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산회의파 (문단 편집) ==== [[국민혁명]] ==== 그러던 중 1926년 3월, [[중산함 사건]]이 일어나 [[장제스]]가 국민당의 지도자가 되었고 장제스는 1926년 7월 1월 국민혁명군 총동원령을 선포하면서 [[국민당의 1차 북벌]]을 시작하였다. 상하이 당중앙은 북벌의 필요성을 일찍이 주장하고 있었으므로 절묘하게도 같은날 국민정부에 북벌이 쑨원의 미완의 유업이며 국민당 전체 동지들이 북벌을 완성시키고 진정한 민국을 실현시켜야 한다면서 북벌을 실행할 것을 요구하는 <중집위훈령 제4호>를 발표했다. 이 훈령에서 서산회의파는 북벌의 미명을 빌어 사익을 탐하는 자는 '본당의 죄인'이라고 지적하며 공산당에 대한 경계를 여전히 드러냈다. 또한 자신들에 대한 반대를 표명한 국민혁명군 총사령관 장제스에 대해서도 불신의 눈빛을 보이고 있었다. 1926년 7월 9일, 서산회의파는 제2기 2중전회를 개최하여 22일까지 북벌 후의 당무, 정치, 군사 등 각 방면에 대해 토론했다. 이 결과, 상하이 당중앙은 국민혁명군의 북벌은 찬성하지만 다른 문제는 침묵하기로 하고 상하이 당중앙에도 독자적인 군사위원회를 설치했다. [[우페이푸]], [[쑨촨팡]] 등 군벌들이 북벌은 공산당의 적화 시도라고 북벌을 비난하는 선전을 강화하자 쩌우루는 "군벌들은 인민이 적화를 두려워하는 것을 이용하여 적화라는 이름을 빌려 북벌과 적화를 동일시하며 반혁명전쟁에 이용하고 있다."라고 군벌들을 맹비난했다. 쩌우루는 공산당이 북벌에 반대했다는 점, 북벌군 군관 대부분이 국민당원이며 공산당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는 점을 강조하여 북벌과 중국 적화가 별개의 것임을 강조했다. 국민혁명군이 우한을 점령하고 장강까지 진출하자 상하이 당중앙은 호남성 일대의 중앙집행위원, 후보집행위원에게 특별훈령을 내려 공산당이 당무를 장악하고 북벌의 과실을 독차지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주의하라고 알렸다. 하지만 서산회의파의 우려대로 북벌이 급진전되자 공산당이 국민정부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투쟁이 강화되었고 광저우 당중앙의 약진에 기존에 상하이 당중앙에 충성하던 당부와 기관들이 속속 광저우에 합류하면서 상하이 당중앙은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