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석가모니 (문단 편집) === 석가모니는 실존했는가 === 결론부터 말하자면 '''실존 인물이 맞다.''' 다만 일생에 워낙 신비한 전설이 많이 섞여 있는지라 한 때 일부 학자들은 그 실존을 의심하기도 했다. 석가모니뿐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역시 한때 계몽주의자들로부터 실존 여부를 의심받은 적이 있었다. 일단 석가모니 부처라는 인물이 태어나 활약하고 생을 떠난 것은 기원전 6세기에서 5세기의 일인데, 이 시기에 지구상에서 '기록'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서쪽의 그리스 문명과 동쪽의 중화 문명이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인도의 역사만 하더라도 해당 시기의 역사는 거의 신화와 역사가 뒤섞여 있고, 그나마도 [[헤로도토스]]가 인도에 대해 직접 간 것은 아니고 전해 들은 것을 자신의 저서인 역사에 기록했다. 인도의 역사 관념은 서구 문명과도 다르고, 또 동방 문명과도 달랐다. 인도에서 역사 서술은 크게 1) 브라만교–힌두교 전통과 2) 불교 전통, 3)자이나교 전통에서 각각 다른 방식으로 발전하였다. 우선 브라만–힌두 전통의 역사 기록은 고대의 이티하사(Itihasa)–푸라나(Purana) 전통을 그 기원으로 하며, 이티하사–푸라나 전통은 기원전 첫 번째 천년기부터 기원후 7세기 무렵까지 브라만–힌두 전통에서 지배적인 역사 기록 양식이었다. 다만 '이티하사'[* 산스크리트어로 '과거에 그러하였던 것' 즉 대략 역사를 뜻하는 단어이기는 하다.]는 원래 역사 기록 그 자체를 위해 남긴 것이 아니라 '''베다 성전의 종교적 의미를 명료화하기 위해''' 즉 종교 경전의 교리를 뒷받침하고 보조할 참고 자료의 성격으로 작성된 것이었다. [* 원래 역사 기록을 목적으로 남긴 게 아니었는데 후대에 역사 기록으로써 쓰이게 된 것은 중국의 [[춘추좌씨전]]과도 비슷하다.] 이티하사 문헌에는 준역사적인 서사시 《[[마하바라타]]》, 허구적 서사시 《[[라마야나]]》, 그리고 브라만–힌두 전통에서 우주 창조 설화 등과 함께 신, 반신, 전설적 영웅, 그리고 어느 정도 역사적인 군주와 성인의 행적이 설화적 필체로 기록된 '푸라나'[* 오래된 것이라는 뜻이다.]가 있다. 푸라나는 베다 시대 이래 구전으로 전승되었고 기원후 [[굽타 제국]] 시대를 전후로 하여 문헌의 형태로 대거 작성되기 시작하였으며, 이 푸라나에서 역사적인 사실을 추출해내는 방식으로 고대사를 연구할 수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흥미롭게도, 굽타 제국의 멸망 이후 약 7세기부터, 이티하사–푸라나 전통을 출발점으로 힌두교 문헌에서 보다 전기적, 연대기적인 서술 양식들이 나타나고 점차 종교적 내지 설화적인 것들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하는데, 새롭게 등장한 이러한 서술 양식으로 차리타(carita)[* 특정 인물에 대한 전기 및 행전. 차리타 문헌의 예로는 가령 7세기에 작성된 바르다나 왕조 하르샤 왕의 전기 《하르샤차리타》(Harṣacarita) 등을 들 수 있다. 후술할 석가모니 부처의 행적을 기록한 서사시 불소행찬도 원래 산스크리트어 제목은 '붓다차리타'이다.], 프라샤스티(praśasti)[* 특정 군주에 대한 찬가], 왕샤왈리(vaṃśāvalī)[* 연대기. 왕샤왈리 문헌으로는 12세기 초의 《제왕들의 강》(Rājataraṅgiṇī)을 꼽을 수 있다.] 등이 있고, 여러 문서와 비문에 남아 있는 이들 문헌은 이슬람 도래 이전까지 새로운 힌두 전통의 사료가 된다. 