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정환 (문단 편집) == 선수 경력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삼성 서정환.png|width=100%]]}}} || 1977년에 [[포항제철 야구단]]의 창단 멤버로 입단하여 [[실업야구]] 무대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1978년부터 군복무를 위해 [[상무 피닉스 야구단|육군 경리단]]에서 뛰었다. 1981년 제대 이후에 포철로 복귀했다. 1982년에 [[한국프로야구]]가 출범하자 탄생한 [[삼성 라이온즈]]의 원년 창단 멤버로, 개막전에도 출전했다. 그러나 당시 [[사이클링 히트]]를 치기도 했던 유격수 [[오대석]]에 밀려 주전 확보가 힘들게 되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해태 왕조의 유격수 서정환.png|width=100%]] [[파일:external/blog.koreadaily.com/04081426_1.jpg|width=100%]]}}} || [[https://m.sports.naver.com/kbo40/history/9|히스토리 09 서정환 "울면서 팔려가지 않았다"]] 결국 삼성에서는 자신의 자리가 없을 것이라고 판단, 이에 당시 삼성 감독이었던 [[서영무]]에게 트레이드를 자청하여 원년 시즌을 마치고 그 해 말 [[해태 타이거즈]]에 현금 1,500만 원에 트레이드되었다.[* 이는 '''[[한국프로야구]] 사상 1호 선수 트레이드이자 1호 현금 트레이드 사례'''로 기록된다. 정확히는 삼성이 서정환에게 준 입단 계약금을 해태 구단이 삼성에게 물어주는 조건이었다. 최초의 선수 간 트레이드는 1983년 6월 27일 이루어진 [[차동열]] - [[정영기]] 트레이드이다.]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술회하길 사실 해태 말고도 [[삼미 슈퍼스타즈]]와도 저울질을 했었다고 한다. 당시 가족이 서울 영동시장[* 현재의 [[서울특별시]] [[강남구]] [[논현동(강남구)|논현동]].] 인근에 거주하고 있었다 보니 [[인천광역시]]를 연고로 하는 삼미 정도면 서울에서 직접 운전해서 출퇴근해도 괜찮다고 판단했고 실제로 삼미 구단 실무자와 연봉 얘기까지 오가며 트레이드 직전까지 갔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해태 타이거즈]] 홍보과장이던 [[이상국]]이 찾아와서 간곡하게 설득하는 바람에 삼미에서 받기로 한 연봉인 1300만 원 보다 50만 원을 더 받기로 하고[* 당시 50만 원이면 웬만한 샐러리맨 두 달 치 월급이었다.] 해태로 결정했다고 한다.[* 만약 삼미로 갔다면 해태와 삼미 양팀의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서정환의 마음을 움직였던 말로는 "[[차영화]] 선수와 원래 [[키스톤 콤비]] 아니었냐? 그리고 [[김봉연]], [[김준환]], [[김일권]], [[신태중]]과 같이 한솥밥을 먹지 않았냐?"였다고 한다.[* 육군 경리단 야구단, 실업팀, 국가대표 등 여러 인연들이 있었다. 김봉연-김준환은 1년 선배, 김일권은 동기였다. 아마도 유급을 해서 그런 듯.] 해태 타이거즈 입단 이후 5번의 우승을 맛보게 된다. 당시 선수 대부분이 [[군산상업고등학교 야구부|군산상고]]-[[광주제일고등학교 야구부|광주일고]] 동문으로 이루어져서 호남 지역색이 강했던 팀인 해태에서 대구 출신으로 선수 생활을 성공적으로 마친 것으로 봐서는 친화력이나 적응력은 매우 뛰어났던 듯하다.[* 특히나 서정환이 선수 생활을 했던 1980년대 중후반까지는 '''[[영호남 지역갈등]]이 극에 달했던 시기였다.''' 또 [[양준혁]], [[손혁]] 등은 해태로 트레이드되자 이를 거부하다가 어쩔 수 없이 갔을 정도로 해태는 호남 외 타 지역 출신 선수가 적응하기 어려운 팀으로 알려져 있었다.] 훗날 인터뷰를 보면 야구 하는데 지역색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는 모습을 보였다. [[전설의 타이거즈]]에 출연해서 선수, 코치, 감독 등을 차례대로 하는동안 광주에서 24년을 거주했으며 김장을 할 줄 모르는 부인을 챙겨주며 동네 주민들이 김치를 챙겨준 따뜻한 일화를 소개했다. [[5.18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인해 세상을 떠난 호남지역 친구들을 떠올리다가 그만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그리고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해 깎아내리는 사람들에게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말라고 항상 충고해준다고 한다. 해태 내야진의 한 축이었으며, 호수비와 주루센스로 1980년대 해태의 우승에 큰 역할을 했다. 당시 해태는 내야수가 부족하여 원년 시즌을 시작하고 몇 달 후 실업야구팀 [[농협 야구단]]의 임정면[* [[마산용마고등학교 야구부|마산상고]]-[[건국대학교 야구부|건국대]] 출신으로 1976년 [[이영민 타격상]] 수상자였다.]을 급히 스카웃하여 내야로 돌릴 정도였다. 1986년에는 도루왕을 하기도 했다. 이때 즈음 해태의 1번타자였다[* 바로 전해까지 해태 1번타자이자 도루왕은 [[김일권]]이었다. 그런데 1986년과 1987년에 다리 부상으로 김일권이 타율 2할도 못칠 정도로 부진하면서 1번자리가 서정환에게 넘어간다. 그리고 김일권은 1987시즌이 종료되면서 [[태평양 돌핀스]]로 트레이드됐다. 해태의 1번타자 자리는 서정환의 은퇴 이후 [[이순철]]이 이어받게 된다.]. 그리고 몇년 더 뛰었으면서 88년 .323을 찍기도 했다.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밝히길 시즌 초반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체력이 약해 여름부터 스탯을 깎아먹는 게 패턴이었는데 그해에는 7월경 부상을 입어 1달정도 경기를 못나갔고 이 때 체력을 벌어놨다고 한다.[* 실제로 1988 시즌 타격 4위였고 336타석에 들어섰는데, 이 시즌 한국프로야구 규정타석은 334타석으로 규정타석을 턱걸이로 채웠다.] 광주에 살면서 맛있게 먹은 음식으로 생고기와 홍어탕을 꼽았는데 [[김봉연]], [[김성한]]과 함께 먹으러 다녔다고 한다. 1989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 선수 시절에는 [[차영화]]와 함께 나름대로 안정적인 키스톤 콤비를 꾸몄고, 1987년 [[백인수|백인호]]가 입단하자 유격수 자리에서 밀려나 주로 2루수로 출전하였다. 굉장히 마른 체형으로 [[김응용]] 감독 이하 당대의 해태 선수 출신치고는 왜소한 체형[* 코치, 감독시절 타격 방법으로 계속 부딪혔던 [[최익성]]은 20대부터 웨이트를 열성적으로 하고 후배들에게 퍼트린 근육질의 선수이다]으로 전 경기 출전을 할 만한 체력이 되지 못해 고생했다고.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