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울특별시/역사 (문단 편집) === [[삼국시대]] === >마침내 한산(漢山)에 이르러 [[북한산|부아악(負兒嶽)]]에 올라가 살 만한 곳을 찾아보았다. [[비류]]가 바닷가에 살고자 하니 열 신하가 간하였다. >"[[강남|이 강의 남쪽 땅]]은 북으로 [[한강|한수(漢水)]]를 두르고, 동으로 [[남한산|높은 산]]에 의지하며, 남으로 옥토를 바라보고, 서로는 [[황해|대해]]가 막고 있으니 '''그 천험지리(天險地利)는 쉬이 얻지 못할 형세입니다. 이곳에 도읍을 짓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비류는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서 [[인천|미추홀(彌鄒忽)]]로 돌아가 살았다. 온조는 하남의 [[위례성]](慰禮城)에 도읍을 정하고, 열 신하의 보좌를 받아 국호를 십제(十濟)라 하였다. >---- >─ [[삼국사기]] [[고대]]부터 [[한강]]의 잦은 범람으로 땅이 비옥했었다. 수도로서의 최초 기록은 [[백제]]의 [[온조왕]]이 세운 [[위례성]]이다. 전통적으로 백제 위례성(한성)과 고려 남경/조선 한양이 별 관련이 없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건 반만 맞는 소리다. 현대의 서울시계 기준으로는 같은 서울이지만 현재의 풍납토성 일대는 광주군에서 1963년에 편입되면서 서울로 들어온 것이고, 전통적으로 강북은 양주와 강남은 광주라는 다른 행정체계에 묶여 왔다. 그러나 그렇다고 위례성의 역사가 조선의 한성부와 아예 관련이 없다는 통념 역시 매우 잘못되었는데 한성부의 뿌리인 고려 남경의 근원을 백제 수도 한성으로 보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고려사 지리지에서도 [[http://db.history.go.kr/KOREA/item/level.do?itemId=kr&bookId=%E5%BF%97&types=r#detail/kr_056r_0010_0030_0020|고려 남경을 백제의 고도로 보는 당대인의 인식이 드러난다.]] 따라서 고려 남경의 후신인 조선 한성부의 뿌리를 백제에서 찾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다만 근초고왕대 남한산에서 남경이 위치한 한성으로 옮겼다고 적힌 것으로 보았을 때 한성백제 전체 역사와는 별개로 풍납토성이 위치한 남한산은 별개의 지역으로 보았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서도 [[http://sillok.history.go.kr/id/kda_400020|남한산은 광주라는 인식이 드러난다.]] 그러나 한양 근교의 피난처인 남한산성의 존재와 [[23부제]] 시행 당시 한강 이남 고을 중 유일하게 한성부에 편입한 것으로 보았을 때 광주 역시 완전히 별개의 지역이라기보다는 한양 근교의 배후지로 인식하였다.][* 거기다 다른 고도의 예를 봐도 그렇다. [[중국 7대 고도]]로 유명한 [[시안]]조차 사실 옆 도시인 셴양에 위치했던 [[진나라#s-1.2.1|진나라]]의 역사마저 자기 도시의 역사로 간주하지 별개의 도시의 역사로 여기지 않는다. 시안과 셴양은 하남위례성과 한양도성간의 거리와 비교해서도 훨씬 멀다. 다른 도시이기는 하되 분명히 같은 지역에서 일어났기에 같은 뿌리의 역사로 봐도 무방하다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백제의 기록이 별로 잘 남아 있지 않기는 하지만 [[풍납토성]], [[몽촌토성]], [[석촌동 고분군]]의 위치로 보았을 때 서울시계 내임은 거의 확실하다. 