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선양 (문단 편집) ==== 악순환의 연속 ==== 이때쯤 가면 '''선양 = 죽음'''이란 공식이 완성된다. * 북주의 [[정제(북주)|정제]] 우문천이 [[수나라]] [[수문제|문제]] [[양견]]에게 선양 양견은 우문천의 외할아버지였지만 외손자의 목숨은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사실 엄밀히 따지자면 우문천의 친외할아버지는 양견이 아니었다. 우문천의 아버지 [[선제(북주)|선제 우문윤]]은 황후가 5명이나 있었는데 그 중 양견의 딸은 양황후였고, 우문천의 어머니는 주황후였다. 따라서 친외손자는 아니고 상징적인 외손자일 뿐이었다. 여하튼 우문천 역시 선양받은 지 얼마 안 되어 수문제의 손자를 제외한 우문씨들과 함께 깨끗하게 멸족당하는 걸로 끝난다. * [[수나라]] [[수공제|공제 양유]]가 [[당나라]] [[당고조|고조 이연]]에게 선양 사실 수나라처럼 정권이 막장인 경우에는 굳이 번거롭게 선양을 거치지 않아도 큰 문제가 되지 않아야 정상이다. 하지만 당나라의 창업군주인 이연은 수나라 황실과 어느 정도 인척이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후자가 막장이어도 대놓고 빼앗기는 어려웠다. 양유는 [[수양제|양제]](원래 시호는 명제) [[양광]]의 손자였다. 양광의 아들 원덕태자 [[양소(수 추존)|양소]]의 아들로 이연이 난을 일으켜 수도 [[시안시|장안]]에 입성한 후 강남에 고립되어있던 양광은 태상황으로 올려지고 장안에 남아있던 양유가 황제로 옹립되었다가 실권을 장악한 이연에게 선양한 후 죽음을 당했다. 같은 시기 양유의 형제인 황태주 [[양동(수)|양동]]은 [[낙양]]에서 [[왕세충]]에게 실권을 빼앗겼다가 [[폐위]]당하고 살해당했다. 양씨 황가는 양광이 [[우문화급]]에게 시해당할 때 화급과 친근하던 양견의 아들 3남 양준의 장남 [[양호(수)|양호]](楊浩)를 제외하면 모두 피살당했으며, 이연 역시 양씨를 대부분 도륙했다. 양호는 우문화급에 의해 옹립되었다가 피살되었다. 그러나 양견의 5남 양량의 외아들 양호(楊顥), 돌궐의 가한과 정략결혼한 딸 의성공주, 양제의 딸 양씨는 살아남았다. 그 중 양씨는 이연의 4남 이원길의 부인이 되어 아들딸 잘 낳고 살다가 [[당태종|태종]] [[이세민]]이 [[현무문의 변]]을 일으켜 자신의 형 이건성과 아우 이원길을 죽일 때 남편과 다섯 아들들을 모두 잃어 과부가 되었다. 훗날 이세민의 첩이 되어 그의 14남 이명(李明)을 낳았는데 이세민은 장손황후를 잃고 나서 양씨를 황후로 삼으려고 했으나 제수였던 여자인지라 신하들의 반대로 실패하고, 대신 이명을 이원길의 양자로 삼아 제사를 지내게 했다. * [[애제(당)|당나라 애종]] 이축이 [[후량]]의 태조 [[주전충]]에게 선양 [[절도사]] 주전충은 환관의 난을 틈타 수도 장안에 들어가 궁궐을 청소할 최소인력으로 어린 환관 30여 명을 제외하고는 수백명의 환관들을 모두 죽였다. 실권을 잡은 뒤 얼마 되지 않아 장안에서 낙양으로 수도를 강제로 옮겼고, [[당소종|소종 이엽]]을 사람을 시켜 살해했는데, 온갖 연기를 다 하다 그의 9남 이축을 세우고 그 형제들부터 씨를 말린 이후 얼마 되지 않아 선양받고 그 역시 살해했다.[* 여담으로 주전충은 이와 동시에 당나라의 지배층을 아얘 제대로 도륙해버리는데 그 덕분이라고 해야 할 지 한나라때부터 이어지던 문벌귀족의 역사가 이 때에 완전히 끝장났다. 새로이 들어선 통일왕조인 송나라가 과거제를 통한 새로운 지배계층을 세우고 할 수 있던건 사실 이렇게 주전충이 구 왕조의 지배층을 제대로 아작낸 덕도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