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양 (문단 편집) === 서양 문명은 다른 문명에 비해 괄목할만한 발전을 이룩했다? === 현재까지도 [[유럽중심주의]]자들은 서양이 고대 그리스부터 [[민주주의]]를 발명하는 등 다른 문명들과 다른 독특한 특징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는 현대의 민주주의와 달리 1만명 이하의 도시 단위에서만 진행되었고 여성, 노예, 외지인에게는 참정권이 없었다. 또한 [[프랑스 혁명]] 직전까지 서양인들도 동양인들처럼 국왕들과 귀족들이 생산 수단을 장악해서 다수 대중들을 착취하거나 전쟁, 노역에 동원했다.[* 이전에는 기독교가 이성을 폄하하고 비합리적인 신앙을 유지했다고 쓰여있었는데, 말이 안되는 소리인게, [[아우구스티누스]]나 [[스콜라 철학]], [[토마스 아퀴나스]] 문서를 참고하면 알겠지만 오히려 당대 가톨릭은 이성으로 신을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다 믿었고, 이에 대한 반발로 성경에서 벗어나 지들 멋대로 신의 뜻을 재단하고 왜곡한다며 비판하여 일어난게 종교개혁이다. 물론 직접적인 트리거는 가톨릭의 타락이 컸지만, 신학적인 측면에서는 그랬다. 그래서 지금도 가톨릭은 개신교에 비해 인간의 이성과 자유의지를 인정하는 폭이 더 넓다. 그리고 위에 써져 있는 것도 당시 시대를 고려하지 않고 현대의 입장에서만 바라본 19세기 계몽주의식 근시안적인 시각이라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현대 역사학자들은 [[과학 혁명]], [[산업 혁명]], [[계몽주의]]가 서양 전체에서 발생한 사건이 아닌 영국, 미국, 프랑스에 한정되었다는 것을 증명했고 이러한 혁명들도 유럽 내에서 자체적으로 가능한 것이 아닌 [[아메리카 원주민]], [[중국]] 문명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라고 증명했다. [[예수회]] 선교사는 16세기부터 중국과 교류를 하면서 당시 성행했던 기독교와 달리 유교는 인본주의 성향이 있고 이는 유럽인 자신이 믿던 신앙은 신으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닌 인간이 만든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마테오 리치]]를 비롯하여 중국과 교류하던 [[유럽]]의 [[선교사]]와 [[외교관]]들에 의해 서양에 알려진 과거 제도는 서양의 정치 이론가들에게 [[영감|큰 깨달음]]을 주었다. 이전까지 서양의 공무원 채용 시스템은 과거 이전 [[고대]] 동아시아와 비슷하게 [[신분제]]에 의한 [[세습]]이나 [[인맥]]([[추천장]])에 의한 채용([[추천]]·천거), 그리고 제도적으로 인정되는 [[매관매직|관직 구입]]이었기 때문.[* 이 전통은 지금도 유럽이나 미국의 대학 학생 선발과 회사의 직원 선발에 남아있다.] [[봉건제]]가 유지되었던 [[중세]] 서양의 [[관료]] 채용 제도는 위와 같이 능력이 중시되는 시스템이 아니었으며, [[근대]]에 접어들면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대안이 요구되고 있었다. 당시 [[계몽주의|개혁적인 이론가]]들은 보편적으로 모든 사회 구성원들을 대상으로 하여 그 능력을 시험하고 채용하는 과거제에 깊은 관심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 아이디어는 서구 국가들에 의해서 실행되었는데, 처음으로 [[영국]]은 노스코트-트레벨리안 레포트에 따라서 [[영국령 인도]]에서의 [[영국 동인도 회사]](English East India Company)의 직원 채용 제도를 개혁하는 데 착수하였다. 그렇게 실행한 영국령 인도에서의 공개 경쟁 채용 시험은 성공적으로 평가되었다. 이 성공에 고무된 [[영국 정부]]는 [[1855년]] 영국 공무원 채용에도 시험 제도를 도입하였다. 이 정책 성공의 영향을 받아서 [[19세기]]에서 [[독일]]과 [[프랑스]] 등의 다른 서방 국가들도 차례차례 시험 제도의 도입에 착수하였다. 한편 [[미국]]에서도 논의가 활발했는데, [[로드아일랜드]] 주의 Thomas A. Jenckes(당시 하원)가 [[1868년]] 의회에서 최초로 공무원제도 개혁을 제안할 때, 그의 보고서는 한 챕터에 걸쳐 중국의 과거제에 대한 내용을 포함했다. 같은 해, 중국에 관심이 많은 상원의원 Emerson Etheridge은 보스턴에 온 중국 외교사절을 환영하는 자리에서 과거제에 찬사를 표하며 Jenckes의 제안을 시행할 것을 강변했다.[* 실제로 벤자민 프랭클린 같은 이른바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과거제를 비롯하여 중국의 문화를 열렬히 찬양하는 사람들이었고, 신생국인 미국이 중국의 문화를 본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에 유럽 같은 세습 왕족이나 귀족 계급이 생겨나지 않은 이유도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세습제도가 아니라 공정한 시험을 거쳐서 관료를 선발하는 과거제로 대표되는 중국의 문화를 본받으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영국에서와 마찬가지로, 부패한 [[엽관제]]를 통해 개인적인 이익을 얻고 있던 많은 사람들은 새로운 의견에 격렬히 반대했다. 