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진 (문단 편집) ==== 태강지치의 그림자 ==== '''다만 사마염의 구상은, [[의도는 좋았다|의도는 좋았지만 여기까지였다]].''' 가장 큰 문제는 하내 사마씨(河內司馬氏)가 당시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위법과 탈법으로 찬탈을 저지른 것이었다. 익히 알려진 대로 [[사마의]]는 [[고평릉 사변|무력 쿠데타로 정권을 뒤집었고]], 그 아들 [[사마사]]는 임의로 외척을 척살하고 황제까지 쫓아냈으며, [[사마소]]는 '''아예 황제를 공개적으로 시해했다.''' 위문제 조비 역시 후한의 헌제를 핍박하여 황제가 되었지만 그래도 헌제에게 위해를 가하진 않았다.[* 《연의》나 민담에선 조비가 보낸 자객에게 살해당했다고 하는데 이는 유비의 칭제를 정당화 하기 위한 장치일 뿐이고, 정사에서는 공작위(산양공)를 받고 편안히 살다가 조비보다 8년이나 더 살고 편안히 사망했다.] 그러나 사마소는 [[가충]]을 앞세워 조모를 진짜로 시해하였다. 직접적 실행자인 [[성제]]에게 책임을 물리기는 했지만, 성제가 죽기 전 저항하면서 사방에 실상을 다 까발린 데다 정작 성제를 사주한 가충은 무사했으므로 눈 가리고 아웅일 뿐이었다. 이외에도 중간중간 사마씨 일족에 조금이라도 제동을 거는 세력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무력을 동원해 자근자근 밟아버리는 일이 반복되었다. 조위는 적어도 조조의 세력이 후한말의 막장 상황을 정리하고 장강 이북지역에서 질서를 확립한 것은 확실하다. 후한은 외척, 환관, 지방 군벌의 발호로 더이상 존립이 어려운 체제였으며 이후 비슷한 상황에 처해서 멸망한 다른 왕조(당, 원, 명, 청)를 봐도 결국 멸망할 수밖에 없었다. 조위는 어쨌든 이런 상황을 정리하고 당시 장강 이북지역에서 질서를 확립했으며, 이것을 정통성의 근거로 내세울 수 있었다. 반면 사마씨 정권하에서는 유교를 외치면서도 정작 충(忠)에 대해 말하는 것이 금기시되었다고 한다. 이런 정책을 펼친 이유는 황실의 일족인 사마씨가 [[고평릉 사변|쿠데타를 일으키고]], [[조방|현위황제를 쫓아내거나]] [[조모(삼국지)|시해했으며]], [[왕릉(삼국지)|반항]][[하후현|하는]] [[관구검|세력은]] [[제갈탄|몰살하는 행위]]를 통해 조씨를 몰아내고 집권한 현실과 무관치 않았기 때문이다. 당장 충을 강조하면, 그것에 대해 가장 많이 걸리는 쪽이 사마씨 황실이었다. 그나마 사마염이 내세운다는 게 위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유교적 가족주의였지만, 여기에도 엄연히 문제가 존재했다. 정작 사마염 자신이 사마의의 장손이 아니라 차남인 사마소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물론 사마소의 형 사마사가 아들을 두지 못하기는 했지만, 대신 사마염의 동생 [[사마유]]가 사마사의 아들로 입적되어 있었고 그의 개인적인 인망도 상당했으므로 사마염에게 강력한 위협이었다. 그렇다고 사마유를 아예 배제해버리자니 또 유교적 가족주의에 어긋나고...결론적으로 사마염이 내건 '유교 질서의 회복'은 '''적극적으로 강조될수록 서진 정권의 집권 정당성이 약화된다'''는 아이러니를 안고 있었다. 결국 위에서 본 치두구 사건이 벌어진 278년에 조정 내에서 군기반장 역할을 하던 부현(傅玄)이 사망하고, 280년에는 삼국이 통일되면서 사마염은 유교 질서의 실현이라는 기조를 사실상 포기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사마유에 대한 처우인데, 이전까지 유교적 가족주의에 입각해 전대에 비해 파격적인 혜택을 제공받던 사마유가 [[토사구팽|280년의 삼국통일을 기점으로 급격히 견제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사마염은 사마유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지방으로 쫓아낸 뒤 사마유도 산동 지방으로 보내버리는데, 이 과정에서 사마유가 정말로 저 세상으로 갔다. 