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진 (문단 편집) === 남조의 기반이 된 왕조 === 이후 역사에 끼친 영향을 살펴보면 서진도 분명 남긴 것이 있다. 서진 이후에는 남조와 북조가 탄생하는데, 남조가 바로 서진의 영향을 받았다. 서진은 삼국 중 최후의 생존자였던 오나라와 대립하면서 남쪽 국경 지역을 크게 발전시킨다. 동오의 손호는 무리한 군비 증강과 중앙 집권책으로 동오 지역 민중과 호족 세력들에게 큰 고통을 주었는데, 이를 알고 서진에서는 동오와의 국경 지역에서 유화 정책을 펼친다. 도망쳐오는 이주민들을 받아들여 정착시키고, 기반 시설을 정비하여 생산력과 경제력을 향상시킨다. 특히나 양양 지역이 중요했는데, 이 지역을 거점으로 동오의 육항과 대립하던 양호가 군비 증강과 함께 민중을 위한 정책도 다양하게 실시했기 때문이다. 이후 동오를 복속시키고 난 다음부터는, 동오가 기초를 세운 강남의 경제력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지역의 생활 수준이 더욱 안정되었다. 이렇게 부강한 강남의 경제력을 받아들인 것은 훗날 동진을 비롯한 남조 국가들이 북조 국가에게 대항할 수 있는 원동력 중의 하나이다. 강남 지역의 경제 및 생산력 향상의 주역은 해당 지방을 다스렸던 손권 뿐만이 아니라, 손호의 기이한 정치 행태를 끝내고 나름대로 동오 지역에도 관심을 기울였던 사마염이기도 하다. 그리고 동진으로 정착한 다음부터는 늘 북쪽 야만족들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였는데, 이 때문에 오히려 토착 세력들을 억누르는 데에는 도움이 되었다. 동오의 호족들은 북에서 내려온 세력들에게 상당 부분 고까운 감정이 있었으나, 아무리 그래도 북방의 막장 야만족보다는 그들이 보다 나은 지배자임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우습게도 서진 시절 국가통치에 완전히 손을 놓아버린 사마염이 황권을 약화시켜둔 덕분에, 무능력한 황제가 귀족들에게 태클을 걸어 중앙 정부 시스템을 마비시키는 일이 방지되었다(...) 남긴 거라면 이것도 남긴 셈이다.[* 덕분에 유능한 권력자가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들어놓고 권력을 휘두르다 보면 국력이 더 강해지면서 영토가 더 넓어지기도 했다. 환온이나 유유의 활약이 대표적인 예다. 비수대전 때 효무제가 한 일이 그다지 없음에도 사안이라는 걸출한 인물이 국가의 위기를 넘긴 것도 그 예...] 또한 서진이 훗날의 남조 국가들에게 남긴 유산이 또 있는데, 바로 정통성이다. 가장 정통성이 없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쪽은 오히려 갑자기 황제에 즉위하여 의문을 남긴 오나라에게 향해야 할 비판이다. 진나라는 한나라에서 위나라를 통해 건너건너 선양을 받으며 정통성을 갖췄다. 그리고 [[촉한정통론]]적인 관점에서도 서진은 정통성을 과시할 수 있는데 서진의 실질적인 시조인 '''태조''' 문제 사마소가 최후의 한나라 왕조인 [[촉한]]을 멸망시키고 그 공로로 진왕이 된 것이 바로 서진왕조이기 때문이다. 촉한정통론이 최초로 나타난 시기가 동진 시기임을 감안하면 서진-동진 역시 촉한이 내세운 정통성을 그대로 이어 받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었다. 유송이 북위에 대해 정통임을 과시할 수 있었던 것이 바로 후한-조위(촉한)-서진-동진-유송으로 내려오는 중국 왕조의 정통성 계승 덕분이었다. 사실 북위도 정통성 문제를 의식하고는 있었고, 이름을 북'''위'''라고 한 것도 국가시조인 탁발부가 위나라에게 조공을 바쳐서였다. 그래도 형식상이나마 선양을 통해(혹은 직접 나라를 멸망시켜) 계승한 동진의 정통성 앞에서는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남조는 양나라 이전에도 여전히 북방 오호의 불안정한 국가들보다 안정되어 있었으며, 이는 이미 서진의 기반을 계승한 동진에게서 정통성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남조 정권의 강력한 정통성은 오호 국가 및 북위에서 가끔씩 부정했으나, 역사적으로 남조가 더 강력한 정통성을 가졌다는 부정하기 힘들다. 서구 학계에서도 전반적으로 남조를 동양판 [[동로마 제국]]으로 보는 시각이 강하며, 일본의 연구자들도 여기에 동의하고 있다. 결국 세력싸움에서 승리한 것은 북조였지만, 남조와는 달리 5호 16국에게는 정통성이라는 강력한 무기가 없었기 때문에, 서로 불신과 반목을 일삼으며 국가의 생사를 걸고 치열하게 싸우는 시기를 겪어야만 했다. 당대에 조조급이라고 평가받던 유연이 있었고, 조조와 사마의를 무시하던 석륵이 있었으나, 그들조차 동진을 끝끝내 타도할 수는 없었다. 당시의 동진을 잘 살펴보면 촉한을 병합한 직후의 조위보다 기반이 불안했는데도 그랬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합비에 회수 일대에다 여러 유민 군단들을 더해서 시작한 동진의 첫 출발은 손오가 전성기였을 시절보다도 훨씬 나은 편이었다.] 이는 정통성을 계승한 후손들이 동진에 기반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진의 기반을 세운 삼국의 영웅들이 남긴 업적과 한계가 동시에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