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석주명 (문단 편집) == 생애 == [[1908년]] [[10월 17일]][* 예전에는 1908년 11월 13일이라고 적혀있었지만 '''출생일에 오류가 있었음이 밝혀졌다.''' 누이동생이었던 석주선이 [[1968년]] 11월에 발간한 석주명의 유고집 '제주도 수필'을 발간하면서 발문에 '''오빠는 음(陰) 9월 23일(1968년 11월 13일)이 바로 오빠의 회갑이어요.'''라고 서술한 것을 염두에 두고서 다른 작가들이 그의 생년월일을 1908년 11월 13일로 오해한 데서부터 비롯되었다. 석주명의 회갑일인 1968년 음력 9월 23일은 양력 11월 13일이지만 그가 태어난 1908년 음력 9월 23일은 양력 10월 17일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잘못 알려져왔던 석주명의 생년월일은 1908년 10월 17일로 정정되었다.] [[평안남도]] [[평양부]] 이문리(里門里)에서 태어났으며 광주 (廣州) 석씨 평양파의 30대손인 석승서(石承瑞)와 전주 김씨 김의식(金毅植)의 3남 1녀 중 2남으로 자라났다. [[송도고등학교|송도고등보통학교]], [[일본]] [[가고시마]]고등농림학교(鹿児島高等農林学校)[* 현재 [[가고시마대학]](鹿児島大学) 농학부]를 졸업하였다. 집이 [[평양부]]에서 대단히 큰 요릿집을 한 터라[* 종업원이 100명에 달했다.] 어려서는 매우 유복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치하라서 다른 학생들과 같이 연극을 한 게 독립운동을 부추겼다며 관공서에 불려가 혼이 나거나, 아버지가 요릿집을 하면서 독립군에게 자금을 보태다 들켜서 문초를 당한지라 애국심이 커졌다. 이후 고등학교에서 [[덴마크]]를 비옥하게 만든 [[엔리코 달가스]]에 대해 배우자 역시 농업을 연구하여 조선의 농토를 개선하려고 했지만, 막상 대학에 들어가서는 농업에 흥미를 잃었다가 (아마도 농작물의 병충해에 관해) 곤충에 관심을 가진 것이 계기가 되어 곤충학으로 넘어간다. 그는 총 13년 동안이나 중학교 교사로 있었는데 처음에는 [[함흥부]]의 영생고보 생물교사로 부임하여 2년간 재직하였다가 나중에는 그의 스승인 [[원홍구]][* (1888~1970) 평안북도 삭주 출신으로 대한민국 최초의 식물학자 겸 조류학자로 석주명이 송도고보에 재학중이던 당시에 그의 스승이기도 하였으며 나중에 석주명이 가고시마 고등농림학교에 진학하면서 선후배 관계가 되었다. 이 때문에 석주명은 원홍구를 선배라고 불렀다. 또한 그의 막내아들은 경희대학교 명예교수 겸 한국조수 보호협회 회장, 국제 환경과학 연구소 이사장, 국제 조류학회 (IOC) 이사이기도 한 [[원병오]] 교수로, 2020년 4월 9일 사망했다.]를 따라서 개성 송도고보에 재직하면서 전국 각지로 나비 채집여행을 떠났다. 나중에 그는 영국 왕립 아시아 협회의 의뢰를 받아서 한국의 나비들의 동종이명 총 목록을 작성한 조선산 접류 목록 (A Synonymic List of Butterflies of Korea)을 1940년에 출간함으로써 전 세계적인 나비학자로 우뚝 서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일본의 곤충학자들이 게으르게 분류하며 종류만 '''921종'''으로 늘려놓은 나비를 독자적으로 연구하여[* 전국을 돌아다니며 [[나비]] '''75만여 마리'''를 수집하여 비교하였다. 당시 학계는 신종 만들기에 급급해 약간 특징이 다르면 무턱대고 새로운 종으로 분류하곤 했는데 석주명이 바로잡은 것. 식물학 쪽에서도 [[나카이 다케노신]]이 속, 종, 아종을 대책없이 늘리는 짓을 하다가 학계에서 엄청나게 두들겨맞았다.] 정확하게 '''248종'''으로 분류하였다. 특이한 [[나비]]를 보면 그걸 잡으러 몇 시간이나 쫓아 산과 들을 헤매기도 했다고 한다. [[배추흰나비]]를 '''16만 마리'''나 사육하며 개체변이를 연구하기도 했고, 국내 대부분의 나비 이름은 그가 지어주었다. 특히 [[지리산]]을 헤매며 지리산팔랑나비를 발견한 사례는 유명하다. 동시대에 교류한 학자로는 [[조복성]] 선생이 있으며, 그가 발견한 나비의 종류와 이름은 '조선산 나비목록' 등에 저술되어 있다. 또한 그는 '조선적인 생물학'을 주창하면서 당대의 여러 분야의 학자들과 함께 국학 운동을 전개하여 펼쳤던 민족주의자이기도 하면서 학문적인 성과물은 세계의 학자들로부터 객관적으로 평가받아야 한다는 것을 인정한 국제주의자이기도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