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서라벌중학교 (문단 편집) == 기타 == 교문을 열고 들어가면 마치 시골 학교에 온 듯한 기분이 느끼지며, 돈암동 시절(1958. 4. 6~1998. 2.24)의 유산인 낡은 조각품이 운동장 한켠을 지키고 있다. 이 조각품은 [[돈암동]]에 있던 시절, 학교 앞을 지나는 수 많은 자동차들의 [[매연]]과 [[아황산가스]] 때문에 부식된 흔적이 있다. 돈암동 시절의 서라벌중고등학교의 전경 사진을 연대별로 늘어놓고 보면, 주변 동네가 [[빈민촌]]에서 [[아파트]] 숲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잘 볼 수 있다. 서라벌중고등학교 정문 앞에는 버스정류장이 있었고, 길음시장 앞에서 좌회전이 안 되기에 [[우이동]]행 일부(8, 9, 23, 27, 33, 127번), [[삼양동]]행(25, 138번), [[정릉동]]행(1, 2, 3, 5, 71(710), 331번) 버스들의 상행 필수 U턴 지역인 서라벌중고등학교 앞 버스정거장이기도 했다. 1981~1982년 기준으로 서라벌중고등학교 버스정류장에서 섰던 버스들은 동북운수 8번 (우이동→[[신촌]]), 신원여객 9번 (우이동→[[서울역]]), [[삼양교통]] 23번 (우이동→[[보광동]]), 상원여객 25번 (미아7동→[[신림동]]) ([[서울 버스 152]]), 미아여객 27번 (4.19탑→신촌) ([[서울 버스 104]]), [[진화운수]] 33번 (우이동→서울역), [[한남운수]] 95-3번 ([[서울대]]→청량리), 미아여객 127번 (4.19탑→[[북아현동]]), 연세운수 138번 ([[마포구]](서강)→미아국민학교), 동부운수 522번 (마포→[[서울어린이대공원]] 후문) 노선이 있었다. 정릉동행 버스들 (1, 2, 3, 5, 71(710), 331번 버스)은 생략. 이 중에서 9, 33, 95-3, 138번 노선 버스는 단명하였고, 서라벌중고등학교 학생들은 등교시는 길음시장에서 하차했고, 하교시는 학교앞 서라벌중고등학교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는 경우가 많았으며, 가장 많이 탔던 버스는 삼양교통 23번 버스와 상원여객 25번 버스. (1) 1976년 (서라벌중고등학교 전체풍경, 하단 1 : 서라벌고등학교 주간부 일부, 하단 2 : 서라벌중학교, 서라벌고등학교 야간부 건물 일부) [[파일:188314.jpg|width=700<:>]] [[파일:1976ABC777.jpg|width=700<:>]] [[파일:1976XYZ999.jpg|width=700<:>]] (2) 1981년 (서라벌중고등학교 전체풍경, 하단 1 : 서라벌고등학교 주간부 일부, 하단 2 : 서라벌중학교, 서라벌고등학교 야간부 건물 일부) [[파일:1981JPN111.jpg|width=700<:>]] [[파일:1981JPN222.jpg|width=700<:>]] [[파일:KRJ7N9D45L.png|width=700<:>]] (3) 1990년 (서라벌중학교, 서라벌고등학교 야간부 건물) [[파일:1990KOR001.jpg|width=700<:>]] (4) 1984년 서라벌중고등학교 강당 앞 (교복자율화 시기) [[파일:1996CJK986.jpg|width=700<:>]] (5) 서라벌중학교 측면부 (1964~1997년) [[파일:5018.jpg|width=700<:>]] 서라벌중학교와 서라벌고등학교가 서울 성북구 돈암동에 있던 시절, 서라벌중학교는 서라벌고등학교 강당 옆의 단관의 5층 건물이었다. 서라벌중학교 건물 뒤로는 매점과 오른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는 화장실이 있었다. 1977년 6월18일 개봉된 당시 하이틴 스타 이승현 주연의 얄개시리즈 2탄, 영화 <괴짜만세>에 서라벌중고등학교의 건물, 운동장이나 주변 풍경이 자세히 나온다. (6) 1956년부터 2006년까지 사용된 서라벌중학교 구 학교마크 [[파일:JPN96FJ10O.jpg|width=700<:>]] 매점 뒤로는 서라벌고등학교 2부 음악실과 공납금 납부소, 빈 교실이 있었다. 