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봉총 (문단 편집) == 이후 == 서봉총은 스웨덴과의 '고고학 [[외교]]'를 위해 떠들썩하게 이용되었지만, 정작 황태자가 돌아간 후 일제의 서봉총 발굴은 내팽겨치듯 마무리되었다. 일제의 발굴 보고서를 지금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어떤 유물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도 모르고 전체 유물의 목록도 알 수 없게 되었다. 심지어 구스타프 황태자가 직접 발굴한 유물 중 일부도 그 흔적이 없는데, [[한자]]를 읽을 줄 알았던 구스타프 황태자는 한자로 '부'와 '귀'라는 글자가 쓰인 [[비단]] 조각을 확인하고 조심스레 그것을 수거했다고 하는데 정작 지금 남아있는 유물 중에는 그런 유물을 찾아볼 수 없다. 당시 조선총독부 박물관은 명색이 박물관인데도 불구하고, 발굴한 뒤 발굴 책임자였던 고이즈미 아키오가 따로 일본 학술지에 발표한 것을 제외하면 정식 보고서 한 편 내놓지 않았었다. 하지만 일련의 재발굴, 재조명 사업의 일환으로 [[국립경주박물관]]이 새롭게 유적, 유구 도면을 정리한 보고서를 2014년에 발간했다. [[파일:external/tntmotors.net/nPtRoieczK7xUB368bcv6bybtu5gkQ.jpg]] 서봉총의 발굴이 아무래도 스웨덴 황태자와 관련된 유적이다보니 스웨덴 왕들이 한국을 방문할 때면 들르곤 하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바로 인근의 [[봉황대]], 서봉황대 고분의 초대형분들 사이에 있는 것도 모자라서 봉분마저 사라진 상태로 있기 때문에 경주에 직접 찾아가서 보면 상대적으로 초라한 느낌을 받는다. 봉분은 상술되어 있듯이 일제강점기에 이미 무덤의 돌들을 철도 부설 및 관련 시설 확장 공사에 사용하였기 때문에 되돌릴 수 없는 상태였다.[* [[금관총]]도 마찬가지로 절반 정도가 사라졌음을 볼 수 있는데 이 또한 금관총을 처음으로 인지했을 당시에 금관총 절반가량을 파내고 민가가 들어서 있었던 상태였기 때문에 그대로 냅둔 것이다. [[호우총]] 또한 동일한 이유] 현재야 당연히 그것을 복원하고자 한다면 복원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일종의 각 무덤만의 아이덴티티 정도로 남은 듯하다. 어쨌거나 남아있는 부분만 보더라도 원형을 상상해보면, 서봉총이 [[천마총]]보다는 약간 작지만 그래도 꽤나 큰 무덤임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의 신라 고분 조사도 그렇고 해방 이후 70~80년대의 발굴도 그렇듯이 봉분을 조사할 필요성을 인지한 것은 90년대 이후였고, 경주 일대 기조사 발굴고분을 본격적으로 재조사한 것은 2010년대에 들어서이다.[* 물론 1990년대 즈음한 발굴부터는 애초에 조사를 착수함과 동시에 봉분조사도 같이 겸했다.] 서봉총이 그 일빠따로써 잔존한 봉분의 기저부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여 고분 매장주체부 재확인, 봉분의 정확한 규모 및 제사관련 유물과 시설 등을 재확인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http://www.kyongbuk.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1000409|기사]] 이후 [[금령총]]에도 재조사를 실시했다. 2016~17년 서봉총을 다시 조사했고 무덤 주변에서 고대의 [[제사]] 흔적을 발견하는 등 예상 밖의 큰 성과를 거두었다. 서봉총 북분에서 10개, 남분(옛 데이비드총)에서 13개, 위치가 분명하지 않은 4개 등 총 27개의 큰 항아리를 조사했고 이 안에는 52종류의 동물이 들어있었다. 특이한 점은 [[남생이]]와 주름[[다슬기]]를 제외하면 모두 바다에서 나는 [[해산물]]이었고, 모든 재료는 뼈 없이 [[순살]]로 발라내서 제사를 지냈다. [[복어]]가 있어 이미 고대부터 복어독 제거 기술이 발달해 있었다거나, [[동해]]에서 잡히지 않는 물고기인 [[민어]]가 있어 백제와의 활발한 교류를 상정하는 등 다양한 사실을 밝혀냈다. [[분류:서봉총]]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