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석호(후조) (문단 편집) === 공포정치와 폭정 === 석호는 궁궐 건축을 위해 폭풍우와 태풍이 부는 날에도 공사를 강행시켰고, [[후궁]]을 모집한다면서 서진의 세조 무제 [[사마염]]에 버금가는 혼인 금지령을 내려 백성들의 [[딸]]들을 뺏어갔으며 동진을 정벌한다면서 한 가구당 수레 하나와 소 한 마리를 공출했다. 또 석호는 [[도굴]]광이었는데 옛날 무덤들을 도굴해서 자신의 재산을 불렸다. 다만 [[진시황릉]]은 워낙 커서 구리 기둥 몇 개만 뽑아왔고, [[전국시대]] [[조간자]]의 무덤은 물에 잠겨 있었는데 특수 시설 때문에 아무리 물을 빼도 계속 잠겨서 포기했다. 또한 사람을 풀어놓은채 칼을 들고 때려잡는 놀이는 일상다반사였는데, 기록에 의하면 사람 죽이는 게 정말 재밌었던 모양이다. 어지간한 일들은 황태자인 석수에게 맡기면서도 '''[[사형]] 판결 및 집행'''만은 자신이 손수 관장했다. 물론 처형 자체는 어디까지나 '''공식적'''이었기에 생각보다 잔혹함은 덜했고 그나마도 시범 케이스로 처리해 횟수는 생각보다 적었지만, 어쨌든 이러한 공포정치 때문에 당시 분위기에 절망하여 [[자살]]하는 신하들이 많았다고 한다. 한편 석호의 아들들이 벌인 후계자 분쟁으로 여러 차례 잔혹한 숙청이 벌어졌다. 337년에는 태자 [[석수(후조)|석수]](石邃)가 석호를 죽이고 황제에 등극하고자 반란을 일으키려 하여 석수와 그의 자손 수십 명을 잔혹하게 살해했다.[* 석수는 아들이고, 그 자손들은 석호의 손자들이었다. 그럼에도 자신에게 도전했다는 이유로 아들과 손자들, 며느리 등 그 일가를 아주 잔인하게 죽였는데 나중에 똑같이 반란을 일으킨 석선도 도르레에 매달아 엄청난 고통을 준 다음 불태워 죽였다.] 348년에는 태자 [[석선]](石宣)이 석호가 총애하는 아들이었던 [[석도]](石韜)를 살해했는데, 이에 석호가 크게 분노하여 석선과 그의 자손 수십 명을 살해하고, 동궁 수비군 100,000명을 서쪽의 [[양주]](凉州)로 유배시켰다. 이 과정에서 석호가 총애하던 손자가 참혹하게 처형되는, 어처구니없는 [[모순]]이 발생했다. 당시 석호가 대노해서 석선 일족의 처형을 진두지휘하던 중, 처형을 기다리는 이들 중에 자신이 평소 귀여워하던 손자가 보였고, 그제야 그 손자가 석선의 아들임을 뒤늦게 생각해냈다. 석호는 황급히 손자의 처형을 멈추려고 했으나, 이번엔 평소에 저지른 공포정치가 발목을 잡았다. 석호의 잔인함을 두려워한 신하들은 처형을 중지했다가 또 나중에 빌미를 잡힐까 두려워하여 석호의 명령을 씹고 그대로 그 손자까지 처형했다. 이때 잔인하게 갈아서 죽여버렸다. 이에 충격을 받은 석호는 병에 걸려 쇠약해졌고,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이때 양주로 유배된 동궁 수비군, 즉 고력[* '''고력'''(高力)은 태자 석선이 힘센 자들을 선발해 동궁 호위로 삼은 정예부대이다.]을 중심으로 뭉친 100,000명이 반란을 일으켜 [[관중]]을 장악했다.('''고력의 난''') 반란군은 크게 위세를 떨쳐 한때 업까지 육박했으나, [[강족]]의 장군 [[요익중]](姚弋仲)[* 나중에 [[후진(오호십육국시대)|후진]](後秦)을 세운 태조 무소제 [[요장]]의 아버지로, 꽤나 대담하고 한 성깔했다. 한창 잔인함을 과시하던 시절의 석호에게도 면전에서 막말을 했고, 나이 먹어서는 아예 석호를 "너" 라고 불렀다.]이 이를 진압했다. 그러나 이 반란군의 기세에 위축된 석호는 더욱 쇠약해졌다. [[석세]](石世)가 태자로 책봉되었고, 석호는 후계자를 위해 여러 아들들을 요충지의 종실왕으로 삼으며 요직에 임명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