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산회의파 (문단 편집) === [[탕산 사건]]과 [[1차 양광사변]] === 군사실력가들의 도전을 모두 분쇄한 장제스는 약법제정 문제를 놓고 동지인 후한민과 충돌하다가 1931년 2월, 후한민을 감금시키는 [[탕산 사건]]을 일으켰고 이는 중국 전체에 큰 충격을 주었다. 즉각 국민정부 문관장 [[구잉펀]]이 사직을 요청했고 철도부장 쑨커를 비롯한 광동파들이 대거 잠적했다. 장제스의 의형제인 [[다이지타오]]조차 이 조치는 불만을 품고 난징을 떠나버렸다. 4월 30일 [[린썬]], [[구잉펀]], 등택여 등 4명의 감찰위원이 장제스의 6가지 죄상을 거론하며 탄핵안을 제출했다. 하지만 장제스가 장악한 감찰위원회의 [[우징헝]], [[차이위안페이]], [[장런제]], [[리스쩡]] 등은 탄핵 논의 자체를 포기해버렸고 감찰위원들은 [[장쥐]]와 연명하여 구잉펀에게 이번 사태는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장제스를 적극 옹호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쑨커, 구잉펀 등 광동파는 [[개조파]], 서산회의파와도 합작하여 본격적인 반장에 나서게 되었다. 5월 1일, [[왕징웨이]]가 공개통전으로 장제스를 비판하며 장제스 타도를 주장하면서 개조파가 들고 일어났고 광동파의 실력자 천지탕이 5월 3일 탄핵안에 동참했다. 5월 11일 근성넘치게도 세차례나[* [[1차 장계전쟁]], [[2차 장계전쟁]], [[중원대전]].] 장제스에게 박살났던 광서파 [[리쭝런]]이 제1방면군 총사령 명의로 장제스 탄핵과 반장통전에 호응했다. 서산회의파도 여기에 참여, 쉬충즈, 쩌우루 등이 광저우에 속속 도착하여 5월 27일 중국국민당중앙집행위원-감찰위원 비상회의를 성립하고 광저우 국민정부를 선포했다. 광저우 국민정부는 난징 국민정부와의 군사적 일전을 겨루려 했으나 공산당을 상대로 하는 [[제3차 초공작전]]과 더불어 9월 18일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키면서 장제스와의 거국적인 합작에 동의하게 되었고 장제스 하야를 조건으로 광저우와 난징이 통합하였다. 하지만 장제스의 뒤를 이었던 쑨커는 답이 없는 헬게이트인 상황을 직면하자 한달만에 견디지 못하고 하야했고 장제스는 광동파에게 냉대를 받아 빈정상안 왕징웨이와 합작하여 [[장왕합작]]을 통해 1932년 1월 복직했다. 이후 서산회의파는 대부분 반장운동을 중단하고 뚜렷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후한민 유폐 이후 국민당의 분열은 [[탕산 사건]] 문서에서, 반장파의 신속한 결합과 광저우 국민정부의 수립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1차 양광사변]] 문서 참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