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선양 (문단 편집) ==== 선양의 회귀 및 소멸 ==== 이 시기에 오면 선양 따위는 사람들의 뇌리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선양을 받은 사람이 인간답게 일을 처리해서 그나마 유종의 미를 남겼다. * [[후주]]의 공제 [[시종훈]]이 [[북송|송나라]] 태조 [[조광윤]]에게 선양 태조 [[곽위]]는 후한의 은제 [[유승우(후한)|유승우]]가 자식들을 모두 잡아죽이는 바람에 자손을 두지 못해, 대신 아내 시씨의 조카였던 [[시영]]을 양자로 삼았다. 시영의 아들 시종훈이 뒤를 이은 지 얼마 안 되어 [[진교의 변]]으로 [[조광윤]]에게 선양하는데, 조광윤은 시종훈을 정왕(鄭王)에 봉해 보호하고 그가 얼마 지나지 않아 죽자 장례도 제대로 치러주었으며, 그의 일족을 극진히 모셨다. 이를 상징하는 게 [[단서철권]]과 석각유훈(石刻遺訓).[* 돌에 유훈을 새기고 새 황제가 즉위하면 반드시 이를 보고 지키도록 했는데, 이것의 존재는 송 황실 최고의 극비였던 까닭에 아무리 총애받는 신하라고 해도 그 존재를 몰랐다고 한다. 결국 [[금나라]]가 [[정강의 변|송의 수도 변경(개봉)을 점령]]한 후에야 그 정체가 공개되었는데, 내용은 '''제위를 선양한 시씨 가문을 지켜줄 것'''과 '상소하는 사람을 죽이지 말 것', 그리고 '어기는 놈은 하늘이 조질 것'이었다고.] 시씨 일족은 그 뒤부터 [[남송]]이 [[원나라]]에게 멸망할 때까지 약 300년 동안 국가적인 보호 대상으로 대접받았으며, 그 때문인지 시씨 일족은 의리를 지켜 남송과 [[애산 전투|멸망의 순간]]을 함께 했다. * [[장초]]의 [[장방창]]의 선양(?) 북송이 금나라에 의해 멸망한 뒤, 금나라는 아직 과거 북송의 땅과 백성을 직접 다스릴 행정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초나라를 괴뢰 정권으로 세우고 송나라의 신하였던 장방창을 황제 자리에 앉힌다. 장방창은 황제 자리를 한사코 거부했으나 금나라가 송나라의 수도를 피바다로 만들겠다고 협박하는 바람에 일단 황제 자리에 앉는다. 이렇게 마지못해 받아들이긴 했지만 이게 자신이 앉을 자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 짐이라고 칭하지도 않고 신하들에게도 황제의 예를 갖추지 말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다가 금나라가 철수하자 곧바로 정권을 송휘종의 아들인 조구에게 넘겨줘 신하의 위치로 돌아가고, 송나라는 남송으로 명맥을 이어간다. 아마도 거의 유일하게 자발적으로 황제 자리를 헌납한 경우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이렇게 처사했어도 어쨌든 과거 황제의 자리에 올랐기에 송나라 입장에서는 불편한 존재였고, 결국 장방창은 트집을 잡혀서 처형당한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엄연히 외성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준 거라 선양이 맞아야 하겠지만 장초가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했기 때문에 주관적인 이유로 인정되지 않고 그냥 송나라에게 권력이 돌아간 것으로 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