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해갑문 (문단 편집) === 개요 === 북한 남포시 내의 서쪽 15 km에 위치한 갑문으로 [[황해남도]]와 [[남포시]]를 연결하는 기능을 한다.[* 광복 당시 행정구역상으로는 황해도 은율군 이도면과 [[평안남도]] 용강군 신녕면을 잇는다.] 도로는 물론 [[서해갑문선]]철도가 부설되었다. 서해갑문은 남포시 영남리와 황해남도 은율군 피도 사이에 폭 14m, 길이 7km의 [[제방]][* 흙제방 5.2km, 콘크리트제방 1.8km]을 축조하고, 피도와 은율군 송관리 끌쌀뿌리 간 약 800m에 3개의 갑문[* 각각 5천 톤급, 2만 톤급, 5만 톤급 선박이 통과할 수 있다.]과 댐을 건설하여 총연장 7.8km, 수문 36개의 [[방조제]]를 쌓았으며, 대형 선박의 통행이 가능하도록 90m 정도의 90° 회전교량을 설치했으며,[* 정해진 시간마다 회전하여 선박 통과와 차량/열차 통과를 통제한다고 한다.] 제방과 갑문 위에 4차선 도로와 철도를 부설했다. 건설 당시에는 남포갑문이라고 불렀으나 1986년 완공 직후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정령으로 '서해갑문'이 정식 명칭이 되었다. 북한에서는 서해갑문의 부설 이후 갑문 남단의 송관리를 남포시에 편입시켰다. 원래 북한은 현 위치에서 동쪽으로 30 km쯤 떨어진 남포시 동전리 지역에 갑문을 건설하려 했는데, 이러면 갑문의 길이는 짧아지지만 갑문 내부에 쌓일 흙의 양을 계산해보니 도저히 감당 못 한다는 결론에 이르러 취소한 적이 있었다. 현 서해갑문은 김일성이 직접 건설위치를 결정하였다.[* 온전히 독단은 아니고 그 나름대로 전문가 집단의 지지를 받긴 했다. 다만 둑이 너무 방대해진다는 반대여론이 있었는데 김일성이 현 위치를 적극 지지해서 묵살했다. 코랭면 드립 나올까봐 덧붙이자면 어쨌거나 김일성 멀쩡하던 시절에는 북한도 나름 관료들 모여서 회의도 하고 전문가 불러다가 의견 듣기도 했다. 김일성과 대비되는 김정일의 통치스타일 중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으로 괜히 '''회의 없는 독단적 결정'''이 꼽히는 게 아니다. 김정일의 특징으로 저게 꼽힌다는 것은 반대로 말하자면 김일성은 최소한 남의 말을 듣는 척이라도 했다는 뜻이니.]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