빈 교실은 1980년 5월, 중학교 2학년11반의 교실로 사용되다가, 학생들의 너무 낡은 교실이라는 지적에,다음 달인 1980년 6월 문을 닫았고, 졸업때까지 빈 교실로 방치되었다. 건물 구조는 중앙복도를 기준으로 좌우로 4개씩의 학급이 있는 구조이나, 5층은 왼쪽의 4개 학급만이 완공되어 3학년 9반~12반의 교실로 이용 되였다. 교실이 부족하여 1982년까지 2학년11반, 2학년12반은 서라벌고등학교 2부(야간부) 건물에서 전세살이를 하기도 했다. 특히, 1979년 입학하여 1982년 2월10일 졸업한 25회 졸업생이 2학년이던 1980년, 2학년11반, 2학년12반 학생 144명 전원은 1980년 3월부터 6월까지 교실이 3번이나 바뀌어 그때마다 책상과 걸상을 든 채 이사를 해야 했다. 첫번째 교실은 교문 바로 옆, 두번째는 서라벌 고등학교 음악실 옆 낡은 교실, 세번째는 서라벌중학교 건물 오른쪽 옆의 파란색 서라벌고등학교 2부 교실 1층. 문제의 5층 미완성 4개 학급은 1982년 여름방학때 만들어 졌다. 화장실은 중학교 건물과 떨어진 곳에 있었기에 쉬는 시간이면 줄이 길게 늘어셨고, 40m 왼쪽에 학교 매점이 있어서 점심시간이 다가오면, 매점에서 나오는 냄새와 화장실 냄새와 섞여서 묘한 앙상블을 이루곤 했다. 현재는 교장 허가 하에 매점을 없앤 상태. 교문에서 서라벌중학교 가는 길은 4가지가 있었는데, 교문에서 직진하는 345개의 빡센 경사가 진 돌계단길 코스, 서라벌고등학교 운동장 가는 길을 따라 서라벌고등학교 강당을 보면서 57m를 오른쪽으로 걷는 코스, 서라벌고등학교 운동장 가는 길에서 오른쪽으로 빠져 양호실 앞에서 오른쪽으로 12m 진행후 99개의 비교적 완만한 잔여 계단길을 걸어서 중학교 현관으로 가는 코스가 있었다. 학교 뒷편인 종암경찰서 부근에서 오는 후문 루트도 있었다. 2km 정도의 거리는 가장 기나, 서라벌중학교는 정문에서만 등교시간에 복장단속을 했기에, 지각생이나, 복장단속 받기 싫어하는 학생들이 애용하였다. 학교 뒷편으로 산이 연결되어 있어, 일요일과 공휴일에는 종종 등산객들이 보였다. 교실은 평범한 콘트리트 바닥이나, 창문에 걸려있던 커튼들이 압권이었는데, 매년 3월초, 각 학급에서 학급비를 걷어 커튼을 달게 하였다. 그러다 보니 교실마다 커튼이 휘황찬란하게 재질과 색상이 다르고, 마치 아기 기저귀같은 천으로 커튼을 만든 교실들도 수두룩했다. 커튼은 1987년 2월, 학교에서 모두 같은 색과 재질로 바꾸었다. 교실과 교사가 부족하여, 고등학교 2부 교실을 빌리는 것은 25회 시절인 1980년 뿐만이 아니라, 졸업한 선배 어르신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1974년부터(20회, 1974~1976) 시작되었다고 한다. 주 대상은 --[[중2병]]이 왕성한-- 2학년이었다. 서라벌중학교의 교사들로는 숫자가 모자라서, 서라벌고등학교 1부, 또는 2부의 비교적 한가한 과목의 교사분들이 서라벌중학교 교사로도 활동을 하였는데, 기술, 한문등의 과목이 해당되었으나, 25회 2학년11~12반(1980년)은 국어도 서라벌고등학교 2부 선생님이었다. 과외교사 적발, 퇴출이 된 1981년11월17일부터 1981년12월16일까지 3학년 1반~6반까지, 서라벌고등학교 2부 수학 교사를 차출하여 쓰기도 했다. 1981년12월17일은 고입 연합고사일이기에 학교 입장에서 보면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격이고, 담당 선생님은 1982년 3월부터 중학교 수학교사로 발령이 되었다. 체육 수업은 대부분 서라벌고등학교 운동장에서 하였으나, 서라벌고등학생들의 교련검열등의 이유로 좁은 중학교 앞 공터에서 하기도 했다. 중학교 운동장 이래 봤자, 중학교 건물 바로 앞의 공터가 고작이었으나, 이 좁고 작은 학교에도 검도부가 있었고, 나름대로 수상은 많이 하였다. 졸업식은 서라벌고등학교의 강당에서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현관에 있던 사자 동상 한쌍이 나름대로 카리스마가 있었기에, 졸업하게 되면 이 곳에서 사진 찍는 전통이 있었다. 