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희 (문단 편집) === 후기 === ||<-3> '''여요전쟁 이후 서희의 관직''' || || '''삼사''' ||태보(太保) ||태보, 태부, 태사 순으로 태사가 제일 높다. || ||<|2> '''직위''' ||평장사(平章事) ||내사시랑에서 바뀐 직명이다. || ||내사령(內史令) ||내사령은 명목상 내사성 최고의 명예 직위다. 고위 왕족, 공신들에게 임명했다. [[중서령]]의 다른 이름이다. || >자꾸 서희를 우리의 대표적인 [[외교관]]으로 이야기 하는데, 사실은 '''외교관이 아니라 국정 설계자'''였어요. 이건 다른 거에요. 앞으로 있을 [[여요전쟁|모든 (거란과의)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공을 세운 사람은 서희에요. '''거란 전쟁을 대비해서 우리가 싸울 수 있는 전략적 토대를 만들어 놓은 것'''. 그래서 위대한 국정 지휘자지, 외교관이라는 특정 지위를 내밀 게 아니라고요. >---- >[[임용한]]. [[토크멘터리 전쟁사]] 66부 고려 vs 거란 전쟁 1편. [[https://www.youtube.com/watch?v=3INbKztVngE&list=PLMVkaEHUCNifZmtAbntsh2QWizZosBhsg|##]] 서희는 유명한 담판으로만 대중적으로 알려져서 '최고의 외교관' 정도로 흔히 알려져 있지만 사실 외교에만 뛰어났던 인물은 아니었다. 한 번은 [[성종(고려)|성종]]과 함께 [[해주시|해주]]에 갔는데 성종이 서희가 묵는 장막에 들어오려고 하자 서희는 "신의 장막은 존귀하신 왕께서 들어오실만한 장소가 아닙니다"라고 거절했고 또 성종이 [[술]]을 가져오라고 명하자 서희는 "신이 가진 술은 임금께 드릴만한 술이 못 됩니다"라며 술을 가져가지 않았다. 결국 성종이 직접 어주를 가져다가 천막 밖에서 서희와 술을 마셔야 했다. 공빈령 벼슬에 있던 정우현(鄭又玄)이라는 사람이 [[정치]]에 관한 7가지 문제에 대해 논평한 글을 성종에게 올렸는데 글이 심기에 거슬렸는지 성종은 재상들을 모아 "이거 건방시러워서 손 좀 보고 싶은데 어때?"라고 물었고 재상들 역시 왕의 의견에 찬성했는데 서희는 홀로 이렇게 말했다. >옛날에는 간관의 간언이 직분상 제한이 없었는데 어찌 처벌하겠습니까? '''저는 졸렬한 자질을 가지고 부당하게도 재상의 지위에 앉아서 직책을 다하지 못했으므로 관직이 낮은 사람들로 하여금 정치·교화에 대한 잘못을 논하게 하였으니 모두가 저의 잘못입니다.''' 정우현의 견해는 실로 적절하니 마땅히 칭찬할 만한 일입니다. >---- >《고려사》 제94권 〈열전 7 : 서희〉 성종은 이 말을 옳게 여기고 정우현을 오히려 감찰어사로 등용했으며 정신을 차리게 해준 서희에게도 후한 상을 내렸다. 서희의 원칙을 중시하는 태도와 책임 의식을 보여주는 일화. 국제 정세 파악 능력과 전략적 안목의 소유자였던 데 더해 이런 원칙을 중시하는 태도와 책임 의식까지 갖춘 강직한 [[관료]]였기에 아무도 지원하지 않는 강화 사신으로 담판하러 갔고 거란군 진지에서도 담대한 행동과 함께 협상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회담 이후 이 지역을 요새화하는데 온 힘을 기울이느라 너무 무리한 탓인지 성종 15년부터 자리에 눕게 되었고 개국사(開國寺)라는 [[절(불교)|절]]에서 치료를 받게 되었다. 성종은 직접 문병을 가고 서희의 쾌유를 위해 지극정성을 다했지만 997년에 되려 성종이 먼저 승하했고 서희는 성종이 죽은 이듬해인 998년에 57세로 [[사망]]했다. 아들인 [[서눌]](徐訥)도 재상 자리에 올라서 살아서는 3대가 재상을 지낸 대단한 집안이 되었고 죽어서는 3대가 모두 [[배향공신|왕과 함께 종묘에 배향]]되는 영예를 누렸으며 서눌의 딸은 [[현종(고려)|현종]]의 제6비 [[원목왕후]]인데 자식은 두지 못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