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울대학교/학부/사회과학대학/정치외교학부 (문단 편집) === [[테크노크라트]]의 요람 === > 정치학과의 목적으로서는 대체로 다음의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중략) 둘째, 공직에 취임하기에 필요한 준비이다. 공직이라 함은 일반 국가공무원직만이 아니라 사회단체까지도 포함한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중요한 사항에 대한 결정력을 갖는 정치인이 아니라, 결정된 사항을 충실히, 그리고 능률적으로 집행할 수 있는 유능한 행정가의 양성이다. > > 서울대학교 학생안내(1963)[* 당시 정치학과에 재직 중인 김영국 교수가 썼다.] 창립 이후 정외학부가 우리 사회에서 수행한 또다른 주요한 기능 중 하나가 공직에 종사할 직업관료의 양성이었다. 전쟁 직후의 폐허에서 빠져나올 길이 없던 당시의 한국에서 사회계열 졸업자를 받아줄 번듯한 직장은 찾기가 어려웠다. 이 때문에 다수의 정치학과, 외교학과 졸업자 다수가 그나마 대학에서 배운 전공지식을 입직 시의 필기고사에서 활용할 수 있는 정부부처, 국책은행 등의 문을 두드렸고, 1960년대 이후의 [[한강의 기적|고도성장기]]에 이들이 경제의 근대화, 사회의 근대화, 그리고 국제사회에서의 한국 위상 제고 등에 있어 중대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1950년대의 정치학과(와 외교학과)는 전술한 바와 같이, 문리대 내 타 과에 비해 기형적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큰 규모의 학과였으나, 80여 명에 달하는 졸업생을 수용할 민간의 기업은 역시 앞서 말한 대로 마련되지 않은 상황이 당시의 한국이었다. 이 때문에 이 시기 정부관료의 등용문이었던 [[고등고시]] 행정과가 주된 선택지로 각광 받았고 실제로 정치학과 출신 합격자가 적지 않았다. 첫 합격자가 나온 고시 행정과 2회에서는 38명 중 확인 가능한 4명이 정치학과 출신이었다.[* 고석윤([[고건]]의 형, [[산업통상자원부|상공부]] 상역국장), 김석준([[문공부]] 예술과장), 신명범([[기획재정부|재무부]] 서기관), 김세준([[민주공화당]] 수석전문위원)] 고시 4회에서는 24명 중 4명[* 이상신(경찰전문학교 부교장), 연하구([[외교부|외무부]] 본부대사), 정순근(주[[서독]]대사), 박창남(주[[가나]]대사)], 고시 5회에서는 9명 중 3명[* [[엄영달]](국회의원), 이남기([[코이카]] 총재), 이원호(주[[스위스]]대사)] 등의 합격자를 배출하였다. 그러나 이들 초기 고시 기수 합격자는 1960년 4.19 혁명 전후로 [[이승만 정부]]가 몰락하면서 적지 않은 수가 자의반 타의반 공직에서 물러나 변호사 개업이나 실업가로의 변신을 꾀하는 등의 선택을 하게 된다. 본격적으로 공직에서 활약하게 된 건 50년대 중반에 고시에 합격한 이들이었다. 정치학과 출신은 고시 7회(1955년) 합격자 41명 중 9명[* [[임영득]](국회의원, [[전매청]] 관리관), 박만영(내무부 보안과장), [[전용성]](변호사), [[최각규]](경제부총리), [[오재희]](주[[일본]]대사, [[외교부|외무부]] 차관), 신기흠(주[[나이지리아]]대사), 한우석(주[[네덜란드]]대사), [[최호중]](통일부총리, [[외교부|외무부]] 장관), 홍성운(서울가정법원장)], 고시 8회(1956년) 합격자 11명 중 1명[* [[이상옥(1934)|이상옥]]([[외교부|외무부]] 장관)], 고시 10회(1958년) 합격자 27명 중 3명[* [[박봉환]]([[동력자원부]] 장관), [[한갑수(정치인)|한갑수]]([[농림부]] 장관), 국회의원), [[유종하]](전 [[외교부|외무부]] 장관)], 고시 11회(1959년) 합격자 36명 중 5명[* 최규봉(법관), 이기욱([[기획재정부|재무부]] 차관), [[서석준]](경제부총리), [[윤항렬]](국회의원, [[농림수산부]] 차관보), 김석규(주[[일본]]대사),], 고시 13회(1961년) 합격자 72명 중 8명[* [[노건일]]([[국토교통부장관|교통부장관]]), [[고건]]([[대통령 권한대행]]), [[전석홍]](국회의원, [[전남지사]]), [[정영의]](전 [[기획재정부|재무부]] 장관), 권인혁(주[[네덜란드]]대사), 정경일(주[[이란]]대사), 허승(주[[세네갈]]대사), 이장춘(주[[오스트리아]]대사)], 고시 14회(1962년) 합격자 38명 중 2명[* 이형구([[기획재정부|재무부]] 차관), 이승곤(주[[오스트리아]]대사)] 등이다.[* 고등고시 행정과는 14회를 끝으로 폐지되었으며, 이후는 [[행정고등고시]]로 대체] 또한, [[김재익]], 김건[* [[한국은행]] 총재 역임. [[나혜석]]의 3남] 등 한국은행과 같은 국책은행에서 공직을 시작한 이들도 있다. 이렇게 공직에 입직한 이들은, 경제관료로서, 또는 내무관료나 외무관료로서 한국을 절대빈곤에서 탈출시키고 나아가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대우 받도록 헌신하게 된다. || [[파일:external/blog.joinsmsn.com/4a207335b52ab.jpg|width=100%]] || || {{{#ffffff '''김재익(金在益, 1938~1983)'''}}} || 우선, 경제관료로는 [[대한민국 제5공화국]] 시기 한국 경제정책을 진두지휘한 [[김재익]]이 대표적이다. 