서라벌중학교 3학년 학생들의 졸업 덕분(?)에, 서라벌고등학교 1부, 2부 3학년 학생들은 하루 늦게 졸업하는 것이 전통이었다. 중학교 1, 2학년의 음악, 미술 수업은 대부분이 서라벌고등학교 음악실과 미술실에서 실시되었으나, 서라벌고등학생들의 수업과 겹치면 교실에서 하기도 했다. 중간고사, 기말고사 시험문제는 당시 타 학교들의 주관식 20%, 객관식 80% 이던 것과는 판이하게, 주관식 80%, 객관식 20%의 고난이도를 자랑했다. 이것은 서라벌고등학교(1부, 2부 공통)도 마찬가지였다. 1993년부터 중학교 내신이 시작되었으므로 --이 방침을 고수했다가는 학교장 뿐만 아니라 이사장도 학부모들에게 맞아 죽었울 듯...-- 1992년 3월부터 이 지침은 폐지되었다. 다른 학교에 비하면 교칙도 엄격한 편이라, 1976년부터 1982년까지 전자오락실이 활성화 되었던 시절에는 교장이나 교감, 학생부 교사들이 일반 직장인들로 위장을 하고, 주변 길음시장의 전자오락실 입구에 몰래 숨어서, 출입하는 학생들의 교복에 달린 이름표에 표시된 이름을 적어, 일주일 정학을 심심치 않게 주기도 하였다. 이런 사실이 학생들에게 알려진 이후로, 학생들은 여름철에는 교복 상의를 벗고, 겨울철에는 일부러 외투나 파카를 입기도 하여 이름 적히는 불상사를 피하기도 했다. 교복자율화된 1983년 이후에도 여전히 했다고 하나, 사복이기에 단속에 애로사항이 꽃이 피었다고 한탄하는 교사들도 있었다. 타 학교나 학생들이 서라벌중고등학교 학생 및 학교를 비판할 때는 으레 '깨라벌'이란 낱말이 들어 갔는데, 이는 시험문제 난이도 및 교칙이 빡세니, '깨라 꿈, 서라벌'이란 말을 줄여서 그렇게 불렀다. 요즘 (2017~2019년), 1~2학년 학생들에겐(모든 학년이 다 그러는지는 모르겠다) 자학의 의미로 '개라벌'로 불리기도 한다. ~~역시 역사와 전통의 깨라벌→개라벌~~ 학교 앞의 정릉천이 복개되기 전에는 오염이 심하여 상당히 역한 썩은 냄새가 학교까지 날아 와서 그렇지 않아도 학교 앞 도로에서의 매연, 소음 때문에 고생하던 학생들과 교사들은 창문을 닫고서 수업을 하는 것이 전통이었다. 서라벌중학교 1학년의 하교시간(6교시 수업, 오후 3시 하교)이 되면 서라벌고등학교 2부 학생들이 등교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1981년 9월30일, 서라벌중학교 학생과 교사 전원, 서라벌고등학교 1, 2부 학생과 교사 전원을 용산구 [[효창운동장]]에 불러내어 6000명이 넘는 대 인원이 서라벌 대운동회를 벌인 적도 있고, 1978년 9월29일에도 개최(제5회) 하였다고 한다. 가장 인상적인 게임은 중학교 1학년과 고등학교 3학년을 2인 1조로 만든 2인3각 경주. 나이도 5년차에, 키 차이도 평균 25cm 이상 벌어졌기에 한번도 안 쓰러지고, 성공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1982년부터는 1년에 한번씩 9월에 서라벌고등학교 운동장에서 실시되었다. [[효창운동장]]에서 열린 1981년 서라벌 대운동회(제6회) 사진들이 있으며, 희귀한 당시의 전광판 사진도 있다. 1986년까지는 한반에 평균 72명씩, 각 학년별로 12개 학급으로 전체 36개 학급에 2592명의 전교생이 있던 시절도 있었으나, 지금은 한 학급당 30명 내외 학년별로 각 6개 학급 밖에 되지 않는다. 서라벌고등학교도 학생수가 상당히 많았는데, 학급당평균 61명, 1반부터 14반까지는 1부 주간, 15반부터 20반까지는 2부 야간이었고, 고등학생의 수 3660명+중학생의 수 2592명+교직원 및 기타 인원 150명=6402명의 인원이 한 학교에 있었다. 1998년 2월24일, 종업식 당일, 1980년 2학년11반, 2학년12반의 전통을 이어받아, 1학년(43회), 2학년(42회) 학생들은 학교에서 제공해 준 트럭에 걸상과 책상을 싣고, 신축된 교사로 이동하여, 책상과 걸상을 들고 자신의 교실에 옮겨 놓는 노가다를 해야만 했다. 