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정학 (문단 편집) === 귀국 이후 === >일본 선생님이 일본여자와 결혼 하라고 하시는 걸 “저는 한국여자와 결혼 할 겁니다.”라며 한국에 오셔서 목사님 소개로 한국여성과 결혼하셨고, 일본에 계실 때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추천해 주겠다는 선생님 말씀에 정중히 거절하셨다. 그 후 한국에 너무나 오고 싶어 검도선생님께 여러 번 부탁하여, 그 후 일본의 원로 검도인 나카노 소스케의 초청을 받아 한국으로 귀국. 경기도 경찰국 검도조교로서 3개월 후에 8.15 해방을 맞이하셨다. >---- >아들 서민석 총사 인터뷰 中 광복 후 혼란한 시대에 치안의 필요성에 따라 미군정 하에 경찰이 탄생하였고, 서정학은 해방 후 처음으로 미군군사교육을 받은 후에 교육관으로 경찰을 시작했다. 후에 조병옥 미군정청 경무부장(현 경찰청장)에게 부탁하여 경찰 내에 검도 수련를 허락받았고, 경찰에 복무하면서 검도를 뿌리내리기 위해 노력했다. 1945년 대한검도회의 전신인 대한검사회를 창립하였다.[* 당시 국내 유일이자 최고단인 5단.] 1947년에 서울시경찰관검도대회가 처음으로 개최되었고, 경찰 상무회 조직의 활성화에 노력을 기울인다. 6.25 전쟁에 ‘경찰 특공대장’을 맡아 1,200명의 대원과 함께 민간피난민 후송 및 전투에 참가하였다. 후에 그 공로로 경무대경찰서장에 임명되었고, 태극무공훈장을 수여받았다. 1948년 6월 13일 창덕궁에서 모임을 가지고 ‘대한검사회가 조직되었고, 1953년 경무대 경찰서장 시절 대한검도회가 창립되어 대한체육회에 가입하였다. 치안국장에 취임 후 경찰에 각 시도에 체육관(사무관급) 제도를 신설하여, 당시 생활이 어려운 검도, 유도 고단자 선생들이 수련하고 보급시킬 수 있는 기틀을 만들었다. 1953년 이승만 대통령이 “검도는 일본의 잔재이니 없애라”는 명령이 떨어졌을 때 경무대경찰서장(현 경호실장) 재임 시 3번 진언하여 검도가 이어지게 된다. 강원도지사 시절 4.19혁명 11개월 전인 1959년 5월 13일부로 당시 부정선거를 지휘하던 [[이기붕]] 국회의장의 말을 거절하여 1959년 5월 13일부로 파직되었다.[* 부정선거를 반대하던 7명의 시도지사가 파직되었고 자유당 출신들로 그자리가 채워졌다.] 그리고 제 2공화국이 탄생하고서 전직 고위관료들에 대한 부정 감사에서 아무런 문제점도 없었고, 재산에 대해서도 조사를 받았지만 어떠한 문제점도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