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태후 (문단 편집) === 권력 독점 === 그러나 거리낌 없던 서태후의 섭정도 아들 동치제가 친정을 할수 있는 나이가 되면서 위기를 맞는다. 사실 동치제는 자신에게 엄격한 친어머니가 아닌 다정하게 대해준 양어머니 동태후를 더 따랐다보니 서태후와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이런 둘의 갈등은 동치제가 동태후가 추천한 황후를 간택하면서 더욱 커저간다.[* 서태후가 동치제가 어린 시절 동태후에게 양육을 떠맡긴 것도 있었던 것도 있다지만 서태후는 자식 농사는 완전 수준 미달이었다. 특히 광서제를 대한 것을 보면 학대라 할 수준이었다.] 아들에 대한 애정보다 권력욕이 컸던 서태후는 아들과 며느리 사이를 이간질 하는 것은 물론 현실에 지친 아들이 환관들의 꼬임에 넘어가 여색에 빠져 기생집을 돌아다닌 걸 알면서도 거의 방치하였다. 결국 이런 어머니의 학대와 방치, 방탕한 생활로 동치제는 19살의 어린 나이에 요절하며 아내 효철의황후는 서태후의 강압에 못이겨 자살을 선택한다. 그리고 서태후는 아들의 장례를 치르기도 전에 재빨리 자신의 여동생과 순친왕 혁현[* 사후에 '賢'(현)의 시호를 받아 '순현친왕'(醇賢親王)으로 불리게 되었는데, 그냥 순친왕이라고 불리기보다는 이렇게 시호를 붙인 작위명이나 본명 혁현으로 더 많이 불린다. 아들 재풍, 그리고 재풍의 아들 [[선통제|부의]]가 역사적으로 워낙 유명한지라 구분이 필요해서 그렇다.][* 혁현은 함풍제와 공친왕의 동생이라 서태후는 [[겹사돈|형수이자 처형인 셈이다]]. 그러나 유일한 아들 재첨이 부모조차 영문도 모른채로 입양되었다는 소식에 혁현 부부는 서태후의 권력욕에 몸서리를 쳤다. 특히 혁헌은 통곡하다 실신까지 했고 아들의 안위를 위해 서태후의 예스맨이 되어 설설 기어야 했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즉 동치제의 이종사촌동생이자 자신의 조카인 4살 재첨을 양자로 맞아 즉위시키는데 이가 바로 [[광서제]]다. 그뒤 1881년에 눈엣가시였던 [[동태후]]가 급사하면서 사실상 서태후는 청나라 황실에서 유일한 황실 어른이자 실권자로서 4살 황제를 방패로 청나라를 좌지우지 하게 된다. 이후 광서제가 16세가 되면서 명목상 친정을 시작했지만 햇병아리에 불과한 아들에게 해코지를 할까봐 혁현이 앞장서 서태후의 섭정을 연장하자고 청하고 광서제의 황후를 아예 서태후의 조카로 정하는 등 서태후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