애당초 법가적 정책을 지양하면서 귀족적 풍조를 잡겠다는 방향 설정 자체도 문제였다. 이는 곧 '''사치를 금지하지만 처벌은 하지 않겠다'''는 말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법가사상 대신 내세워진 유교적 검약주의가 제대로 작동했다면 모르겠지만, 기존의 유교사상은 이미 형식만 남아 문벌집단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온정주의로 왜곡한 지 오래였다. 예컨대 선비의 윤리의식을 가늠하는 기준의 하나였던 삼년상 관습이 후한시대에는 명성과 관직을 얻기 위한 수단이 되어 있었다. 게다가 사마염의 관대함은 여기서 끝이 아니라서, 문벌들의 각종 범법행위에 대한 사마염의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이었다. 이미 사마염의 재위 초기인 267년 1월부터 관전을 점탈했다는 죄목으로 [[산도]], [[사마목]], [[무해]]. [[유우(서진)|유우]]가 함께 고발되었음에도 [[고관대작]]인 [[산도]], [[사마목]][* 이쪽은 아예 가까운 방계 황족이였다. [[사마의]]의 친조카였으니 거기서 설명 끝.], [[무해]]는 그냥 방면되고 일개 현령인 [[유우(서진)|유우]]만 목이 달아난 일이 있었다. 그 뒤에도 사마사의 인척이자 사마염의 최측근인 [[양수(삼국지)#s-2|양수]]는 아무리 탈법적으로 재산을 모아도 사마염이 보호해준 덕에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유전무죄 무전유죄|그야말로 빽이 없는 게 죄인 시대.]] 그리고 또 하나 말하자면 온갖 사고치고 비리 저지르고 하면서 그 열매는 빽있고 지위있는 사람이 먹지만, 일이 잘못되면 독박쓰고 책임지는 건 이도저도 없는 하수인들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 이도 저도 아니게 된 사마염은 천하를 발 밑에 둔 뒤에는 그냥 다 포기하고 바로 개념을 [[개념은 안드로메다로|안드로메다로]] 보내버린 통치를 했다. 오나라의 손호가 모아들인 5천 궁녀를 그대로 흡수해서 '''1만 궁녀를 현실에 실현'''하는 현실판 하렘 물짓을 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이전에도 5천이었으니 이전부터 막장이었다는 얘기다.] 이 많은 궁녀 가운데 오늘밤은 누굴 골라잡을 지 몰라서 양이 끄는 수레에 타고 양 가는 대로 [[로또]]를 돌린 이야기도 유명하다. 게다가 이건 [[의자왕#s-3|삼천궁녀]]처럼 과장한 야사가 아니라, '''엄연히 정사에 나오는 기록'''이다. 이 때문에 궁녀들은 양을 유인하러 양들이 좋아하는 댓잎과 소금물을 문간에 깔아놓았다고. 또 관리 선발에서 "[[답이 없다|'''사치가 심한 건 좋은 것이지만''']], 술병은 평생 못 고친다."는 [[개드립]]도 쳤다. 이처럼 된 이유는 우선 황제가 귀족 사회의 눈치를 보느라고 제왕의 위상이 떨어졌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사마씨 일족이 위나라 말에 절대적 지위를 구축했다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귀족 사회의 일원으로서였다. 한나라 시조 [[한고조|유방]]과 위나라 시조 [[조조]]가 극적인 자수성가를 이루어낸 데 반해,[* 하지만 조조는 십상시 따위가 감히 손대지 못할 레전드 환관이었던 [[조등]]의 손자였기에 손쉽게 관직생활을 시작하여 탁류파 명사들의 지지를 받았고, 군벌로서 입지를 다질 때에는 원소의 권위에 기대었으며, 본격적으로 자립군벌로서 세력을 확대하고 굳힐 때에는 한 황실의 권위에 의지하였다. 유방이면 몰라도 조조가 자수성가형 군벌이라는 것은 반만 맞는 소리. 이 때문에 조조는 견제자가 없는 독점적인 지위를 누렸음에도 스스로 제위에 오르는 것이 불가능하였는데, 애초에 조조의 세력에 모인 인사들 자체가 순수하게 조조 개인을 보고 모인 것이 아닌, 한 황실의 수호자 조조를 보고 모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세력을 재편한 이후에야 조비가 황제가 될 수 있었다.] 