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석가모니 (문단 편집) === 석가족 === >Adicca nama gottena, Sakiwa nama jatiya, tamha kula pabbajito'mhi raja na kame abhipatthayam. >가계는 아딧짜(Adicca)이며, 가문은 사끼야(Sakiya)이니, 내가 그러한 태생에서 출가한 것은 기쁨을 추구하고 갈망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났을 때의 일입니다. >----- >[[숫타니파타]] >gotamo sakyaputto sakyakulā pabbajito kosalesu cārikaṃ caramāno mahatā bhikkhusaṅghena saddhiṃ pañcamattehi bhikkhusatehi icchānaṅgalaṃ anuppatto icchānaṅgale viharati icchānaṅgalavanasaṇḍe. >사문 꼬따마는 사까의 후예인데 사까 가문으로부터 출가하여 500명 정도의 많은 비구 승가와 함께 꼬살라를 유행하시다가 잇차낭깔라에 도착하여 잇차낭깔라의 깊은 숲 속에 머물러 계십니다. >----- >《디가 니까야》 암밧타 경 스리랑카에 전해지는 역사서 마하왕사(대사)와 같은 연대기에는 세계 최초의 군주인 마하삼마따(Mahāsammata)[* '위대한 선출자'라는 뜻이다.]가 석가모니 부처가 속한 석가(사꺄) 왕조의 창시자라고 적고 있지만, 석가 왕조 즉 석가족 그리고 콜리야족의 직계 시조는 마하삼마따 왕조를 계승한 옥까까(okkāka)라고 알려져 있다. 《디가 니까야》 암밧타 경[* 한역 불경인 근본설일체유부비나약사에 관련 내용이 한역되어 있다.]은 석가모니 부처가 석가족을 "비천한 주제에 바라문들을 존중하지도 숭상하지도 않는다"고 세 번에 걸쳐 욕하는 암밧타 바라문 학도[* māṇava. 청년, 어린이를 뜻하며 특히 초기경들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바라문 가문 출신으로 아직 결혼하지 않고 스승 밑에서 학문과 기술을 연마하는 사람을 칭한다. 당시 인도의 전통 바라문 지식계급의 청년들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래서 다른 초기경들에서도 상당수 바라문 학도들이 본경에서처럼 베다와 바라문의 권위에 대해서 석가모니와 격론을 벌이고 있다.]에게 석가족의 연원을 말해주며 그를 깨우쳐주는 장면이 있다.[* 암밧타 경의 주인공인 암밧타 브라만 학도는 스승 뽁까라사띠 바라문의 명령으로 석가모니 부처의 가르침을 듣고 확인하러 가서 석가모니 부처와의 대화에서 "브라만 밑으로 다른 카스트야 별 볼 것도 없죠"라는 투로 은연중 카스트에 대한 자부심을 비치다 "너는 아직 너의 생을 완성하지 못한 것 같다"는 석가모니의 일침에 과거 자신이 석가족으로부터 받은 모욕을 기억하며 석가모니 앞에서 "고따마 존자여, 사꺄 출신들은 거칩니다. 고따마 존자여, 사꺄 출신들은 성미가 급합니다. 고따마 존자여, 사꺄 출신들은 포악합니다. 아주 비천하면서도 바라문들을 존경하지 않고, 바라문들을 존중하지도 않고, 바라문들을 숭상하지도 않고, 바라문들을 예배하지도 않고, 바라문들을 공경하지도 않습니다. 고따마 존자여, 사꺄들이 비천하고 비천한 출신이면서도 바라문들을 존경하지 않고, 바라문들을 존중하지도 않고, 바라문들을 숭상하지도 않고, 바라문들을 예배하지도 않고, 바라문들을 공경하지도 않는 것은 적당하지 않고 어울리지 않습니다.