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진 (문단 편집) ==== 황족의 지방 할거 ==== >황제는 위나라가 고립되었던 폐단을 경계하였으므로 종친을 크게 책봉하고 직임을 주었다. 또한 여러 왕들에게 모두가 스스로 자신의 봉국 안에서 장리(長吏)를 선발하도록 명령하였다. 위장군 제왕 유 혼자만이 그렇게 하지 못하고 모두 위에서 임명해줄 것을 청하였다. >---- >《자치통감》 태시 원년(265) [[사마염]]은 앞서 [[위(삼국시대)|위나라]]는 후한의 혼란을 교훈삼아[* 위의 실질적 건국자인 조조는 십상시의 난을 두 눈으로 목격한 사람이다.] 황족, 외척, 환관을 강박적으로 배제하고 오로지 측근들을 위주로 국정을 운영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유전자가 남달랐던 건지 조씨와 하후씨 위주로 구성했는데도 이들의 능력들이 뛰어난 편이라 조예 때까지는 아무 문제없이 돌아갔다. 조진, 하후상, 조휴 등..] 하지만 그 때문에 측근들이 언제나 서로를 견제하고 균형이 유지되도록 안배하지 않으면 아차하는 순간 황권이 그대로 삼켜질 수 있었고, 실제로 이러한 가능성은 능력이 뛰어났던 조씨와 하후씨 일가의 인물들이 대부분 사망하고 [[고평릉 사변|사마의 일파가 전면에 나서는 순간]] 그대로 실현되었다.[* 특히나 당시 이들을 제어해야 할 조방이 어렸음을 감안하면 측근 중심 정치는 결국 제어할 사람이 그러한 능력이 없으면 붕괴되기 쉬운 체제였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위나라의 전철을 답습하지 않기 위해 사마염은 즉위 직후부터 황권강화를 위해 일종의 [[봉건제]]로 돌아가는 방식을 선택, 각지에 할거한 황족의 권력을 비약적으로 강화시켰다. 책봉된 황족에게 휘하 관속을 마음대로 임명할 수 있는 인사권을 주었고, 277년부터는 최대 5,000명에 달하는 군대도 공식적으로 허용해 주었다. || [[파일:서진종실봉작도독289.jpg]] || || 289년 말 종실왕 배치도 및 주요 종실왕. 다만 종실왕의 세력기반은 왕위가 아닌 장군위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실제 세력의 배치는 왕위의 배치와는 사뭇 다르다. 예를 들면 성도왕 사마영의 세력기반은 봉토인 성도가 아닌 평북장군·진북대장군·정북대장군 등으로서 주둔한 업이다. || 다만 사마염 생전에는 중앙의 거대문벌이 일방적으로 지방을 압도하고 있었고, [[양호(삼국지)|양호]], [[두예#s-1]], [[장화(삼국지)|장화]], [[호분#s-1]]과 같은 측근들이 지방의 군정권을 분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럭저럭 황족을 통제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사마염 생전에는 번왕에게 그렇게 큰 힘을 주진 않았다. 사마염은 265년 27명의 황족과 왕족을 임명했는데 각 봉국은 5천에서 2만호 허가받은 사병은 5천명을 넘지 않았다. 허나 280년에 삼국을 통일하고 나서는 지방의 행정권(자사)과 군정권(도독)을 분리시키고, 그렇게 분리된 군정권까지 황족에게 나눠주었다. 즉 '''[[서주|황통을 지닌 사람이]] [[동주|인사권과 군사권까지 가지고]] [[춘추시대|지방에 할거한 형국이었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그렇다쳐도 그 이후가 더 심각했는데 290년 6명의 왕이 주 중심지에 도독으로 임명되어 군대를 지휘하게 하였고 290년 이후에는 도독이 주 자사를 겸직하여 군정과 민정을 통합시켰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마염이 죽고 뒤이어 즉위한 것이 백치 황제 [[사마충]]이었고, 이를 틈타 실권을 장악한 외척 세력이 멍청하게도 황족을 중앙에서 쫓아내는 정치적 도구로 군정권을 사용하면서 지방의 군정권은 오롯이 황족들이 나눠먹게 되었다. 여기에 불만과 위기감에 싸인 중소문벌들이 [[유리천장]]을 넘어서기 위한 방법으로 독자적 인사권을 지닌 황족들에게 붙으면서 이들을 중심으로 결집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물론 모든 개막장인 상황에서도 중앙 정부의 정책과 군대만 건전하게 유지되고 있다면 나라가 쪼개지던 최악의 상황은 [[오초칠국의 난|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황족 가운데 하나가 반란을 일으킨다고 해도 문제와 대안이 불분명한 이상 다른 황족이 한꺼번에 여기에 동조하기는 쉽지 않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중앙 정부의 토벌군으로 각개격파까지도 노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외척이었다. 사실 사마충 같은 백치가 별말없이 태자를 거쳐 황제에 등극한 것이 가충을 필두로 한 하는 귀족집단의 힘과 사마씨 정권의 나약함을 보여주는 일화다. 실제로 팔왕의 난을 일으킨 원인인 가남풍이 태자비가 된 것부터가 가충의 뒷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황제인 사마염이 사마충 같은 장애인을 장자라는 명분하에 황태자 자리에서 내치지 않은 결단을 내리지 못한 점이 크다. 