이때 이미 강남에 도읍을 정했다고 해놓고 13년에 [[소서노]]가 죽자 다시 강남에다가 도읍을 정한다고 되어 있다. 이 때문에 온조왕 원년의 위례성을 하북위례성, 13년의 위례성을 하남위례성이라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지만 원년의 위례성도 '일단은' 기록상으로 하남에 있었다. [[삼국유사]]에서는 원년의 위례성은 사천(蛇川)으로 지금의 [[천안시]] [[직산읍]]이며, 13년의 도읍은 한산(漢山)으로 지금의 [[경기도]] [[광주시|광주]](지금은 분리됐지만 가까운 현대까지만 해도 강남구, 송파구, 강동구, 성남시, 하남시 등이 모두 광주군이었다.)라고 하는데 위례성 직산설은 이미 고고학적으로 부정되는 상황[* 오히려 천안 직산 근처는, 백제의 위례성이 아니라 백제 이전 마한 맹주였던 목지국으로 비정된다.]이고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사성(蛇城)의 존재로 비추어 원년의 위례성도 역시 한강 이남의 멀지 않은 곳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여하튼 이 시기의 위례성은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송파구]] 일대로 추정되었으며, 이후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발굴되면서 확실시된 상황.[* 이는 삼국사기에서 백제 위례성이 남성과 북성으로 이루어져있다는 기록과 합치된다.] 다만 여기서 삼국사기 초기기록이 으레 그렇듯 온조왕조의 기년은 비판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일단 현재까지의 발굴 조사에 따르면 한강 유역에 백제 건국 세력 중 하나가 유력한 고구려계 유이민이 처음 등장하는 시기는 최대로 올려잡아도 3세기 중반이 한계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고구려계 유이민 세력은 그 전에는 2세기 중반에 임진강에 문득 갑자기 나타나서 약 백 년 동안 그곳에서 세력을 유지하다가, 알 수 없는 이유로 3세기 중반에 갑자기 임진강 일대를 완전히 떠난 다음 한강 유역에 기존 있던 해상 세력과 연합하여 고대 국가를 세운 것으로 드러난다. 하북 위례성은 이 맥락에서, 정말로 있었다면 임진강 유역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으며 따라서 강북 일대는 지금 와선 설득력이 떨어진 편이다. 박정희 정권 시절 이 일대가 개발되면서 많은 한성백제 시대의 고분군이 파괴, 소실되었으나 그 시기에도 문제 의식을 가지고 이를 막으려 했던 학자들이 있었고, 그나마 남은 자료에 대해 이들이 기록을 남겼으며, 어느 학계나 그렇듯 지금 나온 고고학적 결과가 나중에도 옳을거라 맹신하는 태도는 위험하지만 박정희 정권이 유독 3세기 중반 이후 고구려계 무덤만 족집게식으로 집어서 부수었다거나, 그 이전 시기 토돈분구묘제 집단 묘제만 보존했을거란 이상한 가설은 더더욱 성립하지 않음을 유념해야 한다. 백제의 건국 시점에 대해서는 여러모로 견해를 열어둬야 하지만 일단 밝혀진 사실로만 보면 서울 정착만큼은 3세기 중반이 상한임을 유념해야 하며, 또한 백제 건국와 온조 남하, 서울 정도 시점은 모두 분리되어서 해석 가능하다는 가능성도 열어두어야 할 것이다. 한편 후대로 오면서 지금의 강남-강북과는 반대로, 그 주위 북서방으로 영역이 확장되자 백제의 도심지인 강남은 한산(漢山), 부도심인 강북은 북한산(北漢山)으로 나뉘어 불리게 되었다. 중간에 [[근초고왕]]이 한강을 건너 북한산으로 천도하기도 했지만 26년 뒤 [[광개토대왕]]이 백제를 [[개발살]]내고 [[아신왕]]의 항복을 받을 때 [[한강|아리수]]를 건넌 것으로 보아 얼마 가지 못하고 [[진사왕]]이 찬탈하고 찬탈당하는 와중에 다시 강남으로 돌아온 듯 하다. 