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인 (문단 편집) === 시작 === 1575년에 초창기 사림([[명종(조선)|명종]] 대에 이미 정계에 진출한 인물[* 정확히는 [[을사사화]] 때 살아남은 [[사림]]. 이때 숙청당한 [[이언적]]이 동인 계보도의 큰 스승격이 되기 때문에, 동인은 이 시기 외척 세력에 대해 강경한 대응을 주장했다.])이 모여 출발한 붕당이다. 분파의 계기가 된 심의겸의 집이 서울 서쪽에 있었다고 해서 서인이라고 한다. [[심의겸]]은 명종의 처족([[인순왕후]]의 동생)으로, 사화를 한 번 막은 사림의 공로자였다. 그는 훈척이 될 수 있음에도 사림의 길을 걸은 곧은 선비로 명망을 얻었었는데, 이조전랑 자리를 두고 김효원 등과 대립하면서 순식간에 훈척 나부랭이로 찍혔다. 곧 사림은 서인과 동인으로 갈라섰다. 흔히 국사 시간에 붕당의 대립을 이조전랑 자리다툼 정도로 외우는 사람도 많은데, 서인과 동인의 정치적 대립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며, 10년도 안 돼 양상이 계속 달라진다. 명종 대의 [[박순(1523)|사암 박순]]이나 [[정철|송강 정철]] 등은 [[훈구파]] 들이 일으킨 사화 때문에 고생한 사림들이었다. 중종 대의 훈척들을 명종과 선조를 거치면서 어느 정도 찍어내는 데는 성공했으나 혁명적 변화는커녕 훈구파 때와 실질적인 다른 점이 보이지 않았다. 이에 반해 후배 사림들은 아직 고려의 때를 완전히 벗겨내지 못했던 당시 조선 서민 곳곳에까지 어떻게 하면 유교 왕도 정치를 이식할 수 있을까 치열하게 고민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선배들의 노고를 알아주기 보다는 현실 정치에 안주하는 선배들을 대신해, [[조광조]]가 꿈꿨던 유교적 이상세계를 자신들의 손으로 조선에 만들고 싶었다. 붕당의 근본적인 이유 즉 붕당의 시초가 왕의 혈통 즉 정통성에서 비롯됐다고 보기도 한다. 왕실 최초로 적통이 아닌 방계 혈통이자 후궁의 손자인 [[선조(조선)|선조]]가 즉위하자 붕당이 꿈틀거렸다. 왕의 외척인 심의겸을 통해서 왕권을 견제하려는 서인과 이에 맞서 외척 세력을 척결하려는 동인으로 갈라진다. 정통성이 약한 왕이 즉위할 경우, 왕은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 조정에는 피바람이 불었다.[*오류 선조의 정통성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애초에 선조는 '''선왕인 명종의 왕비, [[인순왕후]]가 직접 정해서''' 정통성 문제 운운할 일이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선조 위로 형이 2명 있긴 했는데 '''정작 그런 약점을 명분으로 한 역모사건 하나 없었다.'''] 그리고 심의겸은 인순왕후의 친척이라서 외척이긴 한데 윤원형 만큼 가까운 외척도 아니었다. 그나마 인순왕후가 수렴청정을 오래 하려고 했거나 그 이후에도 권력을 놓지 않으려고 했다면 모를까 인순왕후는 단 7개월만에 수렴을 거두었다. ] 이는 숙종의 경우와는 결이 다른데, 숙종이 신하들을 쥐락펴락할 수 있었던 힘은 그가 정비(正妃) 소생으로 원자로 태어나 세자로 자랐고 그리고 즉위하였으니 정통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숙종의 정비(正妃)인 인현왕후는 아들이 없었으니 이후 왕통(王統)을 둘러싸고 피바람은 이미 예고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