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봉총 (문단 편집) === 서봉총 북분 === || [[파일:서봉총 발굴 광경.jpg]] || || 경주 서봉총 발굴당시의 모습 || [[일제강점기]] 당시 [[금관총]]에서 우연히 [[신라]] [[금관]]이 발견되자 수많은 신라 왕릉급 고분들을 발굴하기 위해 일본인 고고학자들이 대거 경주로 몰려들었다. 연이어 발굴한 [[금령총]], [[식리총]]에서도 금관을 비롯한 여러 금공품들이 출토되었고 더불어 [[적석목곽묘]]라는 묘제를 인식한 다음부터는 더욱 [[대릉원]] 일원의 신라 고분을 발굴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발굴 이전 서봉총은 남, 북분을 모두 통틀어 상당 부분 훼손된 상태였다. 그 때문에 무덤이라는 인식이 상당히 낮았을 뿐더러 조선경동철도 공사의 철도 관련 부지 확장 공사 등에서 무덤에서 노출된 돌들을 사용하는 상황이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발굴은 매장주체부와 매납된 유물들에 초점을 맞추었고, 봉분은 조사대상이 아닌 걷어내야 할 일거리였기 때문에 일제 학자들은 이미 봉분이 거의 없어져있던 서봉총이 다음 발굴 대상으로 적절하다고 판단했고, 1926년 [[조선총독부]] 박물관의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 1897-1993)가 서봉총 발굴에 착수했다. [[금관총]], [[금령총]]에 연이어 또 다시 [[금관]]이 확인된 것을 비롯하여 '연수'라는 고구려 [[연호]]가 새겨진 은제함[* '연수(延壽) 원년'이라고 새겨진 은제 그릇이 출토되었다. 연수는 [[고구려]]의 [[연호]]로 추정되나 아쉽게도 언제적 연호인지 알 수 없다. [[장수왕]] 시기라고 막연한 추정만 할 뿐이다.]이 발굴되어 당시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가 직접 현장발굴조사를 보러 올 정도로 주목을 받고 있었다. || [[파일:/pds/201003/05/56/f0041956_4b90ff1ac1915.jpg|height=320]] || [[파일:gustavvv.jpg|height=320]] || 구스타프 황태자가 참가한 발굴 현장. 사진 왼쪽 하단에서 무릎을 꿇고 뭔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사람이 구스타프 황태자이다. 1926년 마침 당시 [[스웨덴]]의 황태자이자 [[고고학자]]이기도 했던 [[구스타프 6세 아돌프|구스타프]] [[공작(작위)|공작]][* 훗날 스웨덴의 국왕이 되는 [[구스타프 6세 아돌프]]이다. [[2016년]] 현재 스웨덴 국왕 [[칼 16세 구스타프]]는 그의 손자다.]이 국빈으로서 [[일본]]을 방문 중이었다. 일제는 구스타프 공작이 고고학자라는 점을 파악해 직접 이 무덤 발굴에 참가해달라고 청했고, 공작 또한 고대 동양의 무덤을 직접 발굴할 기회에 호기심이 동하여 기꺼이 받아들였다. 1926년 10월 9일, 구스타프 공작이 식민지 조선 [[부산항]]에 도착하였다. 바로 경주로 이동해 불국사 동쪽에 있던 철도호텔(옛 불국사 관광호텔, 1973년 철거)에서 숙박하고 다음날 사이토 마코토 조선총독과 [[불국사]], [[석굴암]]을 관람한 뒤 서봉총에 도착해 발굴작업을 시작하였다. 다만 구스타프 황태자의 발굴은 퍼포먼스로, 이미 황태자가 도착하기 전까지 일본 고고학자들이 미리 발굴을 사실상 마치고 대부분의 주변 유물을 걷어내고 목관만 남겨놓은 채 황태자를 기다렸다고 한다. 황태자는 직접 금관을 출토해 나무상자에 넣어 박물관으로 가져가 세척작업을 했다. || [[파일:/pds/201003/05/56/f0041956_4b910085735d0.jpg|height=290]] || [[파일:서봉총 금관.jpg|height=290]] || [[서봉총 금관]] 발굴 당시, 광복 이후 재처리 및 복원된 금관 조사 결과 이 무덤은 신라 특유의 [[적석목곽묘|돌무지 덧널무덤]] 양식으로, 이전에 발굴했던 금관총, 금령총, 식리총의 매장 주체부는 절반 정도가 이미 파괴되었던 것과는 달리 비교적 온전하게 잔존했기 때문에 [[적석목곽묘]]의 전체적인 구조를 파악할 수 있었다. 금관, 금목걸이, 가슴장식, 금반지 등이 출토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호우총의 은제합이랑 유사한 연수명 은제합을 비롯하여 황남대총 남분에서나 나오는 유리배, 완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피장자는 여성이라고 밝혀졌다. 구스타프 황태자는 그날 오후 열차를 타고 경성에 들러 만찬회에 참석한 뒤 이튿날(11일) 오전에 [[중국]]으로 기차를 타고 넘어갈 예정이었다. 그러나 구스타프 황태자는 경성에서 점심을 먹은 뒤 일정을 변경해서 방향을 돌려 다시 경주 고분 발굴현장으로 돌아왔다. 아마 금관이라는 특이한 유물을 직접 발굴해 낸 것이 내심 기뻤기 때문이었던 듯. 그리하여 황태자는 또 하룻밤을 경주에서 머물고 본래 일정보다 4일 늦게 서울과 평양을 다시 거쳐 중국으로 넘어갔다. 서봉총 발굴은 19일에 완료되었다. 조선총독부박물관 소속으로 발굴을 주도한 일본인 학자 고이즈미 아키오는 끝나는 날짜에 맞추어 일본에서 승려를 초청하여 위령법회를 열었다. [[파일:/pds/201003/05/56/f0041956_4b910f1a32616.jpg]] 경주 서봉총 옛 터에 발굴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스웨덴어가 아닌 영어로 비문을 새겨 놓은 센스~~ 여기서 발굴된 금관 등에 대한 흑역사가 있다. 이 당시 발굴을 주도한 고이즈미 아키오는 이후 평양박물관장을 역임했는데, 이 때 서봉총에서 나온 유물들을 대여해서 평양박물관에서 특별 전시회를 열었다. 여기까지는 별 문제가 없었는데, 전시회가 끝나고 술집에서 뒤풀이를 하면서 금관을 가져다가 연회에 참석했던 [[기생]]에게 씌워주곤 기념촬영까지 했다. [[http://news.donga.com/Culture/more22/3/all/20150206/69506716/1|#]] 보도에 따르면 이짓을 벌이다 유물이 일부 망가지기도 한 모양인데, 언론에 보도되자 엄청난 비난이 쏟아져 결국 고이즈미 아키오가 박물관장직을 내놓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