즉 고구려의 침공을 대비하여 한강을 북쪽의 천연 방어선으로 선정했던 것. 실제로 이 작전은 주효하여 [[고구려]]의 [[광개토대왕]]도 한강 이북까지만 진출할 수 있었고 강남으로의 진출은 저지되었다. 이때 광개토대왕의 고구려가 그 선에서 멈춘 건 고구려가 딱히 요동 진출에 더 집중해서는 아니었다. 실제로 후연과 백제 모두 만만찮은 상대였기에 고구려가 어느 한쪽에 주력을 집중하면 다른 쪽이 털리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고구려가 후연에게 대패하고 요동 방어선에 큰 구멍이 난 건 광개토대왕이 직접 지휘하는 고구려군 주력이 아신왕의 항복을 받아내고 있던 시점이었다. 마찬가지로 몇 년 후 아신왕이 고구려와의 약조를 깨고 가야와 왜 등에게 얻은 원병과 함께 한북 및 황해도 일대를 수복할 때는 고구려가 후연에게 복수전을 펼쳐 빼앗긴 영토를 모두 수복함은 물론 후연의 수도 용성 일대를 초토화하여 적잖은 인민과 재산을 약취하고 있을 때였다. 후연을 단단히 손봐준 고구려군이 복귀해서 여전히 도발을 멈추지 않는 백제-왜-가야 연합군을 격파했지만, 광개토대왕의 실력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아신왕이 몇 번 패배는 겪었지만 개성 일대 방어선에서 어떻게든 방어를 굳혀 고구려군을 거기서 저지했다. 일단 원정에 나서면 이렇다할 패배는 겪어본 적 없는 광개토대왕이었지만 거기서 저지당했을 때 한계가 거기까지임을 인정하고 멈춘 것이다. 일단 흥미로운 건 아신왕-개로왕 때 고구려 VS 백제 구도는 흡사 오늘날 남북한 대치 구도와 비슷한데, 여기서 증명되는 것은 '''경기 북동부-강원 북서부 일대인 한강 상류 산악 지역과, 개성 청목령 일대 방어선 이 모두가 날아간 상황에선 서울 방어가 대단히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개성 없이도 한강 상류 산악 지역에 한해선 근초고왕 때보다도 압도적으로 유리한 조건에서 서울을 잘만 방어하고 있으나 적어도 휴전 조약 체결 당시의 이승만 대통령은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었다. 이는 개성 방어선과 영서 일대 방어선이 모두 무너진 뒤 답이 없이 두 차례나 함락당한 한성백제의 사례에서 증명되는 것이며, 현대 대한민국 같은 경우 개성은 비록 없으나 한성백제와는 달리 적어도 영서 일대 방어선 상황에선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임을 참작해야겠다. [[장수왕]] 때 한성백제가 망가졌던 건, 개로왕이 도림에게 속아 개성 일대 방어선 구축이나 확보에는 무관심한 채 엉뚱하게 한성 방어에만 열을 올렸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개로왕]]이 전사하고 위례성을 빼앗기자 [[문주왕]]이 급하게 웅진(공주)으로 천도한 5세기 이래로도 지금의 서울 지역은 강남의 한산군(漢山郡)과 강북의 북한산군(北漢山郡)으로 고스란히 남았다. 단, 지금의 강서구-양천구 일대는 제차파의(조선시대 [[양천군]]), 구로구 서부는 주부토(지금의 부평, 부천), 금천구-관악구-영등포구(+광명시) 일대는 잉벌노(조선시대 시흥), 서초구-동작구(+과천시, 안양시, 군포시) 일대는 동사힐(지금의 과천) 소속으로 이어졌다. 이들이 서울에 편입되는 것은 후술하겠지만 현대에 들어와서의 일이다. 이러한 강남-강북 구도는 삼국시대가 끝나서도 강남의 한주(漢州)와 강북의 한양군(漢陽郡)으로 정리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