자이나교 전통은 상대적으로 브라만–힌두 전통과 불교 전통에 비해 문헌의 수가 적은 편이지만, 기원후 두 번째 천년기 초부터 프라반다(prabandha)라는 독자적인 전기 기록 양식이 자이나교 전통에서 발달하였고, 14세기 초에 집대성된 《프라반다친타마니》(Prabandha-cintāmaṇi)가 좋은 사례이다. 브라만–힌두 전통에서 역사 기록이 종교 문헌에서 서서히 분리 독립해 나간 것과 달리, 불교 전통에서는 상대적으로 더 이른 시기부터 명확한 역사적 목적을 갖고 나름대로 내용의 진실성과 유효성을 검증하며 남긴 다양한 전기와 연대기 문헌이 존재한다. 불경 속에서 이미 석가모니 부처 당대 인도의 모습이나 역사적 동향을 드문드문 추론할 수 있는 부분들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불교 텍스트를 정리하고 집대성하는 작업은 고대부터 계속해서 이루어졌으며, 여기에서 불교적 형태의 역사 의식을 관찰할 수 있다. '''불교 전통의 연대기에서는 특히 사건의 진실성과 인과 관계에 따른 서술이 브라만–힌두 전통에서보다 더욱 강조되었다.''' [[아누라다푸라 왕국]]에서부터 편찬된 [[스리랑카]]의 연대기 마하밤사(Mahāvaṃsa)[* 한문으로 번역하면 대사(大史) 즉 '위대한 역사'이다.]는 이러한 불교 연대기의 훌륭한 사례다. 마하밤사는 석가모니 부처의 스리랑카 섬을 방문해 당시 스리랑카 섬에 거주하던 야카족과 나가족을 그의 위신력으로 제압하거나 몰아내고 스리랑카가 훗날 중요한 불교 중심지가 될 것이라는 수기를 전달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석가모니 부처가 스리랑카에 왔는지는 팔리어 율장이나 다른 초기 불교 문헌에서는 언급되지 않는다. 석가모니 부처의 형상을 처음으로 '불상'으로 만들기 시작했던 기원전 1세기경에 석가모니 부처라는 한 개인의 일대기도 하나의 서사시(차리타)로 편집 정리되었는데, 그것이 《붓다차리타》(Buddhacarita)이고, 4세기경에 담무참에 의해 한역되어 불소행찬(佛所行讃)이라고도 불린다. 《붓다차리타》는 석가 왕족의 계보(系譜)와 석가모니 부처의 탄생에서부터 입멸(入滅)에 이르는 장중한 내용을 기술하면서도 역사적 사실을 계통적으로 너무 과장되거나 조잡하게 서술하지 않으면서도 상세하게 기술한다. 때문에 석가모니 부처의 생애 속에 불교의 교의가 교묘하게 녹아 있고, 생전의 석가모니 부처를 실제로 만난 듯한 생생한 묘사로 석가모니 부처가 걸었던 고뇌의 길과 '스스로 깨달은 자'로서의 일깨움이 다른 불전문학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독자들에게 감동을 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붓다차리타를 편집한 인물은 기원전 1세기 용수와 더불어 일출논사로 꼽혔던 인도의 논사 아슈바고샤[* 한자로는 마명(馬鳴)으로 번역되며, '마명보살'이라고도 불린다.]인데, 최근 중앙 아시아에서 마명의 작품이라고 생각되는 희곡 《사리불극(舍利弗劇)》외에 두 작품이 발견되기도 했다고 한다. >(브라흐미 문자)𑀤𑁂𑀯𑀸𑀦𑀁𑀧𑀺𑀬𑁂𑀦 𑀧𑀺𑀬𑀤𑀲𑀺𑀦 𑀮𑀸𑀚𑀺𑀦𑀯𑀻𑀲𑀢𑀺𑀯𑀲𑀸𑀪𑀺𑀲𑀺𑀢𑁂𑀦 𑀅𑀢𑀦𑀆𑀕𑀸𑀘 𑀫𑀳𑀻𑀬𑀺𑀢𑁂 𑀳𑀺𑀤'''𑀩𑀼𑀥𑁂'''𑀚𑀸𑀢 '''𑀲𑀓𑁆𑀬𑀫𑀼𑀦𑀺'''𑀢𑀺 >(발음)Devānaṃpiyena Piyadasina lājina vīsati-vasābhisitena atana āgācha mahīyite hida '''Budhe''' jāte '''Sakyamuni''' ti >𑀲𑀺𑀮𑀸𑀯𑀺𑀕𑀥𑀪𑀺𑀘𑀸𑀓𑀸𑀳𑀸𑀧𑀺𑀢 𑀲𑀺𑀮𑀸𑀣𑀪𑁂𑀘 𑀉𑀲𑀧𑀸𑀧𑀺𑀢𑁂 𑀳𑀺𑀤𑀪𑀕𑀯𑀁𑀚𑀸𑀢𑀢𑀺 '''𑀮𑀼𑀁𑀫𑀺𑀦𑀺'''𑀕𑀸𑀫𑁂 𑀉𑀩𑀮𑀺𑀓𑁂𑀓𑀝𑁂 𑀅𑀞𑀪𑀸𑀕𑀺𑀬𑁂𑀘 >silā vigaḍabhī chā kālāpita silā-thabhe cha usapāpite hida Bhagavaṃ jāte ti '''Luṃmini'''-gāme ubalike kaṭe aṭha-bhāgiye cha >----- >(해석) 자비로운 삐야다시 왕은[* 데바남피예나 피야다시나 라지나. 