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진 (문단 편집) === [[영가의 난]]과 화북 상실 === '''[[오호|그러나 내전을 틈타 자립한 이민족이]] [[서로마 제국|이미 진나라 내부에 일대 세력을 이룬 상태였다.]]''' 특히 조조가 병주에 정착시켰던 [[흉노]]가 가장 큰 골칫거리였는데, 이들은 팔왕의 난 막바지에 성도왕(成都王) 사마영(司馬潁)과 결탁해 선비족을 끌어들인 사마월과 맞서다가, 이내 사마영이 사마월에게 패사하자 흉노족을 끌어모아서 [[한나라|한]](漢)[* 유연의 유씨는 선조 묵특이 한 고조와 화친을 맺을 때 성을 받았기 때문으로, 국호는 이에 근거했다. 유요가 즉위한 뒤에 조(趙)로 개명한다. 이것을 [[전조]]라고 부르고, 여기서 분가한 석씨의 조나라를 [[후조]]라고 부른다.]을 세우고, 그의 아들 [[유총(전조)|유총]](劉聰)이 남하하면서 그 부하들([[석륵]], [[왕미(전조)|왕미]], [[유요(전조)|유요]] 등)이 화북 각지를 휩쓸고 다니기 시작했다. 더욱이 팔왕의 난을 거치면서 '''서진의 지방 통치는 사실상 와해'''했기에 문제는 더욱 심각해져만 갔다. 원래 후한 말부터 삼국 시대에 이르는 시기의 지방 호족들은 군사와 행정의 여러 직책을 겸임함으로써 독자적인 군벌 세력화 되어있었다. 그런데 중국을 통일한 사마염은 다시 군사와 행정을 분리시키는 정책을 강하게 밀어붙여서 지방의 군대를 대부분 해산시켰고, 대신 왕으로 분봉한 황족들에게 군사권을 쥐어주어서 이를 보완시키려 했지만 이것들이 지들끼리 치고받다가 공중분해했으니(...). 때문에 실권자인 동해왕 사마월은 중요 거점에 친족들을 보내서 거점을 장악시키는 등 고군분투했지만, 애당초 이러한 자의적인 인사는 황권에의 도전으로 해석할 소지가 컸다. 실제로 자신을 향한 참소가 빗발치자 사마월은 그만 분사했으며, 뒤이어 실권을 잡은 왕연(王衍)이 사마월의 장례를 치른답시고 황제를 버리고 피난가다가 죄다 [[석륵]](石勒)에게 잡혀서 싹 몰살당했다. 이때 왕연과 동행하던 낙양의 주둔군이 다수 죽었기에, 석륵 등은 이 기회를 틈타 낙양까지 쳐서 함락시키는 기염을 토했다. 선발대인 호연안(呼延安)이 배를 모두 불태워버리는 바람에 황제 사마치는 달아나지도 못하고 그대로 포로로 잡혔다. 이것이 바로 [[영가의 난]]. 포로가 된 사마치는 2년 뒤에 유총에게 불려와서 노예 복장을 하고 술을 따르다가 그 모습을 본 옛 진나라의 신하들이 통곡하는 바람에 위험 인물로 간주, 살해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이에 관중에서 장안을 수복하고 태자로 추대받아 진나라 임시 정부를 이끌던 [[사마업]](業)이 사마치의 부고를 접하고 자신이 황제에 올랐다. 하지만 이 또한 각지에 흩어진 군벌들의 지원을 못 받아 2년 만에 장안이 포위되자 농성 끝에 항복했고, 역시 이듬해에 유총에게 불려와 술을 따르다가 그 모습을 본 옛 신하들이 통곡하는 바람에 '''또''' 살해당하고 만다. 이로써 화북의 진나라 세력은 구심점을 잃고 완전히 사라졌다. 다만 강남에서 호족들을 규합하던 사마예가 사마업이 죽은 이듬해인 317년에 그의 부고를 듣고 황제로 즉위하여 진나라의 명맥을 이어나가는데, 이 나라를 [[동진]]이라고 부르며, 이후 백여 년 동안 [[오호십육국시대|이민족 왕조가 화북에서 조지고 부시고 갈아엎으며 깽판을 치는 사이]] 강남에서 [[육조시대|한족 왕조]]의 명맥을 이어나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