사마씨는 전통적 귀족 사회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좋든 싫든 귀족 사회와의 관계를 항상 염두에 둬야 했다. 그것이 발목을 잡은 것이다. 귀족 사회에 속한 권력자라면 비교적 평화로운 방식으로 권력을 얻을 수도 있었겠지만, [[고평릉 사변]]이나 [[조모]] 시해 사건 등을 거치며 이미 숱하게 피를 봤다. 제왕의 위상이 귀족층에 비해 나을 것이 없는 상황을 타개하려면 위나라처럼 강력한 법치를 통해 귀족들을 제어하는 것이 정답이다. 그러나 사마염은 법치의 각박함을 지적하며 유교적 통치를 시행하려다 결국 그걸 버리고 아무것도 안 하는 현실 도피성이 강한 도교사상과 향락풍조를 스스로 조장했다. 이러다보니 사회 전체가 현실도피 및 퇴폐로 흘렀다. 이 당시 [[죽림칠현]] 등이 나온 것은 단순히 전란이나 권력투쟁에 대한 선비들의 염증이 퍼졌기 때문만은 아니고, 사마씨 황실이 [[빵과 서커스|이런 풍조를 조장]]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졸부 [[석숭]]과 [[왕개]]가 온갖 사치로 돈을 뿌리며 낙양에서 "누가 더 돈을 많이 쓰나" 경쟁하는 [[돈지랄]]을 할 때, 황제였던 사마염은 이를 말리기는커녕 앞다투어 구경을 하곤 했다. 결국 유가도, 법가도 모두 버렸으니 진나라는 귀족을 제어할 수단을 다 내버린 셈이다. 재능있고 패기넘치는 황제가 열심히 노력해도 통치가 잘 안되는 경우가 허다한데, 황제부터가 개판이면 오죽하겠는가. 당장 [[문벌귀족(중국)|문벌귀족]]들부터가 사치, 축재, 매관매직, 부정부패 등 온갖 비리를 일삼으며 극단적인 사치 행각을 겨루었다. 승상 [[하증]]은 하루에 1만 전이라는 거금을 들여서 진수성찬을 차려도 먹을 게 없다며 징징거렸고[* 참고로 아들 하소는 하루에 먹는 데에만 2만 전을 썼다.][* 이 하증은 후대에도 까임거리라서 소동파는 '나나 하증이나 배부르기는 매한가지' 라며 깠고 이색은 '가난한 시인은 시라도 할 줄 안다'라고 깠다.], 사마염의 사위 [[왕제]]는 사람 젖으로 키운 돼지의 고기를 사마염에게 대접하는가 하면 낙양 한복판에 말 기르는 사육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 시대 사치의 끝판왕은 역시 '''[[왕개]]와 [[석숭]]의 [[돈지랄|돈XX]] 레이스.''' 왕개는 [[왕원희]]의 동생으로 사마염의 외삼촌이고, 석숭은 위에서 이야기한 석포의 막내 아들인데, 왕개가 [[엿기름]]으로 솥을 닦으면 석숭은 밀랍을 땔감으로 쓰고, 왕개가 [[명주]]로 40리에 장막을 치면 석숭은 [[비단]]으로 50리에 장막을 치고, 석숭이 집을 산초로 칠하면 왕개는 집을 주사로 칠했다. 왕개가 조금 밀린다 싶자 사마염은 외삼촌을 위해 2자(48cm)가 넘는 귀한 [[산호]]수를 하사했고 이걸 석숭의 집에 들고 가서 자랑하자 석숭이 '''황제의 하사품을''' 쇠몽둥이로 파괴해버리고, 이에 왕개가 따지자 사과한답시고 창고에서 3~4자(72~96cm) 정도되는 산호수를 7개 정도 꺼내와서 하나 가져가라고 하였다.[* 후한척은 약 23cm, 서진척은 약 24cm였으므로 후한척 또는 서진척을 사용했을 것이라 추정할 수 있다. 참고로 이후 시대인 동진 시기에는 1척이 약 25cm로, 후대로 갈수록 점점 길어지는 양상을 띠게 된다. 자세한 사항은 [[자#s-4]] 참조.] ||[[파일:서진에서살아남기.jpg]]|| || 서진시대의 이상기후 빈도 || 또한 이 시기 중국을 다스리던 서진은 고위 문벌귀족들의 극에 달한 사치와 대비되는, 오히려 [[소빙하기]]가 의심되는 자연재해에 시달리고 있었다. 태양의 흑점 활동부터가 중국 역대 어느 왕조보다도 자주 관측되었으며, 특히 271년부터 5년간은 아예 해마다 일식이 일어났다. 농업도 이상기후로 몸살을 앓았다. 계절풍이 위축되면서 화북에는 가뭄이, 강남에는 홍수가 일어나는 일이 잦아졌다. 초여름에 서리가 내려 싹을 틔운 보리가 다 죽어버렸고, 한여름에 우박이 쏟아져 익어가는 곡식들을 망가뜨리기도 했다.[* 실제로 《[[진서]]》 4권, <혜제>편을 살펴보면, 우박이나 지진, 서리, 홍수, 가뭄, 기근, 전염병, 태풍과 같은 자연 재해에 관한 기록이 심심치 않게 나온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농민들이 선택할 수 있는 활로는 많지 않았다. '''[[사채]]를 쓰거나, [[식객]]이 되거나.''' 