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석주명 (문단 편집) === 사망 === 광복 이후에도 나비 연구에 최선을 다했지만 [[6.25 전쟁]]의 참상을 피해가진 못했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했을 때 불려가서 조사받기도 했고,[* 그 전에 상술했듯이 부인이랑 이혼했는데 오히려 이것이 '나비에 미친 사람'이라는 좋은 증거가 돼서 딱히 의심받지 않고 풀려났다고 한다.] 타자기로 연구기록을 정리할 때는 간첩질로 의심받을까봐 삼복 더위에 이불을 뒤집어쓰기도 했다. [[1950년]] [[10월 6일]], [[미군]]의 [[폭격]]으로 전소된[* 그가 그 동안 채집한 나비 [[표본]] 75만 점이 있었다고 한다. 즉 평생의 연구 결과가 말 그대로 순식간에 잿더미가 된 것. '20세기의 큰 인물' 시리즈에서는 "과학관 지붕에 하얀색으로 십자를 그려놓으면 병원인 줄 알고 폭격을 안 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지만 미군의 폭격에 의해 국립과학관이 전소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절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석주명이 생각을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기보단 작가가 아쉬워서 넣은 장면으로 보인다.] 국립과학관의 재건을 논의하는 회의에 참석하러 가던 중 친구가 "[[고구마]]를 삶았으니 먹고 가라"고 붙잡는 통에 시간을 지체해서 허겁지겁 뛰어가다가 대낮에 술을 마시던 국군들 중 1명과 부딪혔는데 그들은 "저기 [[조선인민군]] 소좌가 간다."라며 석주명을 붙잡아 총으로 쏴 죽이고 "[[빨갱이]] 두목을 잡아 죽였다."라고 낄낄대며 시신을 가마니로 싸서 개천에 던졌다고 한다. 행인들 중에는 석주명을 알아본 사람들도 있었지만 술에 취한 채 총을 들고 설치는 자들의 기세에 눌려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죽기 직전 석주명은 "나는 [[공산당]]이 아니오. 나는 석주명이라 하는 나비 학자요!"라고 외쳤지만 술 취한 사내는 "[[평안도 사투리]]를 쓰니 북한군 장교다!", "나비나 인민군이나 다 같은 버러지들이지."라고 했다. 석주명의 시신은 군인들이 가마니에 싸서 강물에 던져 버렸으나 이후 회의가 끝나도록 돌아오지 않는 그를 찾던 가족과 친구들에 의해 수습되었다. 당시 한국 사회는 북한 괴뢰군이 아닌 걸 뻔히 알면서도 죄 없는 사람들을 북한 괴뢰군으로 몰아 죽여 출세하고 민간인들을 상대로 강간과 약탈을 일삼는가 하면 북한군이 거쳐간 마을 주민들을 "빨갱이들을 도왔다"라는 명목으로 고문하고 학살하는 등 썩어빠진 군경과 경찰, 청년단이 득세하던 시대였다. 석주명도 그 전쟁의 혼란스러운 사회에 휘말려 죽은 피해자였다. 당시 화가 [[이인성(화가)|이인성]]도 검문하던 경찰의 실수로 어이없게 사망했다. 그럼에도 이런 사건들을 고발하면 빨갱이로 매장당하기 십상이었다. 이 사건은 외신 보도까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석주명을 살해한 군인들의 정체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일설에 의하면 강경한 반공 성향을 가진 [[서북청년단]] 출신들로 구성된 국군 부대였을 것이라고 한다. 평안도 사투리라고 단번에 맞췄다는 것도 심증으로 볼 수 있다. 20세기에는 석주명 박사를 다룬 어린이 [[위인전]]이나 [[동화책]]에서 북한군이 살해했다, 전쟁통에 나비 연구만 한다고 암살당했다, 폭격이나 사고로 사망했다 등 사실을 왜곡하는 경우가 많았다.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석주명 이야기는 그의 사인을 사실대로 알려주면 어린 학생들이 충격을 받을까 봐 그냥 일생을 나비 연구에 바쳤다고만 쓰기도 한다. [[2001년]] 웅진출판사에서 출간한 '만화로 만나는 20세기 큰 인물'이라는 위인전에서는 제대로 다뤘다. 국군이 석주명 박사를 사살한 후 시체에 침까지 뱉고 거적때기로 대충 덮어둔 걸로 나온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