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진 (문단 편집) === 통일 제국의 개창 === 사마소의 뒤를 이어 진왕이 된 [[사마염]]은 조위가 내세운 [[선양]] 시스템을 통해 [[조위|위나라]]의 제위를 계승하여 황제에 올랐다. 그 방법이 위나라가 [[후한|한나라]]를 멸망시키고 흥기한 과정을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 조조도 근본적으로는 한 황실의 권위를 이용해서 세력을 구축한 뒤, 후한의 근왕 세력을 주륙하고 위왕에 올라 찬탈의 모든 준비를 끝내놓아 조비가 안정적으로 선양받게한 인물이라 도긴개긴이다. 그러나 조조는 헌제에게 불려와서 뿌리박았고 사마염은 사마의부터 시작해서 4대째까지 이어져 내려온 거라 급이 살짝 다를 수도 있다. 진나라는 동한 말기부터 조위까지의 할거 국면을 이어받아 지방에서는 호족의 영향력이 제왕보다 훨씬 컸다. 예를 들어 사마씨 자체가 호족 권신으로 조위 조정을 장악하고 결국 위나라를 찬탈하여 자립한 것이었다. 그래서 사마염은 위나라를 찬탈하여 서진을 건국한 후, 다른 호족과 권신들의 본을 피하기 위해 각 종실의 구성원을 왕으로 나누어 봉하고, 지방에서 황실을 지키는 힘으로 삼았다. 동시에 '전지를 점거하는 명령'을 공포하여 호족이 소유한 전지의 면적과 양을 제한했다. 전신이었던 위나라는 황족과 외척들에게 권력을 주지 않고, 방계 친척들 위주로 근황 세력을 구축하다가[* 대표적으로 조진, 조휴가 있다. 이들은 각각 군권을 행사하는 직위인 대장군과 대사마의 지위에 앉아 있으면서 조비 대에서 조예 초기까지 사마씨를 필두로 한 호족세력에 맞서 근황세력의 대표주자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이들 덕분에 [[조예]] 치세까지는 황권이 신권에 압도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게 된다.] 그들이 사마씨에 의해 [[고평릉 사변|숙청]]되면서 군권이 사마씨를 비롯한 호족 세력으로 넘어가는 바람에 권력을 잃고 나라가 망했는데, 사마염은 그런 위나라의 쇠망 과정을 막으려고 '''황족들의 권력을 상대적으로 강화'''시켰다. 황족들을 각 지방의 왕으로 분봉하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군권까지 쥐어주었는데, 이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사마염의 숙부 [[사마주]]와 [[사마준]]으로, 이 두 사람은 각기 동관왕(東莞王)과 부풍왕(扶風王)으로 책봉되어 오나라와 [[선비]]족을 상대로 전선에 나갔다. 여기서도 보이듯, 당시 진나라의 주요 적국은 '''강남의 [[손오|오나라]]'''와 '''농서의 [[선비족]]'''이었다. 이에 농서의 선비족을 관리하기 위해 따로 진주(秦州)를 설치하고 현지 출신인 [[호열]]을 자사로 앉혔지만, [[내려갈 팀은 내려간다|터질 반란은 터지기 마련]]인지라 끝내 270년에 선비족의 [[독발수기능]]이 들고 일어나 [[호열]]과 [[견홍]]을 죽이고 진나라에 반기를 들었다. 선비족은 서량을 마음껏 유린했고, 사태를 수습하라고 보내려던 [[가충]]은 [[김대기(프로게이머)|적절]]하게 [[가남풍|자기 딸]]을 태자비로 삼는 꼼수를 부려서 부임도 안 했다. 한편 당시 오나라에는 [[손호]]가 황제였는데, 그는 [[폭군]]의 전형처럼 무리하게 무창으로 천도했다가 재정만 악화시키고 돌아오거나, 신하를 그 자리에서 살해하여 [[호랑이]]의 식사로 뒷산에 던져주고, 또 [[궁녀]]를 5,000명이나 징발하는 등 수많은 학정을 펼쳤다. 또한 외치 역시 폭군의 전형대로 사마염이 즉위하자마자 이를 깔보고 평화조약을 폐기하며, 예언만 믿고 무리하게 북벌을 추진하다가 그만 폭설에 갇혀서 동사할 뻔 했다. 태시 5년(269년), 사마염은 양호를 보내 군사 요충지인 형주를 지키고, 양호는 형주에 진수한 후 세금을 줄이고 민심을 안정시켰다. 양호는 심리전으로 승리하는 전략을 취하여 오군에게 큰 은혜를 베풀었다. 당시에는 손호가 돈을 헤프게 쓰는 바람에 오나라 부대 사병들은 늘 급료를 제대로 받지 못했다. 양오는 오군에게 술과 고기를 보내 오군을 와해시키라고 명령했다. 가끔 오군이 와서 투항하자 양호는 오군이 오면 환영하고, 가면 환송하라고 명령했다. 이렇게 사마염은 양양에서 양호에게 인덕으로 오군에게 영향을 미치도록 명하는 한편, 장강 상류의 익주에서 수군을 훈련시켜 전선을 건조시켰다. 한편 독발수기능이 있는 서북부 지역은 다행히 부풍왕 [[사마준]]이 선비족의 우두머리인 독발수기능을 밀어내는 데 성공하고, 진나라에는 [[양호(삼국지)|양호]], 오나라에는 [[육항]]이라는 두 명장이 있어서 서로 대치하며 힘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274년에 육항이 죽자 양호는 [[장화(삼국지)|장화]], [[왕준(무군대장군)|왕준]], [[두예]]와 함께 오나라 정벌을 극력 주장하기 시작했지만, 이에 맞서 [[가충]], [[풍담]], [[순욱(서진)|순욱]] 등의 일파는 선비족이 먼저라면서 씹었다. 이에 양호는 결국 오나라 정벌을 보지 못하고 사망한다. 279년에 때마침 [[마륭]]이 독발수기능을 참살하자 진나라는 280년에 가충을 총사령관으로 삼아 [[사마주]], [[왕혼]], [[두예]], [[왕준(무군대장군)|왕준]] 등으로 대대적인 오나라 침공을 개시했다. 10년에 걸친 충분한 준비 끝에 279년 진군은 오나라의 주병력이 곽마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교주로 떠나있는 틈을 타서 오나라를 멸망시키기 위한 전쟁을 시작하였고, 20만 명의 진군은 동오를 공격하여 한 갈래는 서주에서 건업을 직격하고, 한 갈래는 형주로 밀고 들어가며, 다른 한 갈래는 익주에서 장강을 따라 내려간 결과, 마침내 진나라는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삼국통일]]을 완수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