“라고 비난하다가 도리어 석가모니 부처로부터 석가족이 어떤 종족이며, 암밧타의 조상이 실은 석가족의 시조 옥까까 왕이 데리고 있던 여자 노비의 후손이었음을 일깨워주었다가, 이를 알고 다른 바라문들이 암밧타를 비난하자 "그의 조상은 노비이긴 했어도 훌륭한 선인이었다"고 추켜세워 신분을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지 말라고 설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Sakyā kho pana, ambaṭṭha, rājānaṃ okkākaṃ pitāmahaṃ dahanti. >암밧타여, 사꺄들은 옥까까 왕을 선조로 여긴다. >----- >《디가 니까야》 암밧타 경 산스크리트어 문헌 뿌라나에서는 익슈와꾸(Ikṣvāku)라 불리며[* 뿌라나 문헌에서는 옥까까를 최초의 인간인 마누의 열 명의 아들 가운데 첫째라고 하고, 마하바라따에는 마누의 5대 손이라고도 하는데, 팔리어 문헌의 옥까까 왕 이야기가 산스크리트어 뿌라나 문헌보다 더 오래되었고 그것이 산스크리트어 문헌에 흡수된 것이라고도 한다.] 한역하면 감자왕(甘蔗王)이라고 불리는 그는 아리야 족의 태양계 씨족 첫번째 왕이었으며 처음에 밧따라는 여인과의 사이에서 4남 5녀[* 아들의 이름은 옥까무카, 까라깐다, 핫띠니까, 시니뿌라이고, 다섯 딸은 각기 삐야, 숩삐야, 아난다, 위지따, 위지따세나이다. 한역 불경에는 네 명의 아들의 이름만 소개되었고, 모두 표기도 발음도 다르다.]를 두었고, 이후 다른 여인과의 사이에서 잔뚜라는 아들을 낳았는데, 옥까까 왕은 잔뚜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로 결정했고 이에 전처 밧따 소생의 자녀 중 맏이인 옥까무카(Okkamukha)가 나머지 동생들을 데리고 궁을 떠나 북쪽으로 히말라야 산기슭으로 가, 훗날 카필라바스투[* 팔리어는 까삘라왓투(Kapilavatthu)이다.]라고 불리게 되는 까삘라(Kapila)로 와서, 이곳에서 까삘라 브라만의 도움으로 도시를 세우게 된다. 이들은 혈통을 보존하고자 장녀 삐야(Piya)를 어머니로 모시고 나머지 네 명의 왕자와 네 명의 공주가 서로 결혼하는 것으로 가족을 이룬다. 그의 자녀들이 도시를 세우고 나라를 이루었다는 소식을 들은 옥까까 왕이 "참으로 장하구나. 실로 능력있는 내 아들들이다!"라고 외쳤는데, 이때 옥까까 왕이 감탄하며 외친 잘했다(Sakya/sakka)라는 단어가 그대로 석가(사꺄)라는 종족의 이름이 된다. 옥까까 왕의 아들들은 카필라바스투 외에도 데와다하(천비성)라는 도시를 더 세우게 되는데, 이후 카필라바스투의 왕들은 카필라바스투 사캬, 데와다하의 왕들은 데와다하 사캬 또는 콜리야로 불린다. 이 콜리야가 석가모니 부처의 출가 전의 아내 야쇼다라의 친정이다.[* 석가족과 콜리야족이 마냥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니었는데, 농사 짓는데 논에 댈 물을 두고 싸울 때는 서로를 '문둥이', '개돼지'라 부르며 얕잡아보기도 했다.] 초대 옥까무카 이후 석가모니 부처의 친할아버지인 아들 시하하누(Sihahanu)[* 한역하면 사자협왕(師子頰王)이다. 경률이상에는 시휴라(尸休羅)라고 했다.]에 이르기까지 카필라 국의 계보에 대해서는 불경마다 언급이 조금씩 차이가 나는데, 불본행집경에는 옥까무카를 따라왔던 형제 가운데 막내였던 니구라(尼拘羅)[* 한역하면 별성(別成)이다.]가 카필라 국의 왕이 되어 구로(拘盧) - 구구로(瞿拘盧) - 사자협(師子頰)으로 이어지고, 경률이상에는 울마(鬱摩)의 네 아들 가운데 막내인 니루왕(尼樓王)이 오두라(烏頭羅)를 낳았는데 오두라가 석가모니 부처의 고조할아버지이며, 오두라 - 구두라(瞿頭羅) - 시휴라(시하하누) - 정반(숫도다나)로 이어진다고 했다. 기세경은 감자종(甘蔗種) 왕의 자손들이 101명을 거쳐 마지막 불선장(不善長)의 대에 이르러 네 명의 아들[* 첫째는 이름이 우모거(優牟佉)이고, 둘째는 금색(金色)이고, 셋째는 사백상(似白象)이고, 넷째는 족구(足瞿)이다.] 막내아들 족구왕부터 그 아들 천성(天城) - 우성(牛城) 이후 7만 7천명의 왕을 거쳐 마지막 왕의 이름은 광거왕(廣車王) 이후 다시 별거왕(別車王) - 견거왕(堅車王) - 주거왕(住車王) - 십거왕(十車王) - 백거왕(白車王) - 구십거왕(九十車王) - 잡색거왕(雜色車王) - 지거왕(智車王) - 광궁왕(廣弓王) - 다궁왕(多弓王) - 겸궁왕(兼弓王) - 주궁왕(住弓王) - 십궁왕(十弓王) - 백궁왕(百弓王) - 구십궁왕(九十弓王) - 잡색궁왕(雜色弓王) - 지궁왕(智弓王) - 사자협(師子頰)[* 지세경에는 사자왕에게 사자족(師子足)이라는 동생이 있었다고 했다.] - 정반(숫도다나)에 이르는 장황한 계보가 이어져 있다. 