사마염은 근본적으로 사마씨 정권 자체 문제도 있었으나 성품이 사마사, 사마소 등과는 달리 굳세지 못하고 너무나도 너그러웠던 측면이 이와 같은 면을 조장한 일면이 분명했다. 당장 서진의 귀족집단들 가운데서도 아무리 그래도 사마충은 황제가 되어선 안된다고 상주한 개국공신 [[위관]] 같은 이들도 있었고 사마염도 이를 주의깊게 들었으나 사마충의 아들 [[사마휼]]의 총명함을 믿고 그냥 방치해 버렸다. 왜냐면 사마충이 멍청하긴 해도 개인의 인성이 나쁘지 않았는데 고대에는 황제가 어리석어도 인성이 나쁘지 않다면 용인되는 경향이 있었기에 주위의 보정을 받으면 괜찮으리라 본 것이다. 사실 어느 전제군주제 국가나 권력의 중추인 군주에 문제가 생기면 시스템이 아무리 잘 되어 있어도 나라가 무너지는 현상이 발생하기 마련이며[* 당장 후대의 [[명나라]]에서 [[만력제]] 같은 황제로 나라가 사실상 멸망한 것을 생각해 보자.] 특히 개국 초 창업군주의 2~3대에는 명군이 나와야 그 왕조가 오래 갈 수 있는 법인데 하필 서진은 2대 황제가 사마충이었던 게 불행이었다. 이에 대해 조선의 학자 [[홍대용]]은 신랄한 촌평을 남겼다. >진주(晉主, 사마염)는 조씨(曹氏)가 고립되던 것을 거울삼아 종실(宗室)을 다량으로 봉(封)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서로 해치어서 거의 멸망할 지경에 이르다가 요행히 보존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종실을 봉해야 하겠는가? 봉하지 않아야 하겠는가? 말하자면, 봉하여도 또한 가할 것이고, 봉하지 않아도 또한 가할 것이다. 위(魏) 나라가 멸망하게 됨은 고립에 있는 것이 아니고, 진나라가 혼란하게 됨은 종실에 연유함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임금이 덕을 잃지 않으면 종실을 봉하지 않아도 고립되지 않을 것이고, 봉한다 하더라도 스스로 호위(護衛)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까닭은 생각하지 않고, 구구하게 봉하고 봉하지 않는 것만을 용심(用心)한다면 나는 동쪽에서 멸망하고 서쪽에서 생겨남을 볼 것이다. >---- >홍대용 《담헌서》 이런 일종의 방심은 삼국시대의 종결이란 시대의 전환에서도 비롯된 감이 있다. 서진의 전조인 조위에서 조비가 위를 승계할 당시 위는 일단 한 내부의 왕이고, 형식상 한(漢)은 껍데기만 남았지만 존속하고 있었다. 조비가 조식과 조창에게 형으로서 사적인 권위가 있었긴 했으나 조비 즉위 당시에는 ‘이론적’으로는 조비·조식·조창 모두보다 한의 권위가 더 높았다. 물론 이론적 권위일 뿐 실질적 권력은 없지만, 토템으로 쓸 수 있다는 것은 잠재적 위협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한의 권위는 빠른 선양으로 조비가 흡수했지만, 헌제 본인은 상당히 오랫동안 살아남았고, 위나라의 내분은 헌제를 다시 토템으로 올리는 상황을 불러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철저한 집안 단속이 필요했다. 또 조위가 비록 국력이 압도적이기는 하지만, 오(吳)와 촉(蜀)이라는 외부 세력과 경쟁하는 상태였다. 원씨의 사례에서 보듯이, 집안 싸움이 벌어지면, 외부 세력에게 지원을 요구하는 것은 일상적이었다. 이는 수춘 삼반에서 관구검과 제갈탄이 오나라에 구원을 요청하거나 제갈량의 1차 북벌이 양주 반란과 연계한 사례도 있던 것에서 증명된다. 하지만 천통을 이룩한 사마씨의 진나라는 상대적으로 이런 걱정이 없는 편이었다. 한의 권위는 너무 세대가 오래 지나면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고, 천하통일의 성과로 진의 권위는 위, 오, 촉한 등의 권위를 모두 능가하게 되었다. 집안에서 내분이 일어날 경우에, 결탁할 만한 외부 세력도 이젠 남아있지 않았다. 천하를 통일한 진나라에게 유의미한 경쟁 국가는 없었다. 기껏해야 국가조차 갖추지 못하고 문명도 뒤떨어진 부족 단위의, 흉노, 선비, 저, 갈, 강족의 위협은 분명히 있었으나 설사 황족간 내분이 벌어진다고 해도, 통일된 중화 제국 앞에서, 세력을 갖추지 못한 부족들이 정상적인 상황에서 위협이 되긴 어려웠다. 물론 현대 사학자들의 연구에서 드러나듯이 후한 말부터 북방 이민족들이 유의미하게 중원을 잠식하고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불과 수십년전에 중원을 일통한 서진 정권의 군대가 그렇게 마구잡이로 내전을 벌이다가 순식간에 소모될 것이며 이 과정에서 이민족들의 발흥을 방치하고 그들에게 힘을 실어주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당장 영가의 난 이후에도 서진-동진의 조각난 군대를 이민족들이 꽤 힘겹게 상대했어야 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서진 지배층의 이런 안이함과 방심이 서진의 멸망을 부른 것이라고 해도 이상하진 않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