아소카 대왕은 자신을 지칭할 때에 데바남피야 피야다시 아소카 라자(Devanampiya Piyadasi Asokaraja) 이렇게 불렀다. '데바남피야'는 '신들의 신임받는 종'이라는 뜻이다.] 왕위에 오른지 20년에 이곳을 방문하고 참배하였다. 왜냐하면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이곳에서 탄생하셨기 때문이다. 나는 이곳에 돌담을 쌓고 돌기둥을 세웠다. 부처님께서 여기, 룸비니 마을에서 태어나셨기 때문에 이 마을에 세금을 면제하였고 단지 생산의 1/8만 내도록 하였다. >----- >룸비니 돌기둥 담마 칙령[* 아소카가 남긴 칙령들 가운데 작은 돌기둥 담마 칙령에 속한다.] 그리고 [[1895년]]에 독일의 고고학자 포이러(Alois Anton Feuhrer)가 [[네팔]] 남부 지역을 탐험하다가 우연히 [[아소카 대왕]](재위 기원전 268-232)의 석주를 발견하였고, 석주에 새겨진 문장을 해독했는데, 거기에 인도의 [[아소카 대왕]]이 석가모니불의 탄생지인 이곳에 와서 참배하고 석주를 세웠다는 기록이 남아 있었다. 아소카 대왕은 석가모니 부처 입멸 이후 300여 년 뒤의 인물이다. 아소카 대왕의 석주는 아소카 대왕이 불교에 귀의하고 적극적으로 불교의 교리를 실천하고 나아가 그것을 주변국에 전파하기 위해 애썼음을 문헌으로 증언하고 있었고, 나아가 석가모니 부처라는 인물의 존재와 그의 존재를 추앙하며 전하는 집단 즉 '승가'가 이미 아소카 대왕의 치세에 존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아소카 대왕 석주는 그들 승가가 추앙하던 성자, 즉 '''붓다(𑀩𑀼𑀥𑁂)''' '''석가모니(𑀲𑀓𑁆𑀬𑀫𑀼𑀦𑀺)'''의 이름을 언급한 가장 오래된 문헌 자료이기도 했다. 이로써 석가모니 부처가 역사상의 실존 인물임과, [[마야데비 사원|룸비니 동산]]의 위치도 확정되었다.[* 지금도 룸비니 성지에 가면 아소카 대왕의 석주를 볼 수 있다.] 게다가 석가모니 부처의 [[진신사리]]로 여겨지는 유물도 당대의 문자와 함께 발견되기도 하였는데( [[https://www.youtube.com/watch?v=gEt0kVc3hFo|석가모니의 사리용기]]) 이게 정말 석가모니 부처의 진신사리 유물이라면 그 가치가 어마어마하겠지만 확정된 것은 아니다. 일단 일본의 불교학자 [[나카무라 하지메]]는 석가모니 부처의 진신사리임을 확신한다고 밝혔지만. 석가모니 부처라는 한 개인의 일대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그린 성경처럼 태어나고 살고 나이 들어 죽기까지의 일대기로써 정리되지 않은 것은 '''초기 불교에서 석가모니 부처라는 한 개인을 신격화하지 않았던''' 것과도 관련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초기 불교에서 석가모니 부처는 초월적인 신이라기보다는 [[초월자|한 인간이되 지극한 깨달음을 얻어 초인적인 존재]]가 되었고 동시에 모든 인간적인 것을 초월한 존재로 여겨졌기에 석가모니 부처 한 개인보다는 석가모니 부처가 설한 법문과 계율을 중시했고 경전 결집에 있어서도 석가모니 부처의 가르침(법문과 계율)이 중심이었지 석가모니 부처라는 한 개인의 생애는 중심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석가모니 부처가 초월적인 인간이라는 인식을 넘어 또한 신적인 존재로써 신격화되기 시작하면서 석가모니 부처라는 한 개인의 '생애'나 그가 생애에서 보인 여느 인간과는 다른 '이적'들에 초점이 맞춰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Include(틀:문서 가져옴, title=인도/역사, version=240)]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