불본행집경이나 경률이상, 지세경 모두 감자왕의 아들들이 카필라바스투라는 도시를 건설한 뒤에 막내아들에 의해 왕계가 부자상속으로 이어졌다는 것, 그리고 석가모니 부처의 직계 삼대 조상의 경우 사자협왕(시하하누) - 정반왕(숫도다나)으로 이어진다는 계보가 서로 일치한다. 자야세나 왕에 이르러 아들 시하하누(Sihahanu)가 자야세나의 뒤를 이어 카필라 국의 왕이 되었고, 그는 데와다하의 왕 안자나 왕의 여동생 깟짜나와 결혼했다. 둘 사이에 태어난 5남 2녀[* 숫도다나(정반), 도또다나(곡반), 삭코다나, 숙까다나(백반), 아미또다나(감로반). 두 딸의 이름은 아미따(감로)와 빠미따이다. 다만 북전(산스크리트어로 전승된 문헌) 불경인 기세경 권제10이나 한역 불경인 불본행집경에는 사자협왕의 자녀가 4남 1녀였다고 적어서 어느 쪽이 실제 역사적 사실인지 알 수 없다.] 가운데 맏아들이 바로 싯다르타의 아버지 [[슈도다나]]이고, 슈도다나 역시 데와다나 국 출신인 [[마야부인]]과 그 누이동생인 [[마하파자파티]]와 결혼했다.[* 마야 부인과 마하파자파티의 어머니 야소다라는 깟짜나의 오빠인 안자나 왕과 결혼했다. 근친혼이자 일종의 겹사돈. 그리고 둘 사이에 마야 부인과 마하파자파티 외에도 숩빠붓다와 단다빠니가 있었다.] 석가모니 부처의 아내 [[야쇼다라]] 역시 데와다하 출신으로, 숫도다나의 여동생인 아미따(감로)가 마야 부인의 오빠이기도 한 숩빠붓다와 결혼해서 낳은 딸이다. 그리고 숩빠붓다의 아들이 [[데바닷타]]이다.[* 다만 북전(산스크리트어) 기세경에는 데바닷타는 석가모니 부처의 삼촌인 아미또다나(감로반)의 아들로 아난다와는 친형제간이라고 되어 있다. 스리랑카의 연대기인 디파밤사(도사) 등 남전(팔리어) 문헌에는 아미또다나의 아들이 마하나마와 아누룻다(아나율)라고 했고, 북전 기세경과 마찬가지로 아난다가 아미또다나의 아들이라고도 한다. 한편 팔리어 전승에서는 숫도다나와 아미또다나를 제외하고 석가모니 부처의 다른 삼촌들은 자녀가 없었다고 했지만, 마하와스뚜(대사)에서는 슈끄로다나(숙까다나)의 아들이 아난다이고 데바닷타와 우빠다나의 형이라고 적고 있다.] 북전 기세경에는 숫도다나 왕의 동생으로 석가모니 부처의 삼촌인 숙까다나(백반)에게 제사와 난제가 두 아들이 있었으며, 도또다나(곡반)에게는 아니루타와 난제리가라는 아들이 있었다고 적었다. 아버지 슈도다나가 죽자, 새어머니 마하파자파티와 아내 야소다라 역시 출가하여 [[비구니]]가 된다.[* 한국의 불교 종파 가운데 유일한 비구니 종파인 [[대한불교보문종]]은 마하파자파티를 종조(宗祖)로 삼고 있다.] 사촌 형제로 [[아난다]]와 아나율, 이복동생으로 [[난다]]가 있는데, 이들 셋 다 석가모니를 따라서 출가했다.[* 그중에서도 난다는 미모로 유명했던 공주와 약혼식을 치르려는 중에 출가했으며, 약혼녀도 훗날 출가해 두 사람 모두 수행의 경지가 매우 높았다고 한다.] 석가모니를 일생의 원수로 삼고 그를 해하려 했다 알려진 [[데바닷타]] 역시 석가모니 붓다의 사촌이다. 이렇게 왕족 중 뛰어난 남자는 대부분 석가모니를 따라 출가하는 사태가 발생하자, 슈도다나 왕이 [[동열이도 없고, 종범이도 없고|아들에게 왕위를 이을 후계자 문제를 제기]], 이후 승단에는 부모님을 모시고 집안을 이끌 [[장남]]은 출가할 수 없으며, 출가 시엔 부모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규칙을 새로 제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슈도다나 왕의 후계자가 될 만한 사람들은 다 출가했기 때문에 슈도다나 왕 사후 샤카 족은 석가모니 당대에 인접한 강국 코살라(사위국)[* 불교의 주요 후원자였던 파세나디(바사닉) 왕이 아들 비루타카(毘琉璃) 왕자의 반란으로 물러난 게 결정적인 침공계기가 되었다.]의 침공으로 멸망하나, 석가모니 이외에도 출가한 샤카 족이 몇몇 있었기에 샤카 족이 아예 멸절되는 것은 피할 수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