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진 (문단 편집) ===== 사상적 퇴보 ===== 서진이 표방한 유교 사상의 행보는 '''한밤중에 길 잃은 어린아이''' 같은 모습을 보여 사회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는 당시 유학자들이 시대에 발맞추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삼국시대를 거치면서 환관과 외척 등의 족벌들에게 대항하던 사인층은 정계로 진출해 권력을 잡은 부류와 그렇지 못한 부류로 나뉘었는데, 전자는 부패한 정부에 발을 맞췄고 후자는 아무런 목소리도 내지 않았던 것이다. 서진 때 명교라고 불리는 전통 유가의 경학은 쇠퇴했고 [[현학]]은 당시 학문의 주류가 됐다. 위진시대에 사마씨가 권력을 잡았을 때 정변과 반란([[고평릉의 변]], [[수춘삼반]])이 여러 차례 발생하여 정국이 불안한데다 사마씨가 정권을 잡을때 옛 유교에 입각한 통치방식을 취하였는데 그럼에도 격동의 사회환경이 현학의 발흥을 촉진하였고, 서진 시대의 명사들 사이에 [[폭음]]이 유행하였으며 청담과 오석산을 낳았다. 사실 [[후한]] 시대까지는 [[광무제]] 덕분에 그럭저럭 유교 사상이 맥을 유지해오고 있었다. 광무제는 태학의 유학생이었고, [[왕망]]의 한실 찬탈 때 어용으로 이용당하는 유교 사상에 심각한 문제점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후한 시기에는 광무제의 개혁 이후로 뛰어난 유학생들이 다수 배출되었으며, 어리고 어수룩한 황제들이 환관 손에 놀아나기 시작하자 유학자들은 여러 방면으로 태클을 걸었다. 이후 환관들의 유학 탄압이 시작되자 관직을 내려놓고 중앙정부를 떠나 백성과 고락을 함께 하면서 학문을 계속한다. 이들을 은자隱子라고 불렀으며, 후한에는 은자들이 유학의 맥을 잇고 있었다. 사회가 혼란스러워짐에 따라 이상적인 가르침보다는 현실을 인식하고 어떻게 바꿀 것인가에 집중하는 현실 참여형 유학자들도 대거 등장한다. 이런 현실 참여형 학자들의 염원을 실현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동탁과 조조였다. 동탁은 환관과 기득권층을 거의 박살내놓았고,[* 물론 이것은 중앙정부를 무력화시키려고 하다보니 중앙권력에 깊숙하게 관여한 환관들도 함께 쓸어버린 것뿐이다. 국가개혁의 큰 뜻 같은건 없었다. 애초에 무고한 인민을 수없이 살상하고 수도 일대를 초토화시키면서 대혼란을 초래한 것에 불과하다. 단, 동한의 큰 암덩어리였던 환관 및 환령 시대에 커진 족벌 계층을 완전히 싹 쓸어버려 조조 같은 훗날의 개혁자에게 큰 도움을 준 건 여하튼 사실이었다. ] 그렇게 박살나 텅 비어버린 관료층을 조조가 채워준 것이다. 재야 여론을 주도하던 사인 식자층은 정치 감각과 뛰어난 통치 능력을 보여준 조조에게 크게 이끌릴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조조 역시도 한말의 문제점에 대해 진저리를 치고 있었으니 유학자들과 뜻이 맞았고, 그들을 받아들여 탄탄한 위나라 정부를 꾸리게 된다. 사마의 역시 이런 사인층 출신이었다. 그러나 유학자들이 잘못 생각했던 것은, 조조에게 있어 지식인들이란 어디까지나 수단에 불과하다는 점이었다.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들어버린 것에서 알 수 있고, 공융이나 예형 같은 당대의 유학자들을 탄압해 죽이기도 했다.[* 특히 [[공융]]은 불효자라고 낙인찍어 죽여버린 건 앞뒤가 안 맞는 사례였다. 조조는 불효자이거나 인성이 안 좋은 자라도 능력만 있으면 대접하겠다고 한 바 있다.] 그런 조조가 세운 나라가 바로 위나라였고, 서진은 위나라를 상당 부분 이어받은 나라였다. 서진이 통일할 때까지 한 자리 해먹은 유학자라면 이미 나라가 지식인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알고 적응한 경우였고, 적응하지 못하고 떨어져나간 사람들은 그대로 중앙정부와는 인연을 끊어버린다. 이들은 백성과 고락을 함께 하며 현실을 개혁한다는 은자 정신을 가진 것도 아니라서, 그저 현실에서 도피한다는 식으로 아예 깊은 산속에 틀어박히게 된다. 그나마 삼국시대에 마융, 정현, 노식 등의 유학자가 있었으니 그들의 학풍이 계승되었다면 좋았겠지만, 당시 유학의 대표 중 [[죽림칠현]]이 유명한 걸 보면 알 수 있듯이, 숲속에 틀어박힌 채로 다소 와전된 유교 사상과 도가 사상을 짬뽕시켜 즐기는 자들이 많았다. 이들 말고는 [[하안]], [[왕필#s-2]], [[하후현]]과 같은 유학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귀족 도련님들이 내세울 법한 세련된 [[현학]]이었다. 부패한 정권에 대한 저항 의식, 유학 이외의 다른 학문과 사상에 대한 포용, 탐욕과 권력욕에 대한 경계 등을 주장하는 [[청담사상]]은 후한말부터 시작된 청의(淸議)가 구체화된 사상이었고 큰 성취를 이룬 하안이나 왕필 같은 경우 유학 사상에 대해 논할 정도는 되었으나, 현실과 동떨어진 학문이라는 점에 변함은 없었다. 다만 이를 서진에게만 책임을 묻기에도 뭣한 것이 이후 진나라가 남쪽으로 쫒겨난 후 유학자들 사이에서는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 아부와 칭찬을 늘어놓는 '''공담(空談)'''이 판을 쳤으며, 이런 학풍은 위진남북조 시대가 종결될 때까지 지식인들에게 크나큰 해악을 끼치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다 서진에서는 [[오석산]]이라는 중금속 마약까지 유행하여 사회 혼란에 일조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