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명선 (문단 편집) == 서명선의 상소 == [[영조]] 말에는 세손이었던 정조에게 [[대리청정]]을 하겠다고 했지만, 당시 실세였던 좌의정 [[홍인한]]이 이를 거품 물고 반대하며 "세손(정조)은 노론이나 소론을 알 필요가 없고, 누가 이판이나 병판에 적합한 지 알 필요가 없고, 조정 일에 대해서 알 필요가 없다"고 말하면서 세손의 대리 청정을 압박하는 형세를 취했던 것인데 영조가 분통을 터뜨리고 세손도 사양하는 소를 써야겠다면서 홍인한에게 부탁해도 홍인한이 무시하는 상황이었다. 이에 영조는 대리는 포기하고 대리에 준하는 명을 내렸고, 세손이 이것마저도 사양하려는 소를 쓰려고 해도 [[홍인한]]은 또 무시하고 홍인한과 한 패인 [[정후겸]]과 [[화완옹주]]도 홍인한의 행보에 동조하자 세손(정조)이 직접 홍인한을 공격하는 상소를 올리려고 했는데 세손의 측근이던 [[홍국영]]이 자칫 위험해진다며 만류하면서 대신 올릴 사람을 찾아보겠다고 했는데 이 때 홍국영이 찾은 사람이 당시 이조 참판인 서명선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 상소 한 장으로 인생 역전을 한다.'''[* 역당으로 낙인찍히다시피한 [[소론]] 출신으로서 이병모, 이시수와 더불어 정승까지 한 몇 안 되는 사례가 된다.] 1775년(영조 51) 12월 3일(음력) 그가 상소를 올리자(상소 내용은 [[http://sillok.history.go.kr/id/kua_15112003_001|실록 기사]] 참조) 영조는 신하들을 불러 그에게 상소문을 읽게 하는데(관련 기록은 위의 상소 다음의 실록 기사이다.) 영조가 "대내에서 한 말을 신들이 어찌 알겠습니까? 라고 한 자가 누구며 뭔 뜻이냐?" 라고 묻자 [[홍인한]]이 한 말이라 하고 비판을 하는데 이에 영조가 다른 신하들에게 (홍인한에 대한) 생각이 어떻냐고 묻자 다들 "그냥 서명선에게 출처를 묻죠?" 라고 하자 영조가 단호하게 "그런 거 관계없이 그냥 시비만 말해라" 라고 했는데 다들 머뭇거리자 서명선이 "그거 세손 저하께서 쓴 상소에 있던 구절입니다" 라고 했다. 이에 영조가 세손의 상소를 보았고 사태 파악이 된 영조가 눈치나 본 신하들을 파직하면서 '''사태는 정리되었다.''' 더 이상 대리 청정에 반대할 명분이 사라진 것이다. 이에 홍인한이 심상운을 시켜 대리청정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게 했지만, 외려 심상운은 [[흑산도]]로 유배를 갔다. 이 상소로 그는 곧바로 예조판서에 임명(12월 13일(음력))되었고, 영조는 특별히 그의 아버지를 치제하는 하교(12월 5일(음력))까지 내렸다.[[http://sillok.history.go.kr/id/kua_15112005_001|실록 기사]] 그리고 예조판서에 있은 지 10여일만에 병조판서에 특제(12월 29일(음력))되었다. 그리고 [[1776년]](영조 52) 2월 25일(음력)에 이조판서가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영조가 승하하게 된다.[* 영조가 승하한 날이 '1776년 3월 5일(음력) 묘시'였으니, 따지고 보면 서명선이 이조판서가 된 지 열흘 뒤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