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영춘 (문단 편집) == 활동 내역 == 원래는 극장에서 간판을 그리던 화공 출신으로, 어느 날 무대에 출연할 예정이었던 배우 한 명이 사정으로 불참하면서 악극단 단장의 제의를 받고 대타로 출연하게 되었는데 이 때부터 발군의 연기 실력을 보여주었다. 이를 계기로 악극단의 정식 배우로 발탁되어 1950년대 악극 활동을 통해서 세간에 알려졌다. [[1961년]] [[MBC]]의 개국과 더불어 방송가에 입문하였다. [[웃으면 복이와요]] 등 코미디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큰 인기를 얻었고, 이를 계기로 1960년대에 스타덤에 오르며 당대 최고의 코미디언 [[구봉서]], [[배삼룡]]과 맞먹는 인기를 얻었다. 1960년대를 시작으로 1970년대 후반까지 이어졌던 그의 극장식 패키지쇼, 이른바 서영춘쇼 또한 큰 히트를 치게 된다. 당시 '''살살이'''라는 별명으로 유명세를 탔다. 1970년대 중반 [[동양방송|TBC]]로 자리를 옮기며 '''고전 유모어극장''' 등을 통해서 1970년대 중후반 부터, 1980년대 초반 [[이주일]]이 등장하기 전까지 한국 코미디계 부동의 1인자 자리를 유지하였다. 1960, 70년대 구봉서, 배삼룡 등과 코미디 트로이카로서 인기를 나눠 가졌다고는 하나, 적어도 1970년대 중반기부터 누가 1인자였냐고 묻는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서영춘을 첫 손가락으로 꼽을 것이 분명하다. 다만 전성기 시절에 관한 부분은 더욱이 자세히 봐야 하는 게 그가 구봉서, 배삼룡보다 데뷔 시기나 주목받은 시기가 확실히 눈에 띄게 늦은 편이다. TV 방송 이전 악극단, 영화 시절 그리고 웃으면 복이와요 초창기 시절만 보더라도 메인은 서영춘이 아닌 구봉서, 배삼룡이었다. 실제로 웃으면 복이와요 초기 오프닝을 보면 배삼룡, 구봉서의 이름이 맨 처음에 등장하고 이 두 명을 중심으로 오프닝이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https://youtu.be/CxMGWjLKOYA|1969년 당시 웃으면 복이와요 오프닝 링크]] 사실상 말이 트로이카지 선배 구봉서, 배삼룡의 인기가 조금 식어갈 시기에 서영춘이 원톱급으로 발돋움한 시기가 맞물렸으며 사실상 당시를 보면 완전한 트로이카 체제보다는 구봉서, 배삼룡에서 서영춘으로 이어진 세대교체로 봐도 좋을 정도다.[* 정확히는 악극단 시절부터 1970년대 초까진 구봉서, 배삼룡이 우위였고 1970년대 중후반 경부터 서영춘의 우위라고 보는 것이 맞다. 다만 서영춘 역시 악극단 시절부터 최고의 톱스타였으며 구봉서, 배삼룡 역시 1970년대 중후반에도 전성기를 구가했다. 이렇듯 전성기 시절 3명이 팽팽하게 인기를 가져갔으며 트로이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실제로 서영춘은 저 두 명을 깍듯하게 선배로 대했으며 아래에서 후술된 대로 특히 구봉서는 막 주목받던 시기의 서영춘을 데리고 다니면서 코미디계 인맥도 소개시켜주고 술도 가르치고 하던 직속 선배였다. 즉, 시대적으로 약간의 개인차가 있었을 뿐 누구 한 명이 어느 특정 시대에 완전히 압도했던 상황은 아니라고 보는 것이 정확하다. 그리고 이들이 엎치락 뒤치락 하던 시기가 한동안 지속되던 때에 [[이주일|다들 알다시피 어떤 얼굴천재가 갑툭튀해서 연예계를 뒤엎어 버렸으니...]][* 여담으로, [[이주일]]의 재능을 가장 먼저 알아본 사람도 바로 서영춘이었다고 한다. 어느 날 방송국 대기실에 들어온 이주일을 본 서영춘은 속으로 '저 놈 방송에 나오면 무조건 뜬다!'고 예상했는데, 약간의 곡절을 겪은 후 그의 예측은 적중했다.] 서영춘은 특히 무대 위에서 [[애드립]]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희극인이었다.[* 그래서 같이 연기하던 코미디언들은 대본에서 벗어난 서영춘의 뜬금없는 애드립에 빵 터져 NG를 내기 일쑤였다. 반면 [[구봉서]]는 영화배우로도 활동한 경력 때문인지 대본에 충실한 희극 배우였다.] 