우이동으로 교사를 이전한 이후, 한때 세간에서 문제가 되었던 과격한 졸업식이 자주 행해졌다. 그러나 해를 거듭할수록 많이 나아져, 현재는 벌어지지 않는다. * 1956~1982년 교복 ((서라벌중학교)) 동복---[[가쿠란]] 상하 한벌과 [[학생모]]. 상의에 부착시키는 것으로 한글 이름표(명찰)[하얀바탕에 검은 글씨. 크기 3cm X 10cm], 학교 마크, 학년 마크가 있고, 교모는 한글 '중'자가 박힌 사각형 철제마크를 부착. 이름표는 왼쪽 가슴의 포켓 위쪽에 부착, 가쿠란 단추는 한글 '중'자가 들어간 것이고, 가쿠란 깃에는 왼쪽에는 학교 마크, 오른쪽에는 학년에 해당하는 숫자 1, 2, 3 중 하나를 부착했다. 근처(정릉동, 같은 성북구)의 대일고등학교 교복(동복)도 서라벌중학교와 동일하나, 소매부근에 굵기 0.5cm의 흰줄이 있는 것만 차이점이 있었다. 대일고등학교의 교복(동복)은 한국에선 1975~1982년에만 존재했으나, 원조는 일본의 니혼대학 부잔중학교[日本大学豊山中学校]의 제복으로, 1969년 제정되어 2019년 현재도 현역으로 존재하고 있다. 하복---상의는 짙은 하늘색의 반팔 셔츠, 하의 원단은 하얀바탕에 검은색 점과 파란색 점이 조밀하게 박혀있으며, 조금 멀리 떨어져서 보면 회색으로 보이는 특징이 있으며 당시 전국공통의 색상. 교모는 상당히 개성적인(?) 하늘색 등산모 스타일로 한 가운데, 자랑스러운(?!) 학교 마크가 박혀 있다. 상의에는 왼쪽 가슴에 이름표, 왼쪽 깃에는 학년 마크, 오른쪽에는 학교 마크를 부착, 왼쪽 포켓 상부에 이름표 부착.. ((서라벌고등학교)) - 서라벌고등학교 1부[주간부] 동복---1981년 3월부터 1983년 2월까지, 회색의 같은색 같은 천의 상하의 양복(슈트)형태, 셔츠대신에 회색의 폴로티에 넥타이는 매지 않았다. 교모는 없었으나, 교련시간에 한정하여 서라벌중학교, 서라벌고등학교 2부와 같은 교모를 교련시간에 착용하였고 깃에 학교 마크와 학년 마크를 착용하였고, 기본적으로 학생모와 이름표는 착용하지 않았다. 하복---상하의 모두 서라벌중학교의 것과 같으나, 상의의 색조는 엷은 하늘색인 것이 다르고, 이름표를 부착하고 교모를 착용하였다. - 서라벌고등학교 2부[야간부] 동복---[[가쿠란]] 상하 한벌과 [[학생모]]. 상의에 부착시키는 것으로 한글 이름표(명찰)[하얀바탕에 검은 글씨. 크기 3cm X 10cm], 학교 마크, 학년 마크가 있고, 교모는 한자 '高'자가 박힌 사각형 철제마크를 부착. 이름표는 왼쪽 가슴의 포켓 위쪽에 부착, 가쿠란 단추는 한자 '高'자가 들어간 것이고, 가쿠란 깃에는 왼쪽에는 학교 마크, 오른쪽에는 로마자 I, Ⅱ, Ⅲ중 학년에 해당되는 것을 부착했다. 이름표는 2줄로 윗줄에는 학년반번호의 5자리 숫자, 아랫줄에는 이름이 새겨졌다. 하복---상의는 엷은 하늘색의 반팔 셔츠, 하의 원단은 하얀바탕에 검은색 점과 파란색 점이 조밀하게 박혀있으며, 조금 멀리 떨어져서 보면 회색으로 보이는 특징이 있으며, 등산모 같은 학생모를 착용. * 1977~1981년 입학생 체육복 (같은 재단이라 서라벌고등학교도 상하의 같은 색의 단색 체육복으로 유명. 35회(1992년 졸업)의 졸업앨범을 보아도 여전했다.) 동복---상하의 같은 색상과 천의 가로줄이나 세로줄이 전혀 없는 순수한 단색 체육복으로, 상의는 목폴라와 같은 스타일에, 가슴 왼쪽에 안쪽으로 포켓이 있었다. 양복 주머니, 1990~2011년 사용된 개구리 군복 바지 뒷주머니와 같은 형식. 매년 색상이 바뀌는 특색이 있다. 1977년 입학생 밤색, 1978년 입학생 군청색, 1979년 입학생 녹색 (가장 촌스러운 색상), 1980년 입학생 진한 하늘색, 1981년 입학생 파란색. 하복---색조가 엷은 것이 특징이고, 상의 반팔, 하의 반바지이며, 하의에는 허리띠를 맸다. 특이하게 하의는 하늘색으로 고정이 되었고, 상의는 1977년 입학생 엷은 밤색, 1978년 입학생 파란색, 1979년 입학생 연두색, 1980년 입학생 하늘색 (위아래가 같은 색) , 1981년 입학생 짙은 하늘색.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