일부는 시험을 통해 공무원을 채용한다는 방식에 대해, 중국적이고, 이국적이고, 따라서 '미국적이지 않다'며 항의했다. 결국 시험에 의한 공무원 선발 제도는 [[1883년]] 미국에서도 도입되었다.[* Kaplan, Robert M.; Dennis P., Saccuzzo (2005). Psychological testing: Principles, applications, and issues (6th ed.). NY: Thomson Learning. p. 12. ISBN 0-534-63306-4] >"동방에서 가장 계몽되고 유구한 역사를 가진 나라의 정부(즉, 중국)는 [[능력주의]]에 입각해서 공무원을 선발하기 위해 시험제도를 선택했는데, 그게 장점이 된다면 우리 대륙이 황야 상태였던 지난 수세기 동안 [[중국인]]들이 공자의 정치윤리를 배우며, [[책]]을 읽고 [[나침반]]과 [[화약]], [[구구단]]과 같은 문명의 이기를 누려온 것을 우리가 따라 누리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처럼 [[미국인]]이 공무원시험의 장점을 취하지 않을 이유 또한 없다.[* We could not see why the fact that the most enlightened and enduring government of the Eastern world had acquired an examination as to the merits of candidates for office, should any more deprive the American people of that advantage, if it might be an advantage, than the facts that Confucius had taught political morality, and the people of China had read books, used the compass, gunpowder, and the multiplication table, during centuries when this continent was a wilderness, should deprive our people of those conveniences.]"[br]- 미 연방정부 인사위원회(Civil Service Commission, 1883) 미국의 공무원 채용 시험을 도입한 법은 펜들턴법이라고 하는데, 당시 [[미국 대통령]] [[제임스 A. 가필드]]는 펜들턴법에 서명하기 직전에 [[미국 공화당|여당]] 최대 [[파벌]]이자 '''가장 [[부패]]했던''' 파벌 콩클링파의 찰스 기토한테 [[암살]]당한다. 그리고 가필드의 부통령으로 가필드가 암살당하자 대통령이 된 [[체스터 A. 아서]] 대통령은 콩클링파 소속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1883년]] 펜들턴법에 서명하여 미국 [[행정고시]]가 발효, [[1884년]]부터 시험 제도가 시행됐다. 이로써 과거 제도를 서양에서 재해석, 수용하여 나타난 근대적인 시험 제도는 점차 전 세계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근대화]]된 시험 평가 제도는 시험 점수라는 공정하고 균일한 기준에 따라서 임용을 함으로서, 국가를 운영하는 공무원 관료 집단을 '특권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시험에 합격한 모든 사회 구성원들을 국가가 급여 주고 채용함으로서 의지와 능력만 있다면 [[귀족]]이든 [[평민]]이든 __누구라도__ [[공무원|정부 관료]]가 될 수 있었다. 이는 전반적으로 행정력의 상승을 가져왔다. 현대국가가 과거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은 수준의 행정력을 보유한 이유는 다 이러한 시험을 통해 선발된 인재 덕분이다. 또한 아메리카 원주민에게도 선교를 하는 과정에서 아메리카 원주민 중 하나인 [[이로쿼이]] 부족들은 국왕, 귀족같은 소수 엘리트 집단이 독단적으로 정치하거나 경제를 장악한 것이 아닌 모든 부족원들이 정치에 참여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다른 아메리카 원주민 부족들을 만나면서 재산을 독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이는 서양의 [[민주주의]], [[사회주의]]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과학 혁명과 산업 혁명이라는 것도 19세기 후반 제국주의 시대에 서양 역사학자들이 타칭한 것이고 당시에는 그걸 혁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17세기 당시에 과학 혁명이라는 것은 당시에 성행했던 자연 철학이 [[과학]]의 바탕이 된 사건이고 산업 혁명도 [[자본주의|자본가들의 이윤 추구]]가 [[기술]]의 바탕이 된 사건이다. 이는 서양인이 과학, 기술을 추구할 의도로 과학 혁명, 산업 혁명이 생겨난 것이 아니라 당시 영미권, 프랑스의 문명 풍토가 우연히 과학, 기술의 독특한 발전으로 결론이 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