그는 한국은행 입행 및 유학 생활을 거쳐 당시로서는, 그리고 지금도 보기 드문 [[스탠퍼드 대학]] 한국인 [[경제학]] 박사로서 귀국하게 된다. 국가 주도 발전의 경제 컨트롤타워였던 [[경제기획원]]에 스카웃, 커리어를 밟아가며 [[대한민국 제5공화국]]이 출범하자 [[수석비서관|경제수석]]에 발탁, 물가안정화와 정보화, 금융시장의 체질 개선 등 80년대 경제정책을 진두지휘한다. 김재익의 입학 동기였던 [[서석준]] 역시 대표적인 경제관료이다. 고시로 입직한 그는 마찬가지로 [[경제기획원]]에 근무하면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실무를 초기부터 제4공화국 말기까지 참여하고, [[대한민국 제5공화국]] 출범 후에는 45세의 최연소 [[경제부총리]]에 발탁된다. 우정이 돈독했던 [[김재익]]과 [[서석준]]은 한편으로 전자가 보다 과감한 미국식 시장화를, 후자가 중화학공업화를 비롯한 70년대의 국가주도 경제성장의 가속화를 각각 원하는 상이한 지향점을 갖고 있었다는 것 역시 흥미롭다. [[김동휘]] 동력자원부 장관, 이기욱 재무부 차관 등도 동시기에 활약한 유사한 연배의 인물들이다. 그러나 이들 모두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로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 [[파일:고건권한대행3123123.jpg|width=100%]] || || {{{#ffffff '''고건(髙建, 1938~)'''[* 사진은 대통령 권한대행 수행 당시]}}} || 동시기 내무관료로는 행정의 달인이라 불린 [[고건]]을 꼽지 않을 수 없다. 고시로 입직한 고건은 [[행정안전부|내무부]]와 지방을 오가며, 농촌의 근대화 사업인 [[새마을 운동]]의 기획과 추진에 앞장선다. 이 시기의 내무관료에게는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 그리고 폭증하는 도시 인구 유입 등의 미증유의 상황에서 어떻게 [[지방(지리)|지방]], 특히 [[농촌]]을 이 근대화의 흐름에 뒤쳐지지 않으면서도 도시의 논리에 종속되지 않도록 하는 기술적 능력이 요구되었다. 최연소 [[전남지사]], [[서울시장]], [[행정안전부|내무부]] 장관 등 중앙과 지방, 농촌과 도시의 요직을 오가며 고건은 공직 커리어 대부분을 이 사업에 매진한 셈이다. [[노건일]], [[전석홍]], [[강운태]] 등의 내무관료 역시 같은 역할을 수행하였다. || [[파일:external/news.stanford.edu/un_news.jpg|width=100%]] || || {{{#ffffff '''반기문(潘基文, 1944~)'''}}} || 마지막으로 외무관료 역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초기부터 외교관 선발을 목적으로 설치된 고등고시 행정과 제3부[* 정치학, 외교사 등 외교 관련 교과가 응시과목이었으며, 일제의 [[고등문관시험]] 외교과와 과목이 동일하였다.]와 정치학과의 유일한 국제정치 전임이자 한국 국제정치학의 비조인 [[이용희(1917)|이용희]] 교수의 존재로 많은 학생들이 외교관의 길에 뛰어 들었다. 외교로 인해 분단되고, 절대 빈곤에 머물러 국제사회에서 온전한 시민권을 얻지 못했던 한국인들에게 외교와 외교관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하게 비쳤을지는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고등고시 행정과 시절부터 [[이상옥(1934)|이상옥]], [[유종하]] 등 정치학과 출신 외교관이 배출되었으며, 1955년 외교학전공 신설 및 1959년 외교학과 독립 이후 외교학과는 외교관의 산실로서 기능하게 된다. 고등고시 폐지 및 외무고시 부활 간 짧은 공백기를 제외하면, 외무관료 배출 역할은 여전히 왕성하게 기능 중이다. 한국인 최초의 UN 사무총장인 [[반기문]]은 그러한 전통이 축적된 산물로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특기할 만한 점은, 전술한 학생운동에 뛰어든 활동가들과 테크노크라트가 서로 이질적인 집단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가령, 외무관료로서 왕성한 커리어를 거둔 [[엄영달]]은 반탁운동가였고, 내무관료로서 직업이 장관이라는 말까지 들은 [[고건]]은 50년대 진보성향의 대표적인 독서회였던 신진회의 구성원이기도 했다. 특히 [[4.19 혁명]]은 1960년 당시 정치학과(및 외교학과) 3, 4학년이 주도하였는데, 위에서 인용한 4.19 혁명 선언문 작성자 [[이수정]]은 청와대 정무1비서관, 공보수석비서관을 거쳐 [[노태우]] 정부 시절 문화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역시 운동에 주역으로 참여한 [[노건일]], 박운서, 이장춘 등도 관계 각 분야에서 주요 직위를 역임하였다. 요컨대 초, 중기의 정치학과와 외교학과는 전방위적으로 한국의 민주화와 산업화, 근대화를 이끈 인력의 산실이었던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