은 지배계급 인사들이 [[인민재판]] 후 처형당했지만,[* [[패왕별희]]에 보면 잠시 이 장면이 묘사된다.] 정작 우두머리급인 만주국 황제 푸이와 그의 동생 푸제, [[장징후이]](張景惠) 총리는 목숨을 건졌다. [[푸이]]는 [[자아비판]] 후 1959년 출소, [[저우언라이]]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총리|총리]]의 배려로 처음에는 [[베이징]] [[식물원]] 정원사로 발령났다. 이건 처벌이라기보다는 노동 계급으로 환생했다는 일종의 통과의례로 봐야 할 것으로 보이며, 이 경력 때문에 자신이 황제로 살아가던 [[자금성]]에 정원사로 되돌아왔다는 영화 [[마지막 황제]] 속 이야기가 성립되었다. 후에 전국정치협상회의 문사(文史)연구위원회의 전문위원이 된다.[* 한국으로 비교하면, 국회 도서관의 연구원쯤 된다.] 그리고, 1964년에는 저우언라이의 추천으로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만주족]] 대표)에 선출되는데 [[비례대표]] 국회의원과 비슷한 격이다. 이후 [[문화대혁명]] 당시엔 다른 사람들이 [[홍위병]]에 의해 고초를 당하는 모습을 목격하는 등 두려움을 느끼기도 했지만, 이건 푸이뿐만 아니라 공산당 개국공신에게도 다 해당되는 일이었으므로 전 황제라는 이유로 핍박받았다고 보긴 어렵다. 물론 푸이의 경우는 어릴 때 실권을 다 내줘 본인 입장에선 딱히 아쉬움을 실감할 틈도 없었고, 이후엔 돈방석에서 지내 서민들 입장에선 핍박 운운하는 것도 좀 웃긴 인생이었겠지만...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