변화무쌍한 얼굴 표정과 판타스틱한 특유의 슬랩스틱 코미디로 누구도 흉내내기 힘든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였다. TV가 대중화되면서 실질적으로 1세대가 된 당시 악극단 출신 코미디언들 대부분이 그랬듯, 연기 패턴은 왜정 시대부터 내려온 악극, 만담에서 출발한 것이 많고 내용도 일본 것을 그대로 번안한 것이 상당수 있었다. 예를 들어, 서영춘이 지상파에서 선보인 "[[김수한무 거북이와 두루미 삼천갑자 동방삭 치치카포 사리사리센타 워리워리 세브리깡 무두셀라 구름이 허리케인에 담벼락 담벼락에 서생원 서생원에 고양이 고양이엔 바둑이 바둑이는 돌돌이]]" 어쩌고 하는 긴 이름 가진 아이 이야기도 일본 설화에 바탕을 둔 것이다. 사실 한국의 문화 예술에서 당시에 이미 강대국으로 발돋움한 일본의 그림자가 [[일제강점기]] 이후에도 여전히 짙던 시절이었고, 인터넷이 발달되지 않았고 저작권 의식이 희박했기에 부산이나 경남 일부 지역 사람들을 빼면 볼 수 없던 일본 TV 프로그램의 포맷이나 내용을 방송국들이 많이 베끼던 시절이었다. 당시 일본 방송의 성적인 수위까지는 따라할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2000년대 이전의 프로그램을 보면 묘하게 일본색이 난다는 것을 알 수 있는게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인들이 세운 극장에서 공연을 하던 배우들이 TV 시대가 되면서 TV에 등장한 것도 중요한 이유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서영춘을 비롯한 당시 코미디언들이 독창성 면에서 부족한 개그를 하였더라도 폄하할 수만은 없다. 일단 악극도 연주와 노래 개그가 들어가는 뮤지컬 비슷한 형식이지만 분명히 순발력과 암기력이 필요한 연극이었기 때문에 연기력은 필수였고, 노래와 춤도 대충해서는 안 되었던 분야였다. 서영춘은 바보 연기에 특화된 배삼룡, 노래와 신체 조건을 이용한 개그가 장기였던 [[이기동(코미디언)|이기동]], 미남 역을 자주 담당했고 선역과 정극 연기도 능했던 구봉서와 달리 강한 개성으로 어필하였다. 특히 얼굴 표정 연기에 능하였고 연기도 두루 잘 하는 편이었으며 영화계에서도 활동했다. 예외로 미국물(미군 8군 무대)을 먹은 [[곽규석]]이 미국식 스탠드업 코미디와 성대모사, [[남보원]]과 [[백남봉]]은 성대모사에 특화된 장기를 내세운 쪽이다. 슬랩스틱과 간신 수염 분장, 표정 연기를 장기로 해서 그렇지, 분장하지 않은 모습은 훤칠한 키에 뽀얀 낯빛을 가진 미남형이었다. 서영춘 사후 개그계의 미남 미녀로 꼽히던 아들 서동균과 딸 서현선을 보면 피는 못 속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파일:external/park5611.pe.kr/e3d66fc6fc751a8f68940821a9835e87.jpg]] 1960년대 극장쇼 무대에서 콤비로 활동한 '''[[백금녀]]'''[* 악극단 출신의 코미디언. 드센 뚱녀 컨셉으로 1960~1970년대까지 큰 인기를 끌었고, 음반도 취입했다. [[이국주]]와 흡사한 외모의 소유자였으며 노래도 매우 잘 해 지금의 이국주보다 훨씬 인기가 높았다. 1995년 사망. 아들 강민도 1990년대 중반 어머니처럼 개그맨으로 활동했다.]와 함께 한 음반. 서영춘이 홀쭉이, 백금녀가 뚱뚱이 기믹으로 활동했다. 이런 음반엔 주로 재미있는 가사의 노래가 들어갔는데, 노래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고, 꽁트, 개그가 들어가 있기도 했다. [[https://youtu.be/W_s85hyPkvo|유튜브에 서영춘-백금녀 만담 녹음본이 있다.]][* 6분 16초부터 나오는 노래가 그 유명한 ''''사이다송''''이다. '''"인천 바다에 사이다 떴어도 고뿌 없으면 못 마십니다"'''라는 구절이 이 곡에 등장한다. 전체적인 곡조가 오늘날의 랩과 매우 비슷하다.] 50년이 훨씬 지난 개그지만 현대의 개그와 비교해도 웃음의 수준이나 배우들의 연기력 수준이 상당히 높다. 서영춘의 대표작 "[[서울구경|시골영감 서울 가는 기차...]]" 노래가 이런 판에 들어간 종류.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