여기에서의 식객이란 간단히 말해 '''중세 유럽에서의 [[농노]]를 생각하면 된다.''' 객 중에서도 고용인인 '''용객'''(傭客)이나 소작인인 '''전객'''(佃客)은 사회적으로 비천하게 취급받긴 해도 자신의 가계를 가지고 자기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분상으로 양인에 속하지만, 식객 즉 '''의식객'''(衣食客)은 주인에게 가계를 의존하여 의식을 제공받고 있었으므로 사실상 노비에 가까운 상태였다. 이들은 자의가 아닌 타의에 따라서 노동에 종사해야 되었고, 의식객에서 벗어나려면 그때까지의 부양비를 배상해야 되었다.[* 이공범, 《위진남북조사》, 2003, 234~235쪽 참조.] 결국 생업을 잃은 농민들은 개인의 비정상적인 권력과 부에 기생하는 존재가 되고, 얼마나 탈법을 용서받을 수 있는지에 따라 부와 권력의 자기확증이 일어났다. 한마디로 말해, 개인이 소유하는 노비와 사병들의 숫자가 엄청나게 불어난 것이다. 특히 노비와 사병들은 떠나봤자 영위할 만한 생업이 없기에 그 주인의 눈에 들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진서]]》 <외척전>에는 양수가 원리원칙 없이 마음대로 사람을 선발했지만, 부하들이 양수의 눈에 들기 위해서 목숨을 내던지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회가 무너지고 군벌들이 일어나는 건 시간 문제였던 것. 게다가 돈을 모으는 방법 자체도 굉장히 악질적이었다. 석숭은 형주자사로 지내면서 지나가는 사신이나 상인을 겁박해 가지고 있는 물건을 약탈하고,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상인을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양수는 국가 관청에까지 사채를 씌울 정도였으며, 왕융은 장원과 상업을 경영하던 거대 자본이었는데도 종자가 아까워서 씨에 구멍을 뚫어서 팔았다. 상황이 이 정도면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뇌물수수와 부정부패는 애교일 정도다. >분쟁은 돈이 아니면 이기지 못하고, 관직은 돈이 아니면 트이지 못하고, 원수는 돈이 아니면 풀지 못하고, 명성은 돈이 아니면 떨치지 못한다. 붉은 옷을 입고 요직을 담당한 낙양의 사족들이 나 가형(家兄)을 좋아하는 것이 모두 끝이 없어서, 나의 손을 잡고 시종 나를 안고 있으니, 무릇 지금 사람들은 오직 돈만 알 뿐이다. >---- >《자치통감》 원강 9년(299), 노포의 <전신론>(錢神論) 이렇게 경제 기반이 붕괴되어가는 마당에 정권을 잡은 소수의 거대문벌에게 극단적으로 부와 권력이 집중되는 현상은 반대로 이러한 주류 카르텔에서 소외된 중소문벌들의 불만과 위기감이 축적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당장 팔왕의 난에서 막후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손수]]와 [[이함(서진)|이함]], [[장방(서진)|장방]]이 모두 중앙의 문벌 사회에서 멸시받던 중소문벌 출신의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어지간히 한이 맺혀있었던 저 인간들에게 완장이 한번씩 갈 때마다 무지막지한 피바람이 일어났다. 그나마 자기들끼리는 나름의 카르텔도 있어서 기싸움하며 적당히 건드리다 말았던 주류 문벌 귀족들이었지만 갑자기 힘이 생긴 저 외부자들에겐 그런 눈치 볼 필요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황제가 하사한 산호수를 멋대로 깨먹고도 무사했던 석숭은 자기 애첩을 탐내는 손수를 무시하고 나서는 자기뿐 아니라 3족이 살아남지 못했다. 장방이 낙양을 무지막지하게 들쑤시고 다니며 온갖 인간 백정짓을 다 하고 다녔을 때 역시 중앙 귀족들은 그냥 칼로 베기 좋은 고깃덩어리였을 뿐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