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서산회의파 (문단 편집) === [[반장전쟁]] 시기 === 그러던 중 1929년 3월 15일 국민당 3차 전국대표대회가 소집되기로 결정했다. 당시 당원의 직접선거로 대표를 선출할 수 있는 곳은 난징, 상하이, 광저우, 광동 4개 당부 뿐으로 이들 당부는 반장세력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에 장제스는 광동파와 서산파를 배제해버리고 80%에 가까운 대표들을 선거법을 통하지 않고 선출했다. 이에 반장세력의 분노가 폭발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반목하던 광동파와 서산파가 합작하게 되었고 군사실력가들과의 적극적인 제휴를 꾀하게 되었다. 1929년 2월, 우한정치분회과 호남성 정부주석 노척평을 해임하면서 발생한 [[1차 장계전쟁]]에서 서산회의파가 [[계계군벌]]과 연합하여 반장전선을 형성할 것이고 쉬충즈가 광동에서 군사지휘를 맡을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서산회의파가 주목받았다. 1929년 5월, 쥐정, 쉬충즈, 셰츠가 광저우에 집결하여 광서파와 합작을 결정하고 5월 18일 장제스의 국민정부주석 취임 반대, 국민회의 소집, 3전대회 불인정, 쉬충즈의 도장총사령 추대를 합의했으나 광서파는 장제스에게 곧 진압당했다. 장제스는 서산회의파가 광서파와 연계했다는 사실에 그동안 서산회의파를 국민당의 원로로서 예우하며 그들의 반장활동에도 탄압하지 않았던 기존의 정책을 철회하고 [[쩌우루]], [[셰츠]], [[쥐정]]을 체포하여 그 즉시 총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다. 이에 서산회의파는 평진 지역으로 이동하여 [[펑위샹]], [[옌시산]], [[장쉐량]]과의 합작을 추구했다. 북평의 서산회의파는 반장선언을 발표하고 공산당을 제외한 모든 반장세력들의 합작을 호소했다. 1929년 5월, [[1차 장풍전쟁]]이 발발하자 쉬충즈가 펑위샹과의 합작 의사를 타진했다. 펑위샹도 이에 호감을 보였고 쩌우루가 펑위샹, 옌시산과 회담하여 기본법 제정을 촉구했고 펑위샹과 옌시산 모두 동의했으나 1차 장풍전쟁에서 옌시산이 장제스의 편에 서면서 1차 장풍전쟁도 장제스의 승리로 끝났다. 이에 타이위안에서 반장운동을 후원하던 서산회의파도 평진으로 철수했다. 결국 국민당 중앙은 1929년 12월 12일, 쉬충즈, 쩌우루, 셰츠, 쥐정의 당적을 박탈하고 지명수배를 결정했다. 12월 13일 서산회의파는 굴하지 않고 장제스의 하야와 출국을 요구했으며 [[리례쥔]]을 비롯한 국민당 원로들이 다수 동참했다. 이에 국무회의는 공식적 지명수배를 하달하고 서산회의파와 난징 국민정부의 관계는 최악의 국면에 치달았다. 서산회의파는 장쉐량, 펑위샹, 옌시산의 합작을 도모하며 펑위샹과 옌시산의 화해를 주선했고 장쉐량의 반장 동참이나 최소한의 중립을 촉구했다. 장쉐량이 중립고수를 주문하는 셰츠의 의견에 절대찬성을 보이자 펑위샹과 옌시산은 1930년 [[중원대전]]을 일으켰다. 서산파는 마침내 앙숙이었던 왕징웨이의 [[개조파]]와도 합작하여 베이핑 국민정부를 수립하고 태원약법을 제정하여 장제스 타도를 도모했으나 장쉐량이 장제스의 편에 서면서 중원대전도 장제스가 승리했고 서산회의파는 